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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4화 (4/264)

4화

애리얼은 멍하니 황자의 얼굴을 주시했다. 어두운 하늘과 대비되는 금발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황족의 유전적 상징인 화려한 황금빛.

‘……황족! 그랬지! 어서 예를 갖춰야…….’

뒤늦게 사실을 깨달은 애리얼은 침착하게 고개를 떨궜다. 늦지 않게 한 발 물러나 드레스 자락을 손에 쥐고 입을 열었다.

“허클리 백작가의 장녀, 애리얼 허클리가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백작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하.”

“…….”

차분하게 건네는 환대의 인사에도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럼에도 눈만은 애리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애리얼이 황자를 보고 감탄했듯이, 황자도 애리얼과 마주하고 감탄했다.

공녀는 황자의 언 마음에도 파문을 일으킬 정도로 아름다웠다. 까만 머리칼 사이의 말간 얼굴이 밤의 조각달을 연상케 했다. 희고 고운 것이, 상대의 눈빛을 절로 집요해지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잊고 싶어도 기억될 외관이고, 조용하고 싶어도 소문이 날 얼굴이며, 활용하기 싫어도 득을 볼 아름다움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백작의 여식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건 백작의 말대로 이 공녀가 집 안에만 칩거하며 단 한 번도 황성이 주최하는 행사나 파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게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아주 일순 사교계에 얼굴을 비치기만 해도 온갖 찬양이 따라붙을 외모인데, 어떤 심각한 결함이 있어 저 외모로 방 안에만 틀어박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회성에 문제가 있다기엔, 금세 예를 갖추고 태연자약한 얼굴을 해 보이지 않았던가.

묘했다.

도자기 인형처럼 연약하게 깨질 것 같은 외관을 하고서는 덤덤한 반응으로 일관한다.

예상에 없던 인물이 예측하기 어려운 표정을 하고 있으니 필요 이상으로 신경이 쓰였다.

그는 샅샅이 뜯어볼 기세로 공녀에게 눈빛을 쏘아붙였다. 그러나 공녀는 쉽사리 고개를 들지 않았다.

기 싸움 같은 침묵이 필요 이상으로 길어졌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기이한 기류를 감지한 주변인들이 하나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황실의 보좌관마저 눈을 흘금거리며 황자의 상태를 살폈다.

“저하.”

그가 의중을 묻듯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제야 황자가 애리얼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그는 냉담하게도 애리얼을 휙 지나쳐 문으로 향했다.

옆을 스치는 인기척에 애리얼은 숙였던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고동색 더블 도어 사이로 백작과 황자의 뒷모습이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이내 완전히 고개를 든 애리얼은 잠시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방금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던 황자의 행동이 어떤 저의를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공략 대상일 가능성이 큰 사람이었다. 최소한 나쁘지 않은 인상 정도는 선사해야 하는데.

어찌어찌 첫 만남에 무례를 범하진 않았지만, 그가 애리얼의 언행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성격이 그렇게 유한 편은 아닌 것 같고, 대화도…… 하기 어려울 것 같고.’

호감도 올리기에 난항이 예상되었다.

어느새 복도 끝에 다다른 황자는 고고함을 과시하며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제집인 양 백작보다 앞서 걷는 걸음은 당당하기만 했다.

그의 모든 움직임들이 그렇게 오만했다. 앞으로의 일이 순탄치 않으리라는 예고와 같이.

애리얼은 심란해졌다.

번개까지 치는 창밖의 소음이 더욱 소란스럽게 다가왔다.

저택으로 들어온 황자는 백작과 둘이서만 이야기를 나눴다.

몇 분 후 보좌관만이 그가 있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애리얼에게는 합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저녁 만찬을 함께하기 위해 대기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것만이 허락되었다.

그렇게 기다린 것이 벌써 두 시간째.

애리얼은 유리 너머로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차츰 지루함이 누적되었다.

괜한 의심을 살까 싶어 마호가니 서랍장에 숨겨 놓고 온 휴대폰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저녁 먹을 시간쯤에나 나오려나?’

애리얼은 흘긋 눈길을 돌려 구석에 자리한 괘종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다섯 시 오십 분. 만찬 준비로 슬슬 아래층이 분주해질 때였다.

