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Chapter 39. 치프 (5)
“네? 선생님,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항정신병약물이에요. 그것도 상당히 고용량의…….”
그리고 이어진 시현의 말에 신규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퀘티아핀 400mg 맞죠?”
퀘티아핀 400mg 서방정.
추체외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으면서 타이레놀과 비슷한 약물은 그것뿐이었다.
특히 명환제약에서 나온 제품은 그 크기가 더욱 비슷해서 장축, 단축, 그리고 두께 차이가 채 1mm도 되지 않았다.
두 알을 먹었다면 800mg.
퀘티아핀은 25mg만 복용해도 다음날 아침까지 푹 잤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김석용은 상당히 고용량을 한 번에 복용한 상태였다.
게다가 낮은 용량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증량한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800mg으로 시작했으니 의식을 잃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행인 점은 진정작용은 매우 강한 반면 치료 용량 범위가 매우 넓은 약이라는 것.
같은 약이지만 용도에 따라 하루 12.5mg부터 1000mg 이상 복용하는 환자도 종종 있었다.
“퀘티아핀 400mg…….”
이선지가 흠칫 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 복용하는 환자의 경우, 급성 조증이나 조현병으로 입원이 필요할 정도여도 첫날에는 300mg 한 알이 최대 용량인데, 400mg를 두 알 먹었다면?
의식을 잃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설, 설마요. 제가 보기에는 타이레놀 같았어요. 병동에 확인했을 때도 맞는다고 했고요.”
이선지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투로 말했다.
딩동!
[system : 간호사 이선지가 진실을 말합니다. (99.9%)]
‘이쪽은 일단 문제없고…….’
회귀 전 인턴 때부터 봐오던 인물인 만큼 예상했던 결과였다.
의심이 갔던 건 처음부터 이쪽이었다.
“신규희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정말 두통약인가요?”
“그럼요! 제가 눈으로 직접 확인했는 걸요! 그런 약인 줄 알았으면 선생님께 안 드렸죠!”
[system : 간호사 신규희가 거짓을 말합니다. (99.9%)]
‘역시…….’
애초에 두통약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김석용이 먹었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다만 나쁜 의도를 가지고 김석용을 해치려 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 목적으로 쓰기에는 훨씬 더 크기가 작고 눈에 띄지 않는 약들이 여럿 있었으니까.
‘타이레놀을 챙기는 척 실제로는 다른 약을 챙겼는데…… 그걸 이선지가 먹도록 한 거라면?’
오지랖 넓은 이선지의 성격상 김석용이 두통으로 앓고 있는 건 두고 보지 못했을 터였다.
마침 신규희가 약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상황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다시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된 일인지 사정을 듣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긴 이유만큼은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야 했다.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예요. 치프 선생님 수준에서 상의하고 끝낼지, 아니면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할지.”
이유에 따라 그녀에 대한 처치가 달라질 수 있었기 때문.
“너무하시네요. 병동에서 유통기한 지난 두통약 몇 개 가져온 게 그렇게 잘못인가요?”
“맞아요! 천 쌤, 규희가 나쁜 마음 먹고 그런 건 아닌데……. 너무 그러지 말아요.”
시현이 과하다고 생각했는지 이선지가 그녀를 두둔하고 나섰다.
“선생님,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근거 없는 추측 수준 아닌가요? 석용 쌤이 무슨 약을 먹었는지 선생님이 어떻게 아시죠?”
이선지의 말에 힘을 얻은 것인지 신규희가 격하게 반발했다.
‘일단 아니라고 하자. 어차피 증거는 없어…….’
증거라면 이미 김석용의 뱃속에서 녹아 사라졌을 테고,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약물에 의한 진정 효과는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그때가 되면 술 때문이었는지 약 때문이었는지 어떻게 구분하겠는가.
신규희는 짐짓 억울한 척을 했으나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system : 신규희의 주된 감정이 ‘두려움’ --> ‘당당함’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일단 우기기로 결심하자 마음이 편해지기라도 한 것일까.
새로 떠오른 알림창에 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리튬이나 발프로산 같은 약물들은 주기적으로 혈중 농도 검사를 하며 처방하는 약물이기에 복용 여부를 쉽게 알 수 있지만, 퀘티아핀은 보통은 혈중 농도 검사를 시행하지 않는다.
연구용으로 간혹 검사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주말에는 불가능했다. 일과 시간 외에는 진단검사의학과도 최소 인력만을 유지하기에 응급 검사만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물을 검출할 수 있는 방법이…….’
정황상 거의 확실한데,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자칫 괜한 의심을 했다며 사과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저희 왔습니다! 치프 선생님은 괜찮으십니까?”
시현이 고민하는 사이 고채연과 장미은 예비 1년차 두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치프 선생님은 CT 촬영 가셨는데, 선생님들은 여기 어쩐 일로?”
입퇴국식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인데 자리를 비우고 온 것이 의아했다.
“과장님께서 이만 숙소로 들어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치프 선생님 술 많이 드신 것 같은데 저희도 걱정된다고 하시면서……. 하지만 이렇게 멀쩡합니다. 하하하.”
고채연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럼 숙소로 가서 쉬어야지. 여긴 왜……?”
“치프 선생님께서 응급실에 계시는데 저희가 어떻게 편히 자겠습니까?”
“맞습니다. 선생님 깨실 때까지 저희가 있겠습니다.”
‘의국 분위기가 이상해졌어.’
아까 보니 선배님들은 참 좋아하시던데…….
그녀들의 각 잡힌 태도와 깍듯한 말투에는 여전히 적응이 어려웠다.
‘옛날엔 어땠더라…….’
