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89화 (189/195)

189화 Chapter 39. 치프 (3)

“수선생님, 수액은 이왕이면 5DS(Dextrose Saline, 포도당생리식염수)로 해주세요. 아, 그리고 멀티비타 남은 거 있으면 하나 믹스해주시고.”

“네, 과장님.”

포도당에 비타민까지……?

뜻밖의 대접(?)에 황진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센터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오랜만이야. 아까 잠깐 박 전무님하고 통화했는데, AI 연구는 잘 진행되고 있다면서?”

“네. 그쪽에서도 상당히 적극적인 것 같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김석용 선생도 수고가 많았겠어…….”

누워있는 김석용을 보며 조광필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과로로 쓰러져서 응급실에 실려 온 줄로 알 것 같았다.

뭐… 회식은 업무의 연장이니 그것도 맞나?

아무튼, 적응 안 되는 분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현이 입을 열었다.

“진호야, 먼저 들어가 봐. 여기는 내가 있을게.”

“응? 같이 있어도 괜찮은데…….”

“아냐. 1년차 첫날에…… 김석용 선생님이 나 데리고 응급실에 와서 손수 휠체어 끌고 CT실 내려가 주셨거든. 그거 갚으려고.”

시현 또한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김석용을 보며 말했다.

“그래……. 선배들한테 인사한다고 술 많이 드셔서 그런 걸 거야. 너무 걱정 마.”

황진호가 시현을 안심시키듯 말하며 응급실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이 멀어져가고, 시현의 시선이 김석용의 상태를 모니터링 하는 기기를 향했다.

‘바이탈은 점차 안정되고 있어.’

생존 확률에 대한 어떤 알림창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환자 보호자로서 응급실 베드 옆을 지키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낯설었다.

삼아대병원 정신과 의국과 의국원들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시현이었다.

오죽하면 회귀도 레지던트 1년차로 했겠는가.

그중에서도 특히 김석용에게는 마음의 빚이 있었다.

자신의 마지막 환자를 이어서 봐주겠다고도 했고, 덕분에 사고에 휘말려 사경을 헤매는 상태가 되지 않았던가.

‘뭔가 도움이 되고 싶은데…….’

비록 1년 차이였지만, 레지던트 생활 내내 늘 의지가 되던 사람이 바로 그였고,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바로 그때, 기다렸다는 듯 알림창 하나가 눈앞에 떠올랐다.

딩동!

[system :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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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 떠나요 둘이서 ]

난이도 A

의국원들에게 추가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세요!

성공 조건 : 레지던트 중 1명 이상이 해외 연수 기회 획득.(단, 사용자는 본 퀘스트에서 제외됩니다.)

성공 보상 : 10,000P + α

실패시 : ???

P.S. 레지던트에게도 사랑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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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에 응하시겠습니까? 수락 / 거절 ]

‘……1명이 해외 연수 기회를?’

의국원 중 누군가를 홉스 에킨스로 보내라는 뜻인 것 같은데…….

‘왜 퀘스트 이름이?’

뭔가 로맨틱한 분위기에 당장이라도 제주도로 떠나야 할 것 같지 않은가.

부들부들.

다음 순간, 퀘스트에 달린 추신을 확인한 시현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누가 봐도 김석용과 나희선을 함께 보내라는 뜻 아닌가.

이건 불공정하다.

‘시스템 관리자…….’

중간중간 해괴망측한 업적 보상(?)으로 소개팅과 중매 자연스러운 만남 및 부자연스러운 만남 모두를 막아놓았던 그였다.

그런데 사랑? 사라아앙?

강성진을 떠올리자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진정하자. 진정. 후우…….’

김석용에게 뭐라도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잠깐 사라질 뻔 했으나, 시현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일단은 전공의 시험에서 김석용 선생님이 성적만 내면 되겠어.’

그래도 다행인 게 성공 조건이 그리 까다롭지는 않았다.

퀘스트 제목과 추신만 보면 김석용과 나희선 두 사람이 동시에 미국으로 떠나야 할 것 같지만, 의국원 중 한 명만 해외로 보내도 퀘스트는 성공이다.

자신을 제외하면, 사실상 김석용이 가장 유력한 것도 사실이고.

‘사용자 제외라는 말이 조금 억울하기는 하지만…….’

최근 늘어난 병원 업무를 생각하면,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보통 해외 연수는 주인공이 가지 않나?’

좋은 기회를 얻어 해외 유명 병원에서 몇 달간 근무하는 건 메디컬물이라면 반드시 나와 줘야 하는 에피소드였다.

우선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외국 교수들에게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면서 통쾌함을 줘야 하고, 거기서 얻은 인연으로 월드 클래스의 의사가 돼야 하지 않는가.

다국적 제약회사의 고위 임원급과 서로 이름 부르는 사이가 되고 어쩌다 우연히 마주친 금발벽안의 미녀와도 인연이 닿아야 하는데…….

‘강성진…….’

으득.

그의 기이한 안배 덕분에 응당 누려야 할 것들을 놓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응급실 문이 열리고.

낯익은 모습의 두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선지 쌤이 여긴 왜……?”

“어휴. 오늘 다들 너무 달리는 분위기라 힘들기도 하고… 석용 쌤 걱정되기도 하고 해서 와봤어요.”

“신규희 선생님도 오셨네요.”

“네… 저도 좀 걱정이 돼서…….”

신규희가 쭈뼛거리며 시현의 말에 대답했다.

‘우리 병동으로 온 지는 몇 달 안 되지 않았나?’

전에는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간호사였다.