‘차라리 아래층에 내려가 있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애리얼은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려 불만을 표출했다. 앉은 자리가 편하다 한들 두 시간이나 아무 일 없이 기다렸더니 답답해졌다.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찾아오려는 때.

“아가씨, 백작님께서 부르십니다.”

드디어 문 앞에 인기척이 나타났다.

애리얼은 곧장 기립해 문을 열어젖혔다. 그에 문 앞에 있던 하녀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그래도 하녀는 금방 표정을 갈무리했다.

“……백작님께서 저하와 함께 아래층 만찬장에서 기다리십니다.”

“알겠어.”

“아가씨, 가시기 전에 이것을 먼저.”

하녀는 아래층으로 향하려는 애리얼의 걸음을 멈춰 세우며 애리얼에게 자그마한 선물 상자 같은 것을 내밀었다.

무늬가 없는 검은색 벨벳 상자. 비싼 보석이 들어 있을 법한 형태였다.

애리얼은 이 상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황자 저하께 건넬 환영 선물이구나.”

“네. 저하께서 혼자 계실 때 건네시길 바라신다고, 백작님께서 당부하셨습니다. 내용물은 사각형으로 세공된 사파이어입니다.”

하녀가 대신 전하는 백작의 당부는 꽤 구체적이었다. 황자와 친하게 지내라던 티타임의 언질은 빈말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애리얼은 말없이 상자를 받아 들곤 허리에 매달아 사용하는 드레스 주머니에 고이 집어넣었다. 보석함의 무게가 생각보다 묵직했다. 애리얼은 보석함이 주머니에 잘 들어간 것을 확인하곤 허리춤에다 주머니 끈을 묶었다.

어차피 황자의 호감도를 올려야 하는 입장이니 백작의 의중을 따라서 나쁠 것은 없었다.

“만찬장으로 모시겠습니다.”

백작의 용무를 전달한 하녀가 차분한 걸음으로 다음 일정을 진행했다.

짧았던 첫 조우 이후로 두 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황자와의 대면이 이뤄졌다. 그간 기다림으로 느슨해졌던 마음이 다시금 긴장되기 시작했다.

애리얼은 하녀의 안내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선물 상자가 든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이걸 언제 주느냐가 관건이었다. 만찬이 끝나면 황자가 가 버릴 테니까, 그 전에 주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혼자 있을 때 주라는 추가 주문까지 만족하려면 기회가 아예 없을지도 몰랐다.

초조해지는 마음과 함께 애리얼은 만찬장의 입구에 다다랐다.

똑똑.

하녀가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벌어지는 더블 도어 사이로 보라색 커튼이 쳐진 만찬장의 내부가 드러났다.

기다란 만찬 테이블에 백장미로 만든 센터피스, 그 너머 상석을 차지하고 마주 앉은 백작과 황자의 모습이 보였다.

애리얼은 우연찮게 황자와 눈이 마주쳤다. 황자의 파란 눈에서 쏘아진 눈빛이 가시처럼 와 박히는 느낌이 선연했다.

애리얼은 동요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무덤덤하게 제 자리로 향했다.

만찬의 메뉴는 신선한 자연산 민물고기와 제철 과일로 구성되었다. 푸르른 강으로 유명한 백작 영지의 특산물이었다. 혹여나 테이블이 빈약해질까 곁들인 송아지고기도 훌륭했다. 어찌나 신경을 썼는지, 감탄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자와 그 내외 귀빈인 보좌관과 서기는 입도 벙긋 않았다. 만찬장은 미세한 칼질 소리조차 거슬리게 들릴 만큼 유난히 조용했다.

황자는 애리얼에게 상당히 집요한 시선을 던졌던 것치곤 극도로 말이 없었다. 간혹 입을 열어도 백작에게나 몇 마디 던졌을 뿐이고, 그마저도 주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필요한 이야기는 아까 모두 마친 모양이었다.

그 덕에 애리얼은 식사가 이어지는 내내 시간에 쫓겼다. 단맛이 나는 질 좋은 생선살이 쓰게 느껴질 만큼 여유가 없었다.

이게 전부 주머니에 든 선물 때문이었다.

콰광!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벽을 넘어온 천둥소리가 요란했다.

“그나저나 저하, 날씨가 궂습니다. 오늘 밤은 이곳에 머물고 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난데없이 튀어나온 백작의 말에 애리얼은 사레가 들릴 뻔했다.