시현이 예전 의국 분위기를 떠올려 보는데, 신규희가 그녀들을 반기며 말했다.
“어머, 새로 오신 1년차 선생님들이세요? 반가워요! 저도 이번에 9병동에 새로 왔어요!”
“저희도 반가워요! 잘 부탁드려요!”
“당분간은 병원에 매일 있을 거 같아요. 언제든 연락하세요!”
그 모습에 회귀 전 1년차들의 모습과 신규희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 와…… 규희 쌤, 어제 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무슨 환자들이 단체로 잠을 못 자요…….
- 그게 제 잘못이에요? 환자분들 못 자는 걸 왜 저한테…….
- 아, 그런 뜻이 아니고 이상하게 규희 쌤 이브닝 때 콜이 많이 와서…… 인간 각성제세요?
그땐 그저 며칠 주기로 환자들이 잘 못 잔다고만 생각했었다.
하루 잘 자면 다음 날 못 자기도 하고 며칠 못 자다 보면 푹 자는 날도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 일을 겪고 다시 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설마… 수면제나 진정작용이 있는 신경 안정제를 빼돌린 건가?’
만약 환자에게 처방된 약을 바꿔치기 해서 수면제를 모았다면 그건 진짜 큰일이었다.
‘그럼 모사프라이드(위장약의 일종)라고 했던 약은…… 혹시 졸피뎀?’
졸피뎀(Zolpidem)
수면제의 일종으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처방되는 약물 중 하나였다.
두 약물은 각각 위장약과 수면제로 용도는 완전히 달랐지만, 모두 크기가 작고 길쭉한 편이라 간혹 헷갈릴 수도 있었다.
실제로 환자들이 수면제를 줄여보겠다고 뺀 약이 알고 보면 위장약인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위장약을 처방했는데 수면제인 줄 알고 잘 잤다고 하는 환자들도 있었을 정도.
만약 김석용이 먹은 ‘위장약’이 졸피뎀이었다면?
타이레놀을 퀘티아핀 400mg로 바꾼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졸피뎀은 엄연히 향정신성의약품에 속하는 약물이고,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취급되어야 했기 때문.
그만큼 의존성과 오남용의 위험을 잘 모니터링하며 써야 했다.
‘이거…… 잘못하면 신문에 나오는 것 아닌가?’
환자에게 들어갈 약을 빼돌린 병원 직원이라니.
엄밀히 말하면 아직 병동에 온 지 얼마 안 된 터라 빼돌‘릴’ 직원이지만.
시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드르르륵.
어느덧 김석용은 CT 촬영을 마치고 돌아왔다.
“휴. 다행히 바이탈도 안정되고 별일은 없었는데…… CT 찍는데 자꾸 움직여서 시간이 오래 걸렸네. 그런데 여기는 무슨 보호자가 이렇게 많아?”
시현을 포함한 레지던트 3명과 병동 간호사 2명.
응급의학과 펠로우 엄주영이 베드 주변을 에워싼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마침 입퇴국식 중이라 다들 모여 있어서요…….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시현이 김석용을 데리고 온 엄주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일단 CT 판독 나올 때까지는 기다려봐야겠지만……. 만약 거기서 이상이 없다면 뇌척수액 검사하고 추가로 MRI까지 해봐야 할 것 같다.”
엄주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Brain CT에서 뇌 병변이 나와도 문제였고, 안 나와도 다른 더 위험한 질환은 없는지 추가로 평가해야하니 문제였다.
어느 쪽이든 그리 달갑지 않은 상황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반면 시현의 표정은 제법 여유로웠다.
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안 이상, 검사하느라 고생을 좀 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도 가능한 검사는 최소한으로 하는 게 좋겠지…….’
그것도 모든 상황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검사를.
“선생님, Lumbar puncture(뇌척수액 검사를 위한 요추천자) 전에 추가 검사를 해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무슨 검사? 아, MRI부터 찍는 게 낫다는 건가?”
“아니요.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추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응? 그 검사들은 아까 다 했는데?”
응급실에 들어오자마자 기본적인 혈액검사는 모두 마쳤고, 지금까지 별다른 이상소견은 발견되지 않았다.
혈액검사로는 추가로 해서 얻을 정보가 없을 텐데.
시현의 말에 엄주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기본 검사에 추가로 약물 농도 검사를 해야 합니다.”
“약물 농도 검사? 아까 두통약하고 위장약 정도 먹었다고 하지 않았어?”
“김석용 선생님이 응급실에 도착해서 보인 증상들은 항정신병약물을 과량 섭취했을 때 보이는 EPS(추체외로증상)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항정신병약물이면 조현병이나 조울증 치료에 쓰는 약들 아닌가?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의식 떨어지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데?”
“의식 저하와 섬망과 유사한 증상은 벤조디아제핀(신경안정제)이나 Z-drug(수면제의 일종)을 복용했을 때 흔히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증상만 보면 그렇긴 한데…….”
시현의 설명에도 엄주영은 고개를 저었다.
증상을 하나하나 놓고 보면 시현의 말이 맞지만, 평소 김석용을 생각하면 조울증이나 불면증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사람이었다.
“석용이가 그런 약들을 과량 복용했을 리가 없잖아?”
“모르고 드셨을 수도 있습니다. 약 모양이 비슷한 것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어쩌면 누군가가 ‘실수로’ 잘못 챙겨줬을 수도 있고요. 일단 확인해야 할 항목은 Quetiapine, Amisulpride…….”
시현은 엄주영에게 의심 가는 약물 몇 가지에 대한 혈액검사를 요청했고,
동시에 신규희가 서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그리고 ‘졸피뎀’에 대한 검사가 꼭 필요합니다. 최대한 빨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