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의사 시점-192화 (192/195)

192화 Chapter 39. 치프 (6)

“……그리고 ‘졸피뎀’에 대한 검사가 꼭 필요합니다. 최대한 빨리요.”

동시에 신규희가 서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선생님,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어요? 규희가 온 지 얼마 안 되긴 했어도 성실하게 일 배우고 있고 잘하고 있는데……. 의심이 지나친 거 아니에요?”

시현의 의견에 이선지가 불만을 터뜨렸다.

“증상을 고려하면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우리 병동 간호팀에 과실이 없다는 걸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검사고요.”

‘시현 쌤이 왜……. 3년차 되더니 변했나.’

이선지가 실망한 표정으로 시현을 바라보았다.

평소 병동 간호사들과 관계가 좋기로 손에 꼽는 레지던트가 아니었던가.

마냥 친절하고 잘해주기만 했냐면 그건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환자를 잘 보는 터라 간호사들의 일도 덩달아 줄었고, 꼭 필요한 상황에 어김없이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주곤 했었다.

유독 시현이 맡은 환자의 보호자들은 병동에 간식도 많이 사다 주곤 했었고…….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무튼, 그랬던 시현이 오늘처럼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규희야, 천 쌤이 걱정돼서 저렇게 하는 것 같은데 뭐라고 말 좀 해봐! 네가 신규도 아니고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이선지는 답답한 마음에 신규희를 채근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규희… 야?”

근거 없는 추측이라며 열을 올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천 선생……. 아니, 시현아. 잠깐 보자.”

분위기를 파악한 엄주영의 표정이 이내 심각해졌고, 그는 시현과 함께 응급실 내 면담실을 향했다.

* * *

“검사 꼭 해야겠니? 너 그게 무슨 의미인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결연한 표정의 시현을 보니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이 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졸피뎀(Zolpidem)은 기본적으로 가장 대중적인 수면제 중 하나였다.

저렴하면서도 입면 효과가 뛰어나고 몸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 다음 날 숙취감이 덜한 장점이 있기 때문.

그러나 그런 장점들을 무색하게 만들만한 부작용도 있는데, 과량 복용 시 기억 상실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범죄, 특히 성범죄에 악용될 가능성이 있었고,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하여 처방일수에 제한을 두는 약물이기도 했다.

“처방받은 적도 없는 졸피뎀이 검출된다……. 이거 보통 일 아니다.”

설령 처방받은 적이 있다고 해도 회식 중 졸피뎀을 챙겨 먹었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고, 누군가 김석용에게 졸피뎀을 먹였다는 것인데…….

고의는 고의대로 실수는 실수대로 충분히 이슈가 될 수 있었다.

그게 같은 병원 직원이라면 더더욱.

“병원 소문 빠른 거 잘 알잖냐. 어쩌면 언론에도……. 신중히 생각해야 해.”

“그렇다고 이대로 덮을 수는 없습니다.”

간호사 한 사람에 대한 처벌은 둘째 문제였다.

신규희가 가지고 있던 약물은 아마도 환자에게 처방된 약물을 중간에서 빼돌린 것일 터였다.

치료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약물을 제대로 복용했다는 전제가 필요한데, 만약 간호사가 약물 몇 종류를 빼고 투약했다면?

효과 판정이 어려워지고 병동에서 하는 치료 전체를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시현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무조건 덮자는 게 아니고……. 아무래도 ‘실수’ 같은데 당사자한테 사과받고 끝내는 게 좋지 않을까? 너희 과 생각도 해야지.”

이쪽으로 온 지 얼마 안 된 간호사라고 해도 엄연한 정신과 소속의 의료진이었고,

한창 새로운 사업들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런 일이 불거지면 과 이미지에 좋을 게 없었다.

‘과에 영향이…….’

어쩌면 혼자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시현이 입을 열었다.

“김석용 선생님 깨어나면 상의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일단 검체는 확보해둘게.”

“네! 바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몸속에 머무는 시간이 짧은 약물인 만큼 검사는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두 사람은 면담실에서 나와 각자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만 들어가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

시현은 신규희와 이선지 그리고 신입 1년차들을 돌려보냈다.

고채연이 자기도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숙소로 돌아가 쉬도록 한 것이 과장님의 지시였다는 것을 상기시키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110 / 75mmHg HR 86 /min]

바이탈은 아까부터 안정상태.

딱히 할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그가 깨어나면 의논할 일이 있었다.

‘김석용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할까?’

당장 피해를 본 건 자신뿐이니 더 이상 일은 벌이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다.

신규희에 대한 건 간호부와 상의해서 최대한 조용히 처리하도록 하고…….

원내에 도는 소문이야 모두 막을 수는 없겠지만, 당사자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이상 원내 규정에 따른 처벌 정도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

“추가 검사 있어서 채혈하겠습니다.”

잠시 후, 엄주영의 지시로 액팅 간호사가 검사용 튜브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나타났다.

그녀가 김석용의 팔을 걷고 채혈을 준비하는데,

스르륵.

침상 난간에 대충 걸쳐놓은 김석용의 웃옷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어머,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검사 바로 해주세요.”

투욱.

시현이 옷을 집어 올리자 이번에는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휴. 안 깨졌다.’

다행히도 액정은 멀쩡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갑자기 화면이 밝아졌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짧은 진동 두 번과 함께 떠오른 메시지들.

