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Chapter 39. 치프 (7)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이 아니신 거.”
시현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고,
이내 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두 분 성격이 참 비슷해.’
이걸 소극적이라고 해야 할지 우유부단하다고 해야 할지…….
그도 아니면 관계가 나빠졌을 때의 어색함에 대한 불안 때문인지.
한쪽이라도 적극적이면 어떤 식이든 결론이 났을 텐데, 비슷한 사람끼리 만났으니 이런 관계가 몇 년째 이어지고 있겠거니 생각할 따름이었다.
“마침 전화기를 제가 가지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 교수님 추천, 연수, 전공의 시험 이런 단어들이 보여서 혹시 중요한 이야기인가 해서요. 선생님이 바로 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말씀드리려고 연락했습니다.”
“잘하셨어요. 괜히 모르고 걱정하는 것보다 그래도 와서 보니 마음이 좀 놓이네요. Brain CT도 정상이고 바이탈도 안정적인데 왜 아직도……. 추가 검사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나희선은 민망한지 얼른 김석용의 상태로 화제를 돌렸다.
의식 수준이 변했다는 건 종종 뇌 병변을 의미하는 터라, CT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다른 이유로 김석용이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지금까지 특별한 원인은 없고 해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특별한 원인이 없으면… 중추신경계 감염도 배제한 건가요?”
“네. 아까 잠깐 안구 운동의 이상과 근육 강직을 보이긴 했지만, 발열도 없고 해서요.”
“모든 걸 배제하면 남은 건 ‘물질’인데…….”
나희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가능한 질병을 대부분 배제하면 남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역시…….’
그녀 또한 의사였다.
그것도 전공의 시험에서 1, 2등을 다툴 정도로 매우 공부를 잘하는 의사.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가능한 원인을 하나하나 헤아렸던 터라 그녀 또한 시현과 비슷한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오늘 술 많이 마셨나요? 웬만큼 마셔서는 취하지도 않는 사람인데.”
나희선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뇨. 선배들이 주시는 거 몇 잔 더 드시긴 했지만…… 그렇게 많이 드신 건 아니에요.”
“기저 질환도 없을 텐데. 병원에 있을 때 이것저것 해본다고 검사한 게 몇 달 전인데 아무 이상 없었거든요? 이상하다…….”
“네. 별다른 과거력이 없더라고요. 저도 의무기록에서 확인했습니다.”
“최근에 특별히 먹는 약도 없고요?”
“네. 오늘 두통이 있어서 뭐더라……. ‘타이레놀’ 드셨다고 하네요. 앗, 설마! 그게 문제였을까요?”
시현의 반응에 나희선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아마 타이레놀 두 알에 위장약도 같이 먹었을 거예요. 가끔 스트레스받으면 편두통이 있거든요.”
“아, 그렇군요…….”
김석용을 몇 년간 봤음에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알코올과 같이 섭취한 셈이니 간독성이 있을 수 있긴 하지만……. 그 정도 용량으론 이렇게 의식을 잃을 정도는 아닐 거예요. 당장 간수치도 정상일 테고요.”
“김석용 선생님에 대해 정말 많이 알고 계시네요.”
“꼭 그런 건 아닌데…….”
뜻밖의 말에 나희선은 얼굴을 붉혔다.
“……석용 쌤 ‘의국’에서는 어떤가요?”
그러더니 돌연 시현에게 물었다. 몹시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의국원들 많이 생각해주시는 편이고요. 책임감이 굉장히 강하시죠. 제가 아는 한 우리 병원에서 가장 ‘성실’한 레지던트 중 한 명일 겁니다.”
“맞아요. 그렇죠…….”
아마도 시현이 말한 것 정도는 이미 다 알고 있었을 것.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희선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저야 늘 후배 입장에서 보는 모습뿐이라. ‘선생님께는’ 어떤 분일지가 궁금하네요.”
이번에는 시현이 질문을 던졌다.
의국 밖에서의 모습이 궁금하다는 투였지만,
정작 알고 싶은 것은 그녀가 김석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두 사람이 어떻게 될지였다.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바뀌긴 했지…….’
회귀 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가장 많이 바뀐 것은 환자들의 경과.
