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90화 (190/195)

190화 Chapter 39. 치프 (4)

“그런데 그 ‘타이레놀’ 정말 이선지 선생님이 챙겨온 거 맞습니까?”

그 말에 두 사람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그럼요. 제가 챙겨왔죠.”

[system : 간호사 이선지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신규희 간호사님은 전혀 모르는 일이고요?”

“얜 아무것도 몰라요. 석용 쌤 편두통 있는 것도 제가 알지 누가 알겠어요.”

[system : 간호사 이선지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뭘 숨기는 거야?’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 *

1시간 전.

시현과 황진호 그리고 김석용이 구급차를 타고 떠난 뒤.

“석용 쌤 갑자기 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수, 술을 많이 드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아……. 뭔가 찝찝한데. 규희 너 약 제대로 챙겨온 거 맞아?”

이선지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신규희를 훑어보았다.

“약 남은 거 있으면 줘봐 봐.”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혹시 정신과 약이 섞여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없어요. 아까 치프 선생님 드린 게 전부였어요.”

“그렇단 말이지…….”

그녀는 즉시 병동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일인 만큼 따로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저 선지인데요, 혹시 약장에 상비약 함 보시면…….”

그녀는 일단 폐기 예정인 알약들을 모아놓은 병을 살펴봐달라고 했고,

- 뭐 두통약, 소염제, 소화제 말고는 별거 없는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

다른 약이 섞여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냥 일반 약이라 별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그럼요! 제가 모양이랑 다 확인했는걸요!”

이선지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술 때문이거나 약과는 무관한 다른 질병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일단 병원으로 한 번 가보자.”

“네, 선생님.”

“표정 풀어. 석용 쌤한테 말한 건 나니까 약은 내가 드린 걸로 할게. 걱정하지 말고.”

“네……. 감사합니다.”

이선지는 후임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울 만큼 뻔뻔한 사람은 못됐다.

그러나 그녀가 모든 책임을 지겠노라고 말했음에도 신규희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 * *

“그래서 혹시나 다른 약이 섞였을까 봐 병동에 확인까지 했다는 거죠?”

“네. 당연하죠! 약에 대한 부분은 그게 전부예요.”

‘타이레놀 2T에 모사프라이드 2T…….’

Acetaminophen 1300mg과 Mosapride 10mg.

이 정도의 증상을 초래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양이었다.

시현이 간호사들과 이야기하는 동안 또다시 김석용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지근…… 며이지?”

지금 시각을 확인하려는 듯 김석용은 주섬주섬 웃옷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찾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면을 열어 내용을 확인한 김석용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삐- 삐이-

그의 팔에 연결된 모니터 기기에 경고 신호가 들어오고.

[150 / 100mmHg HR 130 /min]

돌연 혈압과 분당 맥박수가 치솟기 시작했다.

“자, 잠까안 이르켜 줘…… 이건 꼭 과랑님께 말흠을 드리고 상의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발음이 뭉개지고 있었다.

“선생님! 진정하세요!”

‘무슨 내용이길래…….’

딱 봐도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이 지경이 되어서도 과장님에게 보고부터 하려는 모습이 과연 김석용다웠다.

“전화는 제가 드릴게요. 무리하지 마시고 우선 누워 계시면…….”

시현이 어떻든 앉으려는 그를 다시 눕히는데, 돌연 김석용이 흰자위를 뒤집어 보였다.

앉은 자세임에도 심하게 휘청였고,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알림창이 뜨지 않는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이거 괜찮은 거 맞아?’

[SORA : 레지던트 김석용의 생존 확률이 소폭 감소한 상태입니다.]

‘생존 확률에 영향을 줄 정도라고? 그걸 왜 이제야…….’

[SORA : 생존 확률이 50% 미만으로 떨어질 때 사용자가 인지할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생존 확률을 출력할까요?]

‘바로 부탁해.’

딩동!

[생존 확률 100 -> 99% 퇴실까지 6시간 5분 39초]

응?

‘1% 깎였네…….’