그래서인지 지나가는 간호사 몇몇이 그녀에게 알은체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입사한 지는 몇 년 됐으나 최근 과를 옮긴 터라 병동 간호사 중에서는 가장 막내였다.

이선지야 정신과에서 근무한 지 벌써 5년이 다 되었으니 김석용과 친분도 있었고,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가다 들렀다고 해도 리 이상할 게 없었지만…….

‘신입이나 다름없는 간호사가 굳이 여길? 이 새벽에?’

시현이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좀 어떠세요?”

이선지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김석용을 바라보았다.

“아까보다는 좀 낫지만 그래도 여전히 의식이 혼탁한 상태예요.”

“제가 계속 옆에 있어서 수시로 보긴 했는데 기척이 없어서 그냥 자는 줄로만 알았어요. 별일은 없겠죠?”

그녀는 김석용의 상태를 너무 늦게 알아챈 것 같다며 울먹였다.

“그러길 바라야죠. 곧 CT 촬영하고 다른 검사도 여럿 나갈 거니까 놓치는 건 별로 없을 겁니다.”

“다행이네요.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왜 이런 걸까요?”

“글쎄요. 원인이야 너무 다양해서…….”

시현이 속으로 가능한 원인을 하나 둘 추려보는데,

“괜찮으실 거예요! 아까 보니까 술 정말 많이 드시던데…… 그것 때문일 수도 있고요. 간수치만 안 오르면 되지 않을까요?”

돌연 신규희가 시현에게 물어왔다.

“네? 간수치와 의식 수준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극도로 간기능이 떨어져 간성혼수가 온 상태라면 모를까.

간수치가 어느 정도 상승한 것만으로는 의식을 잃기 어려운데, 일반인도 아니고 간호사가 물어보는 질문 치곤 뭔가 좀 이상했다.

“어? 규희 왔어? 오랜만!”

“으, 응…….”

수액 라인을 잡으러 온 응급실 간호사가 그녀에게 인사했으나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선생님, Sample(혈액채취)하고 바로 CT실 가나요?”

“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곧 연락이 올 것 같은데 서둘러주세요.”

시현의 말에 응급실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고,

“으으. 아야아…….”

왼쪽 팔뚝으로 주삿바늘이 들어가자 김석용이 신음하며 눈을 번쩍 떴다.

“선생님, 정신이 드세요?”

“어… 시현아…….”

김석용이 그의 옆에 서 있던 시현을 알아보며 말했다.

“네, 선생님. 괜찮으세요? 어지럽지 않으세요?”

“머리가……. 아까 부명 타이에러 머겅는데…….”

그는 정신을 차리기가 무섭게 이마에 손을 얹으며 인상을 구겼다.

자다 깬 탓인지 발음이 불분명했다.

“타이레놀이요? 두통약을 이미 드셨다고요?”

“어… 그리고 위랑약도…….”

김석용은 거기까지 이야기한 뒤 스르륵 눈을 감았다.

‘타이레놀에 위장약…….’

그런데도 여전히 두통을 호소하는 그였다.

통증으로 인해 잠시 눈을 떴을 뿐 여전히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끔 진통제는 제대로 된 진단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약물 효과로 인해 증상이 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더 안 좋은 상태일 수도 있고,

상당수 진통제는 해열 작용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열이 나야 할 상황에서도 정상 체온을 보여 혼선을 주기도 한다.

“약물 영향도 고려해야겠군요.”

“사실…… 그 타이레놀 제가 드린 거예요. 위장약도요.”

“네? 술 많이 드신 상태였을 텐데 거기에 약을요?”

“네. 원래는 드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선지가 몸을 움츠리며 간신히 아까 맥줏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마약성 진통제도 아니고 편의점에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이라 지금 증상과는 무관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얘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 와봤다는 말과 함께.

“시현 쌤, 수선생님께는 절대로 말씀하시면 안 돼요!”

그녀의 말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기가……. ‘보고’는 치프 선생님과 상의해서 결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현의 말에 두 사람은 살짝 안도한 듯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석용이라면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할 것 같지 않았다. 좋은 판단은 아니긴 했지만, 결국 약도 본인이 먹은 것이고 일을 키우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휴우. 아마 치프 선생님이라면 이해하실 거예요.”

“아마도 그렇겠죠. 하지만 절대로 가볍게 볼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현의 생각은 달랐다.

위험한 약인지 여부를 떠나서 약품 관리의 문제 아닌가.

정신과 병동 특성상 향정신성의약품도 다량 구비되어 있는데, 관리 소홀은 자칫 의료사고로 번질 수도 있었다.

“만약 제가 치프였다면, ‘과장님’께 ‘보고’했을 겁니다.”

“석용 쌤이야 워낙 친하고 해서…… 어휴, 내가 왜 이런 오지랖을……. 앞으론 이런 일 절대 없을 거예요.”

다음 순간, 이선지의 뒤편에 선 신규희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채로 마주 잡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는 모습.

그저 걱정하는 수준을 넘어 초조하게까지 보이기까지 했다.

[system : 간호사 신규희의 주된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

걱정이나 불안이라면 모를까 두려움이라니.

약은 이선지가 챙겨줬다는데…… 그리고 보니 아까 간수치 운운할 때도 뭔가 이상한 낌새가 있었다.

‘혹시…….’

잠시 생각한 끝에 시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선지 선생님.”

“네? 시현 쌤 왜…….”

무섭게 왜 평소에 안 쓰던 경어를 다 쓰냐고 물으려던 찰나, 시현이 재차 물어왔다.

“그런데 그 ‘타이레놀’ 정말 이선지 선생님이 챙겨온 거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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