가장 효율적인 치료를 선택해 가장 좋은 성적을 냈고, 그중 일부는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의국원들의 모습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크게 호전된 환자 덕분에 레지던트들 또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연구에도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열정을 활활 불태우는 이광섭 과장과 다소 과하게 각이 잡힌 후배들의 모습까지…….
아니, 그 부분은 좀 빼고.
뭐, 열심히 하다 보니 사소한 부작용 몇 가지 정도는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고, 전반적인 의국 분위기가 좋아지고 레지던트 개개인도 눈에 띄는 성과를 낸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김석용에게도 마찬가지로 그가 의국 생활 내내 가장 후회했던 일 정도는 겪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저한테 어떤 사람이냐면…….”
시현의 질문에 나희선이 뭔가 대답하려고 하는데,
“으으…….”
김석용이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신음을 뱉었다.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채로 마른침을 삼키는 모습이 뭔가 괴로워 보였다.
“아, 지금 보니까 입술이 많이 건조한 것 같은데 혹시 거즈하고 물 좀 주시겠어요? 남의 병원이라……. 제가 가기가 좀 그래서요.”
“네, 잠시만요. 바로 가져다드릴게요.”
시현은 스테이션에 가다 말고 잠시 뒤를 돌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문득 궁금해졌다.
오랜 시간 서로 호감도 있고, 가깝게 지내기도 했는데 결국 그들이 이어지지 못한 이유가 뭐였을지.
‘그저 성격이 문제였을까?’
지금껏 그저 우유부단한 두 사람의 성격만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이건 마치…….’
환자를 면담할 때 핵심 병리가 파악되지 않는 느낌이랄까?
종이컵에 물을 따르고 거즈를 챙겨 돌아가는 길에도 뭔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지금 보니 훨씬 낫네요. 아까는 너무 아픈 사람 같았는데.”
젖은 거즈로 입술을 축여주는 것만으로도 뭔가 나아진 것 같았다.
“네. 물을 좀 드시면 더 좋을 것 같기는 한데 잘못하면 아스피레이션(흡인) 될까 무섭고…….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 이것까지만 하고요.”
‘잠깐만.’
다음 순간, 나희선에게 적신 거즈를 건네던 시현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내가 왜 이 사람들을……?’
뭐 마지막이 좀 흐지부지돼서 문제였지 일단 ‘썸’이라도 타고 있는 단계고.
아프면 이렇게 찾아와서 걱정도 해주고 간호도 해주고.
해외 연수 같이 가면 좋겠다고 문자도 주고받는데.
‘오히려 이 사람들이 나를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봐도 지금껏 연애 비슷한 것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 아닌가?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혼란스러운 시현이었다.
* * *
“여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내 무표정한 얼굴로 누워있던 김석용이 슬며시 눈을 떴고,
이내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석용 쌤, 괜찮아요?”
“선생님,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세요?”
그 모습에 시현과 나희선이 동시에 물었다.
“제가… 왜 여기에? 희선 쌤이 여긴 무슨 일로?”
김석용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나희선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나희선‘만’ 바라보았다.
“……걱정되니까 왔죠.”
“입퇴국식 중에 의식이 떨어지고 빈맥이 있어서 급히 응급실로 왔습니다. 진호랑 둘이 부축해서 오느라 힘들었다고요!”
“괜히 걱정하게 해드렸네요. 시간도 늦었는데…….”
김석용은 미안한 듯 말끝을 흐렸으나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어차피 걱정돼서 제대로 잠 못 잤을 거예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내일 치프 회진은 저희끼리 일단 진행할게요. 과장님께는 제가 보고드리고요. 걱정하지 마세요!”
“네, 몸이 좀 무겁긴 한데. 일어날 수는 있을 것 같네요…….”
여전히 힘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불과 몇 시간 전에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실려 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회복한 모습이었다.
‘뭔가… 뭔가 이상해.’
정신이 돌아온 것까지는 좋은데…….
왠지 모르게 대화가 원활하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의식이 온전치는 않은 것 같고.
묘하게 불쾌한 기분이 드는 시현이었다.
잠시 후.
“의식만 회복하면 퇴실해도 될 것 같다.”