생존 확률 99%에 몇시간 내로 퇴실할 예정.

이 정도면 응급이라고 보기엔 힘들지 않나.

그러나 눈을 위로 치켜뜬 채 몸을 떨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석용 쌤! 정신 좀 차려봐요!”

“김 선생! 여기 좀 보게!”

황진호와 수간호사가 동시에 달려들어 그를 붙잡았고.

엄주영이 다가가 그의 눈에 펜라이트를 비췄다.

“으어어…….”

후두둑.

뻣뻣해진 몸으로 몸부림치느라 그의 팔에 잡아놓은 수액 라인이 뜯겨나갔고,

그가 입고 있던 흰색 셔츠 군데군데 핏자국이 번졌다.

“무슨 일이야? 아니, 김석용 선생! 괜찮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조광필마저 이쪽으로 다가와 소리쳤다.

“의식 떨어지고 바이탈 불안정하다! IV 라인 다시 확보하고!”

“넵!”

“CT실은 왜 아직도 연락이 없어? 전화해서 푸쉬해 봐! 급하다고!”

응급의료센터 센터장과 수간호사 그리고 펠로우까지 한 환자에 매달려있는 모습.

도대체 무슨 환자길래…….

다른 환자들의 시선마저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

오직 시현만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금 상황을 지켜보았다.

[system : 레지던트 김석용의 생존 확률이 소폭 증가합니다.]

[생존 확률 99% -> 100% 퇴실까지 6시간 4분 10초]

‘이거…… 뭐지?’

의료진의 지나친 관심에 그나마 조금, 아주 조금 떨어져 있던 생존 확률마저 완전히 복구되었다.

더 궁금한 것은 증상이 나타나는 원인이었다.

혀가 좀 꼬여있기는 했지만 과장님과 뭔가를 상의해야 한다고 의견을 말하기도 했었고, 주변 환경을 인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은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어 마치 섬망 증상이 생긴 것 같지 않은가.

‘의학 정보실.’

생존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두통과 의식 혼탁 그리고 안구 움직임의 이상까지 보일 수 있는 상황을 찾아야 했다.

[SORA : 의학 정보실에 접속합니다.]

시현은 한참 동안 관련 문헌을 찾아봤지만, 특별히 의심 가는 진단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증상을 보일 수 있는 진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대로라면 남은 가능성은 몇 가지 없었다.

지금껏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던 극히 드문 질환이거나, 아니면…….

[Substance Induced Anterograde Amnesia]

좀 있어 보이게 포장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실상은 술 먹고 필름이 끊겼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가누지도 못하는 몸으로 뭔가를 해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것 정도가 더해진 상태랄까.

‘정말 술이…… 문제인가?’

[SORA : 물질 유발 운동장애와 의식 변화가 의심됩니다.]

SORA가 내린 결론 또한 같았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알코올 중독자가 수술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술을 마시지 못해 금단증상이 생기는 경우 저런 식의 진전과 의식 소실을 보일 수는 있다.

하지만 김석용은 평소 술을 그리 즐겨하는 편도 아니었고, 심지어 지금은 술에 취해서 들어온 상태이니 상황이 맞지 않았다.

‘떨림에 뻣뻣함. 위로 치켜뜬 눈.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증상…….’

김석용의 증상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던 시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깐만. 이거 추체외로 부작용이잖아.’

추체외로 부작용(Extrapyramidal symptoms)

항정신병약물을 과량 복용한 환자들에서 주로 나타나는 부작용.

근육 긴장 이상과 떨림 그리고 가만히 앉은 채로 있기 힘들어 몸을 흔드는 등의 증상을 보일 수 있다.

의식 소실과 빈맥에 가려져 미처 모르고 있었을 뿐, 외래에서 너무도 흔하게 보던 부작용이었다.

‘애초에 타이레놀과 위장약이라고 생각했던 게……. 항정신병약이었다면?’

이선지가 병동에 재차 확인했다는 말에 그 가능성을 배제한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술에 취했고 가게 조명이 어두웠다고 한들 김석용마저 착각할 정도로 비슷해야 했다.

