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Chapter 39. 치프 (8)
“여기 약……. 어? 석용 쌤 왜 이래요?”
방금까지도 깨어있었는데, 다시 잠든 모습에 나희선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다시 의식이 흐려진 것 같습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네요.”
잠깐 의식이 돌아왔을 때도 시현의 말에는 반응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더더욱 대답하기 힘들 터였다.
“그래요……. 이만 가봐야겠네요. 자, 여기.”
“감사합니다.”
뭔가 병 주고 약 주는 상황 같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였다.
나희선은 시현에게 약을 건넨 뒤 발걸음을 돌렸다.
시선만은 깊은 잠에 빠진 김석용을 바라보면서.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 정도라면…… 진즉 이어졌어야 하는 것 아닌가?
김석용에게 마음이 있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나희선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았다.
“참, 아까 김석용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물었죠? 저한테.”
그런 시현의 궁금증에 답하듯 나희선이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이쪽을 보며 말했다.
“네? 아, 네…….”
의국에서 어떤 사람인지를 이야기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질문이었다.
후배 입장에서 본 그가 어떤 선배인지를 대답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반면 시현의 질문은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친구로서? 같은 전공을 택한 동기로서? 그도 아니라면 이성으로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너무도 사적인 질문이 될 수도 있었다.
“좀 애매한 질문이긴 하네요. 그럼 굳이…….”
“아뇨.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뜻밖에도 나희선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동료로서도 그렇고……. 이성으로서도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반응들이 그녀에게서 나왔다.
당사자가 들었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소식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김석용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성격도 시원시원해요. 우유부단하지도 않고… 가만 보면 과감한 면도 있어요!”
시원? 과감?
김석용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표현들이었다.
“데이트… 아니, 같이 밥 먹을 때도 원하는 게 분명해서 오히려 편하달까? 아무튼… 좋아요. 쌤이 말했던 것처럼 더할 나위 없이 성실한 사람이고, 연구한 거 발표할 때 보면 전보다 자신감도 있어 보이고…….”
‘오, 그런 면이 있었다니.’
지금껏 본 그의 모습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교수님이나 선배들을 대할 때 늘 깍듯하고 중요한 결정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만을 봐왔던 터라 그에 대해 지레짐작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사실 병원에서의 일과를 마친 후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가 프라모델에 관심이 많았고 자동차 모형으로 굵직한 대회에서 여러 번 입상했다는 것도 회귀 전 전문의 시험 직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두 분 참 잘 어울려요. 기회가 돼서 이번 연수… 꼭 같이 가시면 좋을 것 같네요.”
나희선이 챙겨준 약 덕분이었을까.
이번에는 배가 아프지 않았다.
“1, 2등을 하는 게 쉬운 건 아니지만, 두 분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워낙 평소에 공부도 많이 하시고…….”
“맞아요. 그리 어렵지 않을 거예요. 선생님이 아까 말한 것처럼 ‘성실’한 사람이니까.”
짧은 순간 그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그런데 그 성실한 모습이……. 왠지 내 몫이 아닌 것 같아서 마음이 좀 그러네요.”
“몫이 아니라는 게……?”
평소 그의 성격대로라면 여자친구에게도 성실할 텐데.
그럼 좋은 거 아닌가?
시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나희선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삼아대에 그런 레지던트 없다면서요. 환자 열심히 보고 새로운 연구 계속 담당하고 교수님들한테 깍듯하기까지 하면……. 어휴. 전 욕심이 많아서 뭐든 독차지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첫 번째로 중요한 사람이 될 것 같지 않네요.”
직장에서는 너무도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지만,
집에서는 일중독에 다른 가족들에게 무관심한…… 그런 가부장적인 사람일 수 있는 것 아닌가.
애초에 겉과 속이 다르다거나,
안과 밖이 다른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이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다면체이기 때문이었다.
시현은 불현듯 순환기내과 과장 이종관 교수를 떠올렸다.
최고의 의사였고 연구자였지만, 정작 가족에게는 원망만을 듣고 있었던 인물.
김석용이라고 해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첫 번째로 중요한 사람이 될 자신이 없다…….’
지금껏 우유부단한 성격의 문제로 오해하고 있었다.
좁은 의사 사회에서 사귀다 헤어졌을 때를 걱정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설명한다…….’
시현은 회귀 전 4년차 때 김석용과 술을 마시며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자기 일에 열정적이고 연구하고 논문 쓰는 사람이 좋다고 해서……. 내가 정말 노력 많이 했는데…….
- 그럼 뭐하냐? 이렇게 가버릴 것을……. 이럴 줄 알았으면 레지던트 생활 적당히 적당히 해도 되는 거였는데.
- 최지훈 선생님이 주는 일 적당히 거절했어야 하는데……. 억울하다.
나희선이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들었던 얘기였다.
원래도 부지런했던 그가 더 부지런하게 된 이면에 이런 사정이 있는 줄을 그때 처음 알았다.
잠시 고민한 끝에 시현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어쩌면 성실한 태도가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었을 지도 모르니까요.”
“그럴 리가.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요? 이 사람에게 뭐가 가장 중요한지……. 그건 딱 보면 아는 거라고요. 선생님이 경험이 없어서 모를 수도 있는…….”
“…….”
울컥.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고…….
내가 다 알아보고 왔는데.
하지만 당사자가 저렇게 느꼈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설득은 불가능했다.
