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그날의 일은, 날벼락이라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다.
모든 것이 선명히 기억날 정도로 충격적인 경험이었고, 혼란과 당혹에 엉킨 감정은 엉망진창이었다.
***
처음 눈을 뜬 날, 그녀는 청록색 벽지를 바른 고풍스러운 방을 보았다.
벽면 곳곳을 장식한 섬세한 조형물, 푹신하게 밟히는 두꺼운 러그, 나무로 된 바닥, 정교하게 조각된 앤티크 테이블과 벽장 등.
르네상스 시대를 떠올리게 만드는 고전적인 화려함이 가득한 방.
‘뭐 하는 곳이야? 모델 하우스……? 세트장?’
이상함을 포착한 두 눈이 속도를 붙여 빠르게 굴러갔다.
“세트장이면 카메라가 있을 텐데…….”
없다.
“그럼 TV는……?”
없다.
기이한 장소. 무거워 보이는 원목 가구가 즐비한 가운데, 보통의 집이라면 있어야 할 것들이 없었다.
‘버린 집이 이렇게 깨끗할 리도 없고……. 돈도 많이 쓴 거 같은데, 왜 아무것도 없지?’
익숙한 물건의 부재가 현실을 깨우쳤다.
“여긴…… 대체 어디야? 내가 언제 이런 데를…….”
그녀는 자신에게 무언가 황당한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거센 의문이 일어나자 그녀의 뇌리는 해답을 찾아 분주해졌다.
‘우선, 마지막 기억이 뭔지부터 생각해 보자. 내가 어딜 갔었는지, 마지막에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쓰자 뇌가 두통을 동반하며 단편적인 장면들을 내보였다.
햇살에 드러난 도로. 까마득한 빌딩 외벽에 비치는 도시의 모습. 누군가와 정답게 말을 나누는 짧은 순간.
몇 초짜리의 짧은 상황들.
“……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이어서 떠오르는 누군가의 손.
“……아! ……아! …가! ……! 얼른!”
강력한 환청이 뇌를 쑤시고 환각까지 만들어냈다.
마디가 거친 손가락이 그녀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기억 속의 손을 향해 그녀가 제 손을 내밀었다.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잡아야만 하는 소중한 존재였다.
‘사라지기 전에 빨리!’
그녀는 허공에다 팔을 흔들며 실체도 없는 것을 쥐려다 휘청거렸다.
터억!
앞에 있는 테이블을 잡으며 간신히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머리가 웅웅 울렸다.
너무 소중한 것이 눈앞에 있었는데, 그랬는데, 잡지 못했다. 쥐지 못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우습게도 그 순간부터 기억은 더 잘게 쪼개졌다.
햇살과 도로. 광이 나는 빌딩의 유리창. 누군가의 목소리.
누군가의 필사적인 목소리.
“……소중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중요해서 빨리 잡아야만 하는데. 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누군지를 몰랐다.
기억이 조각조각 부유했다.
떠올리려 할수록 머릿속이 지워졌다.
“내가…… 왜 이러지?”
심장이 빠르게 뛰고 식은땀이 흘렀다.
‘갑자기 특정 상황을 떠올리려고 하니까 어려운 거야. 그래. 그런 거야.’
공포심은 재빠른 합리화를 불러왔다. 그녀는 좀 더 보편적인 기억을 생각해내려 했다.
이를테면…
“초등학교!”
그녀는 자신이 다닌 초등학교에 관한 어떤 것이라도 떠올려 보려 애썼다. 그러나 우습게도 떠오르는 건 추억이 아니었다.
높임, 문단, 도형, 분수, 소수, 공공기관, 세계의 문화.
그녀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더 간단한 것부터 생각해 보자.’
집, 가족, 친구…….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이름은?”
그것조차 알지 못했다.
반면 사칙연산이나 다양한 영어 지문, 상당한 수준의 국어 문법은 상세하게 떠올랐다. 심지어 민주주의나 신자유주의, 산업혁명, 세계대전 등 역사 지식도 선명하게 기억해 냈다.
하물며 TV나 에어컨을 비롯한 다양한 전자기기도 잘 떠올랐다. 그것들의 사용법까지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 주제에, 스스로에 관한 건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았다. 고작 이름조차도.
