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애리얼이 바뀌기를 선언하고서 과거와 다르게 행동한 지 일주일째.
과거와 비교해 그녀의 일과가 격변한 것은 아니었다.
변화는 사소했다. 애리얼은 매일같이 입던 해진 원피스 잠옷을 새 드레스로 갈아입었고, 하루 한두 번 후원을 산책했다. 그걸 제외하면 여전히 방에 머무는 일이 많았다.
확연히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녀의 태도였다.
과묵함을 버린 애리얼은 저택 내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거나 그들과 가벼운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방 안에만 온종일 틀어박혀 있던 예전을 생각하면 천지가 개벽한 수준의 변화였다.
그렇다고 그녀의 성격이 전과 비교해 완전히 다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여전히 표정은 없는 편이었고, 말투도 조용했다. 고작 사용인과 대화를 하게 된 게 변화의 끝이었다. 그런데도 애리얼은 크게 변한 것처럼 보였다. 이전의 애리얼이 너무 무미건조했던 탓이었다.
백작가에서 오래 일한 사용인들은 조금이나마 수다스러워진 아가씨를 무척이나 반겼다. 대화가 단절된 백작가의 냉랭한 가족에게 드디어 화목이 깃들 징조라며 말이다.
백작이 남편과 사별한 뒤 백작저는 늘 장례식장 같은 분위기였다. 그나마 밝던 사람이 사라져서 안 그래도 삭막하던 모녀 사이는 더욱더 멀어졌다. 그래도 이제 아가씨가 변했으니, 이 흐름을 타 백작도 변하기를 그들은 바랐다.
아무렴 얼음 성 같은 분위기보다는 화기애애한 것이 일하기에도 좋으니까.
그러나 애리얼을 둘러싼 상황은 사용인들의 예상처럼 녹록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하나뿐인 외동딸로서 허클리 백작을 독대한 애리얼은 손끝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투명한 찻물에 비친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백작과는 혈연관계인데도 말을 나누기가 가장 어려웠다. 필요 이상의 말은 아끼고 딱 정해진 대화만 나누는 그녀의 화법은 대화할 의욕을 누르고, 애리얼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했다.
애리얼은 자꾸만 말려드는 혀를 억지로 움직여 대화의 물꼬를 틔웠다.
“어머니, 오늘도 평안하십니까?”
“늘 비슷하지. 너는 어떠니.”
“저도 늘 평안해요. 그리고…… 어제는 간단하게 피아노 교습을 받았어요. 악기를 정식으로 배운 건 처음인데, 꽤 즐거웠어요.”
“그래. 한두 곡 정도는 교양으로 익혀 두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필요하면 선생을 붙여 줄까?”
“아, 아뇨! 제가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정식으로 배우기에는 버거울 것 같아요.”
“그래. 더 필요한 건 없니?”
“괜찮아요. 지금도 충분해요.”
“그래, 그렇구나.”
백작은 멍하니 허공을 주시하며 형식적인 대답을 뱉었다.
유명 화가의 풍경화가 몇 점 걸린 하얀 응접실. 기다란 창밖으로 낮게 지나가는 구름이 방 안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푹신한 소파의 촉감이 되레 불편하게 다가오는 시간. 백작이 제 딸에게 건네는 말들은 무관심을 형상화한 것같이 맹숭맹숭하기만 했다.
애리얼이 말이 없을 때부터 이어지던 명목뿐인 가족 간의 대화 시간은 그녀의 성격이 변화되고 나서도 달라지는 것 없이 그대로였다.
이틀에 한 번, 사소한 이야기를 묻고 답하는 일.
말 그대로 ‘일’이었다.
애리얼이 살갑게 잡담을 늘어놓아도 백작은 필요한 말만 기계적으로 내놓았다. 의무적인 대화였다.
누가 이걸 모녀간의 티타임이라 보겠는가.
찻잔에 시선을 고정하던 애리얼이 슬쩍 백작의 눈치를 봤다.
보통 이쯤이면 대화가 끊기고 백작이 먼저 자리를 비웠다.
하지만 오늘 백작은 웬일로 진득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못다 한 말이라도 있는지 멍한 시선으로 창밖만 주시했다.
무슨 일일까.
“어머니, 저…….”
“오늘 황자 저하께서 백작저에 오시기로 하셨다.”