본의 아니게 그 내용을 확인한 시현의 눈이 커졌고.

이내 망설임 없이 발신 버튼을 눌렀다.

* * *

“어떻게 된 거예요? 김석용 선생님 의식이 없다고요? 괜찮은 거예요?”

세연대병원 정신과 4년차 나희선.

응급실로 달려온 그녀는 시현을 보자마자 질문을 쏟아냈다.

그녀 또한 세연대병원 치프로서 교수님들을 모시고 삼아대병원 정신과 컨퍼런스에 참석했었다.

평소 가깝게 지냈던 김석용이 인상적인 발표를 하는 모습에 내심 흐뭇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상태로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네, 갑자기 쓰러지셔서 이쪽으로 옮겼습니다. 의식도 없으시고…… 일단은 검사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떤 상태길래……. 다친 곳은요?”

“모르겠습니다. 크흡. 저희가 좀 더 일찍 발견 했어야 했는데…….”

시현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희가 못 본 사이에 어디 부딪힌 건 아닌지……. 지금으로선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김석용이 입고 있는 셔츠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새하얀 셔츠와 곳곳에 튄 핏물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사실은 아까 수액 라인이 뽑히면서 핏물이 튄 거였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어디 크게 다쳤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혹시 뇌출혈 이런 건 아니겠죠?”

“결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 어떻게 이런…….”

나희선은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김석용을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았고, 이내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괜찮… 았나?’

[SORA : 사용자의 연기력 향상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Brain CT image 띄워줘.’

[SORA : 영상 자료를 출력합니다.]

아직 정식 판독이 나오지 않았을 뿐, Brain CT에 이상이 없다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일단은 말을 아꼈다.

“석용 쌤. 어떡해…….”

급히 나온 탓에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칼이 젖어있었고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지만,

오히려 평소보다 더 청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깊은 잠에 빠져있는 듯한 모습의 김석용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침상 난간을 붙들고 있는 나희선.

뭔가 큰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후후. 빨리 오셨군.’

시현은 응급실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응급실에 도착한 것은 시현과 통화를 마친 지 불과 30여 분 만이었다.

‘분위기 좋고.’

시현이 김석용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나희선이 보낸 메시지들이었다.

[천하대병원 정약준 교수님 추천서 받으면 해외 연수 갈 수 있대요! 혹시 알고 있어요?]

[전공의 시험 성적 보고 추천해주신다는데 선생님도 한 번 준비해봐요. 같이 가면 재밌을 것 같은데.]

[입퇴국식 한다더니 술 많이 마신 거예요? 답도 없고…….]

오오.

‘나희선 선생님도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

일부러 본 건 아니었지만, 나희선이 김석용에게 해외 연수를 권하는 내용이었다.

같이 가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이건 기회다.’

퀘스트 창에서 보았던 내용이 아른거렸다.

[성공 보상 : 10,000P + α]

특히 김석용을 해외로 보낼 경우 받을 수 있는 보상이.

‘포인트를 조금 더 주는 정도는 당연히 아니겠지.’

마침 연차도 바뀌었겠다, ‘시스템 업그레이드 키트’ 비슷한 게 나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기본 보상이 큰 퀘스트의 경우 보상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10,000P보다 α 부분이 더 클 수도 있다는 뜻.

보상뿐 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었다.

시현의 관점에서는 회귀 전부터 장장 7년 동안 썸만 타고 있는 두 사람이라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계기를 만들어야 했다.

원래 곁에 있을 때는 몰랐다가 막상 떠나고 난 뒤에야 알게 되는 감정이란 게 있지 않겠는가.

회귀 전 김석용이 그랬던 것처럼.

* * *

딩동!

[system : 응급실 환자의 검사 결과가 업로드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차트’ 덕분에 Brain CT 판독 결과는 누구보다 먼저 확인할 수 있었다.

김석용의 담당의인 응급의학과 엄주영보다 더 빠를 터였다.

[No Abnormal findings]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뇌출혈, 뇌경색, 뇌종양이나 염증을 시사하는 소견은 전혀 관찰되지 않았다.

‘일단 이상 소견은 없고…….’

나희선에게 결과를 알려주고 걱정할 것 없다며 돌려보낼까도 생각했지만,

그녀가 왔다 갔다는 것을 말로 듣는 것과 깨어나서 직접 두 눈으로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을 터였다.

‘조금 더 지켜볼까.’

그러나 그렇게 30분 1시간이 지나도록 김석용은 깨어날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루할 법도 한데 나희선은 물끄러미 앉아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판독 ‘방금’ 나왔습니다.”

Brain CT 판독이 늦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때까지 기다리고 나서야 시현은 결과지를 출력하여 나희선에게 건넸다.

“다행히 정상이네요.”

결과를 확인한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쉬고 계셨을 텐데…… 괜히 연락드린 거 아닌가 싶어요. 놀라셨죠?”

“아뇨. 당연히 와봐야죠. 석용 쌤이 아프다는데…….”

그 대답에 시현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당연히’ 와봐야 한다고 하는 것부터가 그저 친구 이상의 호감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흠흠. 친한 사이긴 하지만 진지한 관계는 아니니까 혹시라도 오해는 하지 말아요.”

아까부터 시현의 표정을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나희선이 해명의 말을 덧붙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이 아니신 거.”

시현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고,

이내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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