기억의 부재는 숨 막히는 두려움을 몰고 왔다.
도망칠 곳도 없는데 공포에 젖은 두 발이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발뒤꿈치가 가구에 턱 부딪쳐 움츠러든 순간,
우우우웅- 우우우웅-
익숙한 진동 소리에 그녀는 불쑥 고개를 돌렸다. 뜀박질하는 것처럼 뛰는 가슴에 기대와 희망이 서려 고개가 낯익은 소음을 따라갔다.
그렇게 마주한 것은, 방금 부딪친 테이블 위에 올려진…….
“휴대폰.”
굳었던 손이 자연스럽게 뻗어져 하얀 기기를 쥐었다. 그녀는 마치 제 물건을 다루듯 익숙한 동작으로 휴대폰 화면을 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떠오르는 흰색 배경의 시스템 창. 검은 글씨로 표시된 문장.
『안녕하세요, 플레이어님.
당신만을 위해 구축된 특별한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한 화면을 담은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플레이어?”
게임이라도 하자는 건가.
황당했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액정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두드렸다.
『당신을 위해 준비한 세계! 당신만을 위한 이벤트!
이곳에서 공략 대상들의 호감도를 올려 스토리를 진행하고 특별 엔딩을 맞으세요.
3년 안에 특별 엔딩을 보면 성공!
그 즉시 기억이 복구되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화면이 바뀌고 나타난 내용은 어디를 봐도 게임의 시작 문구와 유사했다.
공략 대상, 호감도, 엔딩과 같은 단어들이 나열되는…… 영락없는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그녀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애써 진정시키며 한 문장에 지그시 시선을 두었다.
‘3년 안에 특별 엔딩…….’
그래야 기억과 세계를 비롯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시스템 창은 그렇게 알리고 있었다.
난데없이 당혹스러운 미션이었다.
그녀는 이런 종류의 게임을 들어는 봤어도 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 난감했다.
“……장난하는 거지?”
이성적인 사고는 갑작스레 주어진 게임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일단 전화부터 해 보자. 112에…… 내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면 구급차든 경찰차든 보내 줄 거야.’
떨리는 손가락이 화면을 누르며 통화 버튼을 찾아 헤맸다. 그러나 텅 빈 것이나 다름없는 휴대폰은 오로지 한 가지 내용만 내보였다.
공략 대상, 호감도, 특별 엔딩, 3년, 게임을 알리는 문구, 시스템 창.
몇 번을 찾고 눌러도 다른 화면 자체가 뜨질 않았다.
그 대신 휴대폰은 다른 문구를 띄워 보였다.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탈출이 불가합니다. 조건을 충족해 주세요.
*조건 - 특별 엔딩(미달성)』
절박함에 이루어진 연속적인 연타의 끝은 좌절이었다.
“말도 안 돼…….”
겁에 질린 손 떨림이 격해졌다. 진동하는 손가락이 휴대폰을 붙잡지 못해 떨구었다. 그녀는 희게 질린 손으로 머리를 싸맸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해……. 내가 왜? 왜, 이런 상황에……. 왜!”
그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소리를 질렀다. 두려움에 질린 자신의 목소리가 빈방에 메아리쳤다.
“왜…….”
아무리 물어도 대답은 없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유일한 대답은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뿐이었다. 그것밖에는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휴대폰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그녀는 반쯤 체념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지금 이 상황도, 말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이 게임도…… 이상할 게 없게 되는 거잖아…….”
절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화면을 바라보는 안색이 차분하게 침잠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거, 같아.’
휴대폰을 꾹 쥐고 고개를 떨궜다.
옷감이 해진, 잠옷 같은 하얀 원피스가 뒤늦게 시야를 침범했다.
제 몸에 걸쳐진 극도로 이질적인 의상이 공포로 다가왔다.
“이게 현실이라니…….”
아직 이 세계의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데, 방 밖으로 나가 보지도 않았는데, 머릿속에서는 이미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멋대로 단정 짓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서늘한 직감이었다.
그녀는 액정 속의 시스템 창만 뚫어지게 보다가 마른침을 삼켰다.