평소와 다른 백작의 모습에 애리얼이 이유를 물으려는 순간, 그녀가 꽤 난감한 이야기를 꺼냈다.
애리얼은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며 평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황자님…… 저하께서요?”
“우리 가문의 영향력이 커지는 중이라 눈여겨보시는 듯하구나. 저녁까지 함께하실 예정이시다.”
“……네.”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 생각하며 애리얼은 유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스럽긴 해도 적당히 인사만 하고 나면 마주칠 일도 없을 것이었다.
애리얼이 스스로 다독거리듯 납득하는 사이에도 백작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너와 같은 나이시다. 아카데미에 가서도 마주치겠지. 미리 눈에 들어 놔서 나쁠 건 없으니 예를 갖춰 맞이하고, 이 김에 인맥도 다지렴.”
백작이 말을 미루던 내용의 실상, 가장 중요한 본제가 폭탄처럼 던져졌다.
이제야 막 사회성을 회복하기 시작한 외동딸에게 황족과의 친분을 다져 보라는 무리한 요구.
침착하던 애리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반면 티타임 내내 먼 곳을 주시하던 백작의 눈빛은 명료해졌다.
“서너 시간 후에 도착하실 테니 지금부터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다. 준비에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렴.”
서너 시간 후. 그러면 오후 두 시쯤 황자가 도착한다.
시간에 방점을 찍으며 마무리된 백작의 말에 찻잔을 응시하던 애리얼의 얼굴이 경직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백작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용건이 끝난 백작은 여느 때처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리얼은 몇 분 정도 더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복잡한 심경으로 응접실을 나갔다.
백작은 황자가 애리얼과 같은 나이라고 했다. 심지어 아카데미에 가면 그와 마주치게 될 것이라 덧붙였다.
‘만약 이게 진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면 이벤트가 일어나기 아주 좋은 상황이야.’
세상과 단절되어 살던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외부인과의 조우였다. 더군다나 그녀는 그 외부인과 친해지도록 부단히 노력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마치…… 어떤 기회처럼 느껴졌다.
친목을 다지고 호감도를 올릴 기회.
‘아마도 정답이겠지.’
애리얼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 만나게 될 황자는 공략 대상 중 하나일 가능성이 컸다.
높은 지위, 갑작스러운 만남, 지속적으로 부딪칠 요소까지. 여주인공과 엮일 만한 삼박자를 모두 지닌 인물이 그냥 지나가는 엑스트라일 리 없었으니까.
복도를 지나는 애리얼의 발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었다.
황자와 만나기까지는 앞으로 겨우 세 시간 남짓.
애리얼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얼른 문을 잠그고서 옷 안에 숨겨 둔 휴대폰을 꺼내 켰다.
『스토리가 아직 잠금 상태입니다.
최소 한 명 이상의 공략 대상을 만난 이후부터 스토리와 함께 자세한 정보가 해금됩니다.』
액정에는 애리얼이 눈을 뜬 첫날 이후부터 같은 문구만 띄우며 별다른 정보를 주지 않는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아무래도 공략 대상을 직접 만나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는 구조인 듯싶었다.
누구라도 만나지 않으면 대비를 하려야 할 수가 없는 구조.
“하아…….”
애리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튀어나왔다. 쓸 만한 정보가 없는 상태로 공략 대상일지 모를 황자를 맞닥뜨려야 하는 탓이었다.
‘어쩔 수 없네.’
금세 수긍한 애리얼은 마호가니 서랍장 안에다 휴대폰을 숨기고서 자물쇠를 잠갔다.
사실 휴대폰 액정에 비치는 시스템 창이나 진동 소리와 같은 소음들은 그녀 외의 타인에게 인식되지 않았다. 애리얼이 하녀를 통한 몇 번의 실험 끝에 확인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휴대폰의 외향이 문제였다. 휴대폰은 이 세계에서는 보기 어려운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이곳은 마법이 존재하여 다양한 마도구가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세계였다. 휴대폰의 외향은 독특한 귀중품으로 오인당하여 도난당할 위험이 다분했다.
그러니 치장을 할 때는 따로 숨겨 둘 필요가 있었다.
애리얼은 서랍장이 제대로 잠긴 것을 확인한 뒤 문을 열어 하녀를 불렀다.