* * *
“이만… 가볼게요. 잘 부탁해요.”
“네. 선생님 깨어나시면 퇴실하고 의국에서 좀 더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희선은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시현의 권유대로 응급실을 떠났다.
그녀가 떠난 지 한참이 되어서야 시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환자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응급실이 이제는 좀 조용해졌다.
좌우에서 쉴 새 없이 울려대던 모니터 기기의 경고음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응급실에 어울리지 않는 정적이 흘렀다.
그제야 밤 동안 잊고 있었던 피로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20시간 이상을 깨어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회복 포션 그리고 숙면 포션도.’
[SORA : ‘회복 포션’과 ‘숙면 포션’을 사용합니다.]
지금껏 레지던트 생활을 지탱해준 포션 조합.
친절도 열정도 창의성도……. 결국은 체력과 질 좋은 수면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보호자용 간이 의자에 앉아 침상 뒷벽에 등을 기대자 스르륵 눈이 감겼다.
편안한 침대에 누워 쉬는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유독 길었던 하루의 피로가 조금씩 가시고 있었다.
* * *
삐이- 삐이- 삐이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뭐지? 혹시 바이탈이…….’
갑작스러운 경고음에 시현은 놀란 가슴으로 눈을 떴다.
“깼냐?”
어느덧 일어나 침상에 걸터앉은 김석용이 시현을 보며 말했다.
혈압 모니터링을 위해 감았던 커프와 수액 라인을 모두 정리한 상태였다.
“선생님, 몸은 좀 어떠세요?”
“아이고 아직도 머리가 띵하네.”
김석용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밤 동안 고생했다. 술도 별로 안 마신 것 같은데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이게 무슨 망신인지.”
“사실은 그게 술 때문이 아니고 사실은…….”
“시현아.”
뭔가 말하려 하는데 김석용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우선은 술 때문인 걸로 하자.”
술 때문이 아닌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저렇게 이야기하는 건 분명 따로 생각하는 바가 있다는 뜻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고생했다. 해장이나 하러 갈까?”
어제 먹은 약기운이 아직 남아있을 텐데, 그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어느덧 동이 트고 있었고, 시현은 그를 따라 응급실을 나섰다.
* * *
병원 앞 국밥집.
“그래서, 신규희 간호사가…… 그랬다는 거야?”
국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는 김석용이 물었다.
“네. 이선지 간호사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으음. 그게 퀘티아핀 400이었단 말이지. 급성 조증 환자들 Starting dose(시작용량) 2배를 먹었으니……. 검체 채취는 해뒀다고 했지?”
“네. 일단 졸피뎀과 퀘티아핀 모두 양성으로 나왔습니다. 검사실에 이야기해서 결과 입력은 일단 미뤄뒀습니다.”
일단 검사 결과가 입력되고 나면 조회는 어렵지 않았다.
사실에 더해 별의 별 안 좋은 소문이 보태져도 막을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애썼다. 조치를 취하긴 해야 할 텐데.”
“퀘티아핀도 문제지만, 졸피뎀에 대한 부분만큼은 확실히 해둬야 하지 않을까요?”
“……일단은 퀘티아핀에 대한 부분만 간호부와 상의하자. 검사 결과도 퀘티아핀에 대한 부분만 입력하고 졸피뎀은 보류하는 것으로 하고.”
잠시 고민한 끝에 김석용이 입을 열었다.
“그것만으로는 단순 ‘실수’였다고 둘러댈 겁니다. 징계 내리기도 쉽지 않을 거고요. ”
“이런 일이 있었으니 당분간은 조심할 테지. 지켜보자.”
“안 됩니다. 이번 건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시현은 회귀 전후를 통틀어 처음으로 그에게 반대 의견을 냈다.
신규희가 이브닝 근무를 맡을 때마다 환자들이 못 잤던 것을 생각하면, 결코 실수로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동안 빼돌린 졸피뎀을 어떻게 썼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졸피뎀 두 알 가지고는 제대로 된 징계 내리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야.”
김석용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결과 입력만 안 했다 뿐이지 이번에 검사한 결과는 남아 있잖아? 앞으로 한 번…… 딱 한 번만 이런 일이 다시 생기면 이번 건까지 엮어서 정식으로 간호부에 징계 요청할 거야.”
“알겠습니다.”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잠시 지켜볼 뿐.
그 역시 이대로 덮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해해줘서 고맙다. 그리고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부탁이요?”
“아직 확정된 건 없지만, 혹시 치프… 맡아서 해 볼 생각 없니?”
아쉬운 면이 없지 않았으나 일단은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찰나, 김석용이 뜻밖의 말을 건넸다.
“치프라면…….”
4년차가 되면 한 명은 치프를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협진과 대외 업무를 담당한다.
의국장으로도 불리는데, 레지던트 중 가장 선임으로 교수님들과 소통하기도 하고, 담당 환자를 배정하기도 하며 토요일 오전에는 회진을 돌기도 한다.
“내년에 할 일인데……. 벌써 정하시게요?”
언젠가는 하게 될 일이긴 했지만, 이제 막 치프를 맡은 사람이 벌써부터 후임 치프를 운운하는 건 적절하지 않았다.
“어쩌면 올해 할 수도 있어. 해외 연수 지원해볼 생각인데……. 운 좋게 붙으면 ‘3년차’가 치프를 맡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해서.”
3년차 치프라니.
듣도 보도 못한 제안에 시현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딩동!
[system : 새로운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