스테이션에서 모든 검사 결과를 확인한 엄주영이 퇴실 처방을 냈다.
“네, 감사합니다. 치프 선생님 모시고 갈게요.”
약물 반응에 대한 검사는 아직이었지만, 일단 아무런 이상은 없었다.
사실 검사 결과와 무관하게 퇴실해도 될 컨디션이긴 했다.
첫째로 일단 김석용의 의식이 점점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고…….
“아무튼…… 정말 좋은 조건이라고요!”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이번 기회 놓치면 안 돼요. 열심히 해서 꼭 추천장 받자고요.”
“그럼…… 우리 이제 경쟁해야 하는 사이가 된 건가요?”
“그럴 리가요! 둘이서 1, 2등 하면 되죠! 물론 1등은 내가! 호호호.”
“뭐, 그 정도는 제가 양보할 수 있죠. 하하하.”
“…….”
둘째로 아까부터 어딘지 모르게 상복부 불편감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먹은 음식이 잘못됐나?’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삼아 호텔의 주방에서 조리한 음식이라 과연 그럴까 싶었지만,
그것 말고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었다.
“저, 선생님. 이만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 벌써 시간이…….”
시간이 늦기는 했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서울은 세계에서 밤거리가 가장 안전한 도시 중 하나였고, 차도 가져온 터라 아파트 주차장에서 내리니 걱정할 것 없다고 했지만,
늦어질수록 주차 공간 확보가 어려울 테니 한시라도 빨리 집에 보내는 게 좋을 듯했다.
절대로 아까부터 점점 더 심해지는 상복부 불편감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때 김상진 교수님이 뭐라고 했냐면…….”
“정말요? 그래서 그때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았구나!”
“근데 우리 연수 가면 일 끝나고 시간은 많이 있겠죠? 오히려 거기가 더 편한 거 아니에요? 하하하.”
“오, 그건 그럴지도? 이거 병원 주변 맛집 리스트부터 준비해야 할 거 같은데요? 호호호.”
“…….”
어느덧 두 사람은 어떻게 하면 미국행 항공권을 싸게 구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1, 2등 그거 쉬운 거 아닌데.
김칫국 마시는 것도 정도껏 하라는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퀘스트 그냥 접을까?’
성공 조건을 충족해도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실패 시 패널티가 무려 ‘???’ 였지만, 그래 봐야 별 게 있겠나 싶었다.
“으윽.”
갑작스러운 신음이 애초에 환자가 아니었던 이에게서 나왔다.
“시현 쌤, 괜찮아요? 갑자기 왜…… 어디 불편한 거예요?”
나희선이 깜짝 놀라며 시현에게 물었다.
“아까부터 Epigastric discomfort(상복부 불편감)이 있었는데 지금은 Pain(통증) 양상이네요.”
“어디 보자……. 새벽 공복 시간에 악화되는 통증이면 Duodenal ulcer(십이지장궤양)일 수도 있겠네요.”
“네, 선생님. 그러니까 어서 집에…….”
“아, 선생님도 입퇴국식 하다가 와서 피곤할 텐데……. 마침 차에 위장약 있으니까 금방 가져올게요.”
“괜찮습니다. 번거로우실 텐데 다시 오지 마시고 그냥…….”
“번거롭긴요! 지난번에 새로 나온 위산 억제제라고 ‘석용 쌤이 챙겨준’ 건데 효과도 빠르고 아주 잘 듣더라고요. 잠시만요!”
나희선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곧바로 주차장을 향했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멀어져갈 때쯤 시현이 물었다.
“선생님, 오늘은 어디서 주무실 건가요?”
“…….”
“의국으로 가실래요? 아니면 숙소에서?”
“…….”
“저, 선생님?”
“…….”
대답은 없었다.
나희선이 나가자마자 김석용은 쓰러지듯 다시 베드에 몸을 눕혔고, 그 짧은 틈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뭐지…….’
이거 원 가까스로 의식을 붙들고 있다가 이제 막 놓은 사람 같지 않은가.
오늘 밤은 응급실에서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여기 약……. 어? 석용 쌤 왜 이래요?”
그 모습에 다시 돌아온 나희선도 놀랄 지경이었다.
“다시 의식이 흐려진 것 같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