“누가 나 좀 도와줄래?”
“네, 아가씨.”
곧장 들려온 목소리에 애리얼은 복도의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전담 하녀가 서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조금 엄격해 보이는 자세로 선 갈색 머리칼의 하녀. 대답 없던 아가씨에게 매일 요리에 관해 설명해 주고, 식지 않도록 클로시를 덮어 주던 사람.
“카논.”
“네.”
“계속 대기하고 있었던 거야?”
“오늘 황자 저하께서 오시는 날이니 잘 준비해 두라고, 백작님께서 미리 언질을 주셨으니까요.”
“그렇구나.”
“네. 우선 드레스를 입는 것부터 도와드릴게요.”
카논은 기다렸다는 듯 익숙하게 애리얼을 데리고서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드레스 룸은 원래 쓸 일이 거의 없던 곳이었다. 과거의 애리얼은 오로지 잠옷 종류로만 갈아입고서 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혔으니까.
하지만 오늘, 백작가 공녀로서 위신을 세우기 위한 것에 불과했던 공간이 드디어 쓸모를 보였다.
이동과 동시에 애리얼은 곧장 준비에 들어갔다. 방에는 미리 골라 놓은 듯한 진녹색 드레스가 말끔한 상태로 걸려 있었다.
애리얼은 질 좋은 옷감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비싸 보인다……. 저걸 입는 건가?’
그녀는 자신이 멋들어지게 꾸미고 황자와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가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카논은 능숙한 실력으로 치장을 준비했다. 그녀는 애리얼의 머리칼을 올려 묶어 주고서는 얼굴에 바를 화장품을 순서대로 놓았다.
앞으로 세 시간 안에 치장을 마치고 황족을 맞을 준비까지 해 둬야 했다.
다행히도 카논의 실력은 의심할 바 없었다. 보통은 치장에만 몇 시간이 걸리기도 하는 걸 한 시간 안으로 끝냈으니, 그녀의 유능함에는 백작도 감탄할 정도였다.
거울을 바라보던 애리얼은 평소에는 좀체 드러내지 않는 미소를 옅게 띄웠다.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 카논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애리얼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생기가 돌았다.
“고마워. 카논이 없었으면 사람 행세도 못 했을 텐데.”
애리얼은 제 전담 하녀를 향해 조곤조곤 말을 전한 뒤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긴 속눈썹 아래 흑연색 눈동자가 살짝 휘어졌다가 내리깔렸다.
그 외관이 자아내는 파급력은 카논으로 하여금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잊게 했다. 카논은 제 주인을 바라보다 속으로 탄성을 터트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이를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지나치게 말이 없어 텅 빈 것 같을 때도 외양만은 넋을 잃게 하던 애리얼이었다. 그런 그녀가 말하고 웃으니 절색이 따로 없었다.
물기를 먹은 듯이 촉촉한 촉감의 흑발은 최상품의 실크 같았고, 그와 어우러진 피부는 눈송이처럼 하얗고 고왔다. 이따금 작게 한숨을 쉬는 입술은 연홍색을 띠었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치아마저도 모난 구석 없이 작고 가지런했다.
거울 앞에 서서 외양을 확인하는 자태는 흡사 제 모습을 신기해하는 요정을 보는 것같이 천진하게 다가왔다.
애리얼은 거울에 반사된 제 얼굴을 주시하다가 양손을 모으고 손가락끼리 꼭 끼워 잡으며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 간단한 동작마저 가냘프고 우아해 보였다.
아름답다 못해 가련하게 느껴졌다.
“아뇨……. 뭐, 제가 아니었어도 아가씨는 빛나셨을 거예요.”
순간 대답을 잊을 정도로 몽롱해졌던 정신을 바로잡으며 카논이 고개를 숙였다.
거울을 들여다본 애리얼 역시 카논과 비슷한 감상이 들었다. 공들인 치장을 마친 애리얼 허클리의 외관은 감탄이 나왔다.
‘이것이 좋게 작용해서 황자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애리얼은 약간의 심란한 기색을 안면에 드리우며 창밖을 보았다.
구름 낀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
황자가 도착한 건 약속한 시각보다 한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시커멓게 물든 하늘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저택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백작을 비롯한 저택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정문 앞에서 대기하며 황족의 방문을 기다렸다.