‘만약 이 문구대로 한다고 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우선 공략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공략 대상의 호감도를 올리는 방법도 알아야 하며, 특별 엔딩의 조건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했다. 그 외에도 기본적으로 이 세계에 대한 상식이 필수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너무도 무지했다. 이 영문 모를 휴대폰에 의지하는 것 외엔 도리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아직…… 아직 정보가 더 필요해.’
그녀는 곧게 펴진 검지로 이끌리듯 시스템 창을 눌렀다.
그에 응답하듯 원하는 내용을 담은 새로운 창이 떠올랐다.
『진행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다운하시겠습니까?』
『네』
‘아니요’는 아예 선택도 할 수 없었다.
정해진 하나의 길을 쭉 달려 나가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전부라는 듯.
방도가 없는 그녀는 순응하며 화면을 눌렀다.
『스토리 진행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다운로드합니다≫≫≫』
새로운 문구가 뜨는 순간이었다. 전류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침투했다. 휴대폰을 부여잡은 그녀의 손가락들이 파르르 떨렸다.
“……아!”
놀란 외마디 비명이 다물렸던 입술을 벌리며 튀어 나갔다.
본의 아닌 떨림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주워 들었던 기기가 다시 바닥으로 툭 추락하고 말았다.
‘이러다 어떻게 되는 걸까?’
저린 감각은 그녀가 반항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뼈대를 타고 몸의 곳곳으로 흘러들었다. 마치 감전된 것같이.
‘설마, 죽지는 않겠지…….’
한편으론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될 대로 되라는 듯 몸을 맡겼다.
속수무책으로 신체가 잠식됐다.
종국에는 시야까지 어두워지다가 기어코 의식마저 끊어졌다.
***
그녀가 다시 눈을 뜬 것은 하루가 꼬박 지나간 다음 날 저녁이었다.
기절했던 곳과 같은 방 안. 침대에서 깨어나자 의사로 보이는 이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나갔다. 짧게 몸조심하라는 당부의 말을 남긴 것 같았으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계속 몽롱한 기분이었다.
“아가씨, 세숫물을 준비했습니다.”
“…….”
“세안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대답도 안 했는데 얼굴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눈 감으시고, 잠시 숨 참으세요.”
하녀는 막무가내로 그녀를 씻겼다. 무작정 비누칠을 하고 문지르다가 물로 헹구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하녀는 나갈 때까지 일방적인 전달만을 하고 떠났다.
하지만 그녀는 하녀의 행동에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새로 떠오른 기억 때문이었다.
냉수마찰로 번뜩 명료해진 머릿속에는 전에 없던 정보들이 가득했다.
자신의 몸이 ‘애리얼 허클리’라는 이름을 지닌 것. 그리고 상당히 부유한 생활의 영위하는 백작가의 외동딸이라는 것.
일명 빙의했다…… 고 말할 만한 상황이었다.
다만 이 세계에서 지금까지 자라 왔던 기억이 고스란히 뇌에 새겨진 덕에, 빙의보다는 오히려 환생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타인의 기억을 보는 듯한 기묘한 거리감만 아니었어도 그녀는 자신이 환생한 것이라 믿었을 것이었다.
그녀가 새로 알게 된 제 몸의 과거는 상당히 단조로웠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적당히 무관심한 부모. 인사 한마디도 잘 꺼내지 않는 극도로 과묵한 성격. 방에만 틀어박혀 친구도 취미도 없이 지내는 적막한 삶.
백지 같은 대인 관계와 텅 빈 일과들이 그녀에게는 으스스하게 다가왔다.
마치 혼이 없는 인형의 몸을 빌린 것 같았다.
꼭 그녀가 이 안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며 만들어 낸 몸인 양…….
『당신을 위해 준비한 세계! 당신만을 위한 이벤트!』
섬뜩한 의문과 함께 껄끄럽게 느껴지던 시스템 창의 문구가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린 것 같은 세계. 그런 암시들. 마치 이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거나 혹은 관찰해 온 것처럼.
‘설마…… 정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아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땀을 닦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느닷없는 초대에 이어 거북하기만 한 환대를 받는 느낌이 달갑지 않았다.