‘원내 항정신병약물 모두 출력해줘.’

[SORA : 항정신병약물 리스트와 약품 정보를 출력합니다.]

새로운 메시지와 함께 수십 개의 정보창이 허공에 떠올랐다.

약물 이름과 기본적인 정보 그리고 약물의 실측 사진까지.

익숙한 약물들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은 낯설기만 했다.

여러 종류의 타이레놀 중 전문의약품으로 처방되는 건 장축 19.2mm 단축 7.8mm에 두께 6.2mm인 제법 큰 알약이었다.

실내가 어두웠다고는 해도 크기 차이가 많이 나는 약을 김석용이 무턱대고 먹었을리 없었다.

‘흰색 이외의 정제는 제외하고, 길이는 16mm 이상, 두께 6mm 이상…….’

[SORA :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제제들을 소거합니다.]

정보창들이 하나 둘 닫히기 시작했고, 시현은 이내 의심 가는 알약을 찾을 수 있었다.

약에 새겨진 식별문자를 보지 않으면 타이레놀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거의 같은 크기였다.

‘설마 이걸 드셨다고? 그것도 두 개나?’

그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베드에 누워있는 김석용을 바라보았다.

* * *

삐- 삐이-

“CT실은 왜 전화 안 받는데? 안 되겠다. 그냥 끌고 내려간다!”

“넵! 선생님!”

여전히 모니터링 기기에서 경고음이 울리는 가운데.

응급의학과 펠로우 엄주영이 인턴들과 함께 김석용을 스트레쳐카로 옮기며 외쳤다.

“증상 보니까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뇌 병변이 의심된다! 술 때문에 그러려니 하면 환자 놓친다!”

“넵, 선생님!”

“저… 선생님…….”

시현이 뭔가 말하려 했지만 엄주영의 목소리가 워낙 컸고,

“혹시라도 신경계 감염도 배제해야 하니까 신경과 호출해!”

“넵! 호출하겠습니다!”

“인턴 선생…… 잠깐만.”

충직하기 그지없는 인턴은 이미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신경과 호출이라면…….’

일단 CT를 찍어보고 뇌졸중이나 다른 이상 소견이 없으면 뇌척수액 검사를 할 게 분명했다.

뇌척수액 검사.

허리에 긴 바늘을 삽입해서 뽑아낸 뇌척수액을 분석해서 뇌막염과 같은 감염의 징후가 있는지 확인하는 검사인데, 통증도 심하고 검사 후 한동안은 반듯이 누운 자세를 유지해야 해서 번거로운 검사였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 상태라면 분명 CT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 평소 건강했던 김석용이라면 혈액 검사에서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터.

결국 불안정한 바이탈과 의식 변화의 원인을 찾겠다고 온갖 검사를 다 하게 될 공산이 컸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원인은 못 찾고.’

이럴 줄 알았다면 애초에 그냥 술을 평소보다 훨씬 많이 마셔서 그런 것 같다고 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선생님들! 잠, 잠깐만요!”

시현이 일단은 조금 지켜보자고 말하려는데,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CT실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의료진들이 우루루 빠져나간 후,

텅 빈 베드 주변에는 시현과 이선지 그리고 신규희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아… 갑자기 왜 이러시지?”

“어떡해요… 김석용 쌤 많이 안좋은 가봐요. 혹시라도”

두 간호사는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빈 베드를 보고 있었고,

시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약물이 문제라면 증상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테고…….’

김석용이 걱정되긴 했지만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는 아니었고, 응급실에서 모니터링까지 하고 있으니 더욱 안심이었다.

‘단순한 실수인지. 아니면…….’

오히려 어쩌면 그것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확인하는 게 더 중요할 수도 있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두통약이 아닌 거 같은데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시현이 이내 입을 열었다.

“네? 선생님,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항정신병약물이에요. 그것도 상당히 고용량의…….”

그리고 이어진 시현의 말에 신규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퀘티아핀 400mg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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