애리얼은 환하게 열어 놓은 철창 문을 초조하게 응시했다.
저 멀리서부터 저택으로 다가오는 검은 자동차를 포착하자 긴장감이 손끝을 타고 올랐다.
빗물에 젖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클래식 카가 저택의 입구 바로 앞에 멈추었다. 새카만 보닛의 끝에는 르블레탄 황실을 상징하는 금 독수리가 박혀 있었다.
황족이 타고 있음을 명시하는 직관적인 표시에 사용인들의 기색이 확연하게 얼어붙었다.
차에서 먼저 내린 보좌관이 우산을 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상석의 문을 열었다.
벌어진 차 문 사이로 금발이 드러났다. 희게 반짝이는 머리칼은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서도 유난히 돋보였다.
황족의 상징인 금빛 머리칼에 긴장감이 스멀거리며 흘렀다. 저택 내의 모든 관심이 오롯하게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황자는 차에서 바로 내리지 않았다. 그는 한쪽 팔만 먼저 차 밖으로 내밀어 신경질적으로 휘휘 털어 냈다. 소매에 빗방울이 맺힌 모양이었다. 그 때문에 기분이 상당히 더러운 상태인 듯했다.
“똑바로 들어.”
그가 살벌하게 명령했다. 보좌관이 우산을 바로 세우며 재빠르게 자세를 고쳤다.
금발의 주인은 그제야 몸을 숙여 우산 아래로 들어갔다. 그가 허리를 곧게 펴고 정면을 주시했다.
새파란 시선이 저택 앞에 나와 선 환영객들을 신랄하게 훑었다.
시종일관 무표정한 백작을 제외하곤, 일반 사용인은 물론 베테랑인 집사장과 하녀장까지 바짝 긴장했다.
애리얼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과도한 긴장에 목구멍이 조여들어 헛기침이 나올 것 같았다.
황족에 대한 예의를 갖춘 고개는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애리얼은 황자임이 분명한 인물의 얼굴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그가 입은 베이지색 코트 자락만 눈에 담았다.
‘이 사람이 정말 공략 대상 중 하나일까?’
같은 생각만 머릿속을 빙빙 돌고, 입 안이 건조해져 마른침이 넘어갔다.
“백작한테 자식이 있었나?”
무심한 음성이 빗소리를 뚫고 애리얼의 귓속으로 들어왔다.
“예. 워낙 집 안에만 있던 아이라, 딸아이에 대해 아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
둘의 첫 대화가 싱겁게 끝맺어졌다.
그 직후 애리얼은 제게 쏟아지는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불안감이 온몸을 맴돌며 바늘처럼 콕콕 찔러 올 준비를 했다.
“사용인도 아니고, 얼굴 좀 들지?”
딱딱한 음성이 명령처럼 꽂혔다.
애리얼은 잠깐 멈칫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확인했다. 구김 없이 매끈한 코트의 끝자락부터 베스트를 입은 가슴팍까지 서서히.
떨어지는 비의 축축함을 지우는 산뜻한 향기가 물씬 났다. 그가 다가올수록 향이 진해졌다.
상승한 시선은 빳빳한 와이셔츠 깃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목에서 멈췄다.
“백작에 비해 훨씬 작네.”
아까까지만 해도 빗소리와 섞이던 음성이 이번에는 애리얼의 정수리 바로 위에서 선명하게 들렸다.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위를 바라본 애리얼의 두 눈이 칼을 벼린 듯 시린 빛깔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느샌가 정문 계단을 오른 그가 두 걸음 정도 거리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을 샅샅이 파헤치는 눈빛에 애리얼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겁에 질린 것처럼 한곳으로 시야가 좁아졌다가 물에 물감이 퍼지듯 서서히 그를 인식했다.
날카로운 눈매, 일자로 가지런한 눈썹, 반듯한 콧날, 무표정하게 다물린 입술, 날렵한 턱선, 검은 우산 아래 유난히 도드라지는 고운 결의 금발.
황홀하다고 해도 좋았다.
그는 황족의 존귀함을 오롯하게 외모로 나타낸 존재인 것만 같았다.
사람의 외관에 대한 인식이나 감상이 옅은 애리얼마저 말없이 응시하게 되어 버리고 마는…… 누가 봐도 완벽한 공략 대상의 모습이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