‘황족더러 백작저에 하루 자고 가라는 말이야? ……감당이 되나?’

애리얼은 곁눈질로 백작의 안색을 살폈다. 동요는커녕 자신만만함까지 느껴지는 얼굴이 보였다. 무슨 자신감인가 싶었다.

사실 백작이 꺼낸 말이 아주 의외는 아니었다. 요란한 바깥 날씨를 보자면 당연히 나올 만한 권유이기는 했으니까.

하지만 백작저는 미리 예정되어 있던 오늘의 일정에 따라 저녁 식사 대접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다른 준비를 해 놓지는 않았을 터였다. 물론 기본적인 대비야 매번 해 놓지만, 아예 상정하고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준비가 미흡하여 결례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건 큰 리스크인데.’

거기다 하물며 황족이었다. 그 귀한 핏줄을 하루 모시는 일에 미흡함이 용서될 리 없었다.

사용인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던 모양인지, 낯빛이 모두 사색이었다. 보고 있자니 자신까지 괜스레 동요하게 되어서 애리얼은 고개를 푹 숙였다.

바닥으로 떨어진 애리얼의 눈에 드레스 허리춤에 묶인 주머니가 들어왔다. 걱정이 더 짙어졌다.

황자에게 선물을 건넬 기회를 바라기는 했으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권유를 받은 당사자는 무슨 연유인지 조용했다. 심중한 고려를 진행하는 중인지.

황자를 주체로 묵직하게 흐르는 침묵엔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다.

우르릉, 쾅!

커튼에 가려진 밖이 그의 선택을 재촉하는 듯이 시끄러웠다. 적막한 가운데 하늘만이 소란을 피웠다.

요란한 천둥소리가 지나가자, 황자는 결정한 듯이 눈을 감았다 떴다. 무겁게 다물었던 입이 열렸다.

“……하긴, 이 빗속을 뚫고 나가는 것도 내키는 일은 아니네. 제안대로 하루 묵고 가지.”

심드렁한 말투였다.

그의 결정에 애리얼은 희한하게도 불편함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직접 황자를 모시는 입장이 아니라 부담이 덜해서 그런 듯싶었다. 그리고 아직 선물이라는 용건도 남아 있었으니까.

비록 저택 사용인들의 안색은 파리해졌지만 말이다.

그렇게 그들의 희생 위에 만찬이 계속되었다.

황자는 여전히 조용했고,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사용인들은 호흡마저 조심했다.

차례차례 접시들이 오가고 마지막으로 식후 차가 올려질 때까지도 대화는 일절 없었다.

그 와중에 자리한 황족의 존재감은 압도적이고 엄중했다. 시종일관 무심해 보이는 얼굴이 짓누르는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풍성하던 테이블이 다과만 남기고 말끔히 치워졌을 때는 마치 긴 터널을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만찬의 종료를 알리듯 백작이 입을 열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저하.”

황자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냥 의례상 하는 행동 같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영광인 모양인지 주방장은 크게 감격했다. 만찬 준비를 맡은 여타 다른 사용인들도 한시름 놓은 얼굴이었다.

엄숙한 표정의 백작이 그들을 대표해 짤막하게 말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근데 말이야.”

그가 뭔가 건수를 잡은 듯이 입을 떼자 장내의 공기가 다시금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방금까지 천당에 오른 듯했던 주방장의 낯은 삽시간에 나락에 가기 직전으로 굳었다.

무슨 연유로 저러실까.

자주 있는 일은 아닌지 황자의 뒤를 지키던 보좌관마저 의문이 서린 얼굴을 했다.

궁금증은 오래 끌리지 않았다.

“자리 좀 비워 줘. 공녀만 남기고.”

갑작스러운 요구였다.

애리얼은 테이블 아래 숨긴 손을 움찔 떨었다.

여기 공녀라 부를 인물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백작의 외동딸. 애리얼 허클리. 바로 그녀 자신.

애리얼은 당혹감에 떨리는 손끝을 세게 말아 쥐었다.

‘뭐 때문에 둘만 남는 자리를 만들려는 거지?’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당혹한 건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내내 변함이 없던 그녀의 얼굴에도 동요가 일렁였다.

“무슨 까닭이신지 물어도 될까요?”

“아니.”

황자는 단호하게 거부하며 만찬장의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턱짓을 까딱.

“지금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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