‘지금도 누가 날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그녀가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던 순간, 똑똑똑, 형식적인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아가씨, 저녁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나무 트레이를 든 하녀가 방으로 들어왔다.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서 곧장 테이블에 식사를 차려 놓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하녀는 알아서 어질러진 것을 치우고, 필요한 물품을 채웠다. 평소 과묵한 아가씨의 성격을 알기에 구태여 대답을 바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얼마 걸리지 않아 세팅을 마친 하녀가 나갈 채비를 했다.
클로시는 아직 접시 위에 고이 덮인 상태였다. 제때 식사를 하지 않는 제 주인의 성향을 따라 요리가 식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스튜는 감자를 갈아서 드시기 편하게 만들었어요. 의사의 소견으로는 이상이 없으시다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소화에 용이한 음식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대본을 외는 듯한 말투였으나 약간의 걱정이 묻어났다. 명목상의 고용인이라지만 홀로 틀어박힌 아가씨에 대한 작은 연민. 고작 그것뿐이었지만, 막막한 상황에 다가온 작은 호의가 그녀에게는 무척 따스하게 느껴졌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그 말을 들은 순간 하녀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얼굴을 굳혔다.
“아가씨?”
“아……. 그냥 한번…….”
무의식적으로 나간 대답이 어색하다는 것을 인지한 그녀가 뒤늦게 입을 가렸다.
말 한마디 없는 극단적인 회피가 애리얼 허클리에게는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대충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거나 해야 하는데…….’
그래야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말을 삼키다가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죽은 듯이 지내던 애리얼의 과거를 꼭 따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은 애리얼 허클리의 몸에 들어와 있지만, 그녀 자신은 결국 이전까지의 애리얼 허클리가 아닌데.
아무리 그녀가 적극적인 성격은 아니라고 해도, 이전의 애리얼처럼 살다간 답답해서 미칠지도 몰랐다. 이 몸에 업로드된 애리얼의 과거의 행적은 그 정도로 정적이었다. 방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고, 의사 표현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거나 둘 중 하나로만 했으니.
‘근데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의심을 살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예전의 방식을 고수하기보단 조금이라도 바뀌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녀는 원래의 기억을 찾아 이 세계에서 떠나는 것이 목적이고, 그러려면,
『이곳에서 공략 대상들의 호감도를 올려 스토리를 진행하고 특별 엔딩을 맞으세요.
3년 안에 특별 엔딩을 보면 성공!』
‘기한은 3년.’
그녀는 초조해졌다.
3년이라는 기한은 언뜻 보면 길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초면인 누군가와 만나 관계를 진전시켜야 하는 입장에선 짧게도 다가오는 기간이었다.
그 3년 안에 공략 대상을 만나 관계를 쌓고 특별 엔딩이라는 빌어먹을 걸 만들어 내야 했다.
과거의 애리얼 허클리처럼 지내서야 도무지 달성할 수 없는 목표였다.
말 한마디 못 하는 존재여서야 백작이 그녀를 다른 이들 앞에 내놓지 않을 게 자명했다. 간단한 대화도 불가능한 벙어리를 어떻게 밖에 내놓는단 말인가. 가문의 명예를 실추할 게 뻔한데.
이런 장식장 안의 인형 같은 삶을 바꾸려면 최소한 그녀가 대답이라도 잘해야 했다. 그래야 백작이 그녀에게 타인과 대화할 기회라도 줄 것이다.
‘그게 안 되면 공략 대상도 만날 수 없어.’
애리얼은 바뀌어야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바뀔 필요는 없었다. 당장은 의사소통이 원활할 정도만 되어도 괜찮았다.
돌아가기 위해서. 잊어버린 원래의 자신을 되찾기 위해서.
그녀, 애리얼은 여전히 놀라 굳은 하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말을 못 하니까 도움도 못 불러서…….”
그렇게 말하니 하녀는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 없는 아가씨가 기절한 걸 발견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여태 아프지 않아서 망정이지, 오늘같이 기절하는 일이 또 생기면 그때는 생존을 장담하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죽음의 가능성은 사람을 바꾸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앞으로 최소한 말은 하고 살게. 이참에 성격도 좀 바꾸고.”
애리얼이 변화의 의지를 확고히 선언하자 하녀의 낯빛이 꽤 밝아졌다. 모시는 아가씨가 직접 말을 해 준다면 그녀로서도 시중들기가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