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황자가 하인을 대하듯이 백작에게 명령했다. 이게 제국 황족이란 말인가. 숨 막히는 오만함이 만찬장을 관통했다.
그러나 이곳의 그 누구도 항의하거나 불만을 내색하지 못했다.
백작은 순순하게 명을 따라 사용인들에게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용인들이 잽싼 걸음으로 만찬장을 빠져나갔다.
한 명 한 명, 시야에서 사라질 때마다 애리얼은 사자 우리 속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되었다.
애리얼은 복잡한 심경으로 식후 차만 가만히 응시했다.
주머니 속에 든 선물 상자가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만찬장이 빠르게 휑해졌다. 차례차례 사람이 빠져나간 끝에, 마지막으로 백작마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짧게 남긴 백작의 말은 그녀가 황자의 명에 완전히 순응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
애리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혹여나 백작에게서 이 상황의 타개를 바랄 수 있지 않을까, 같은 희망은 완전히 접었다.
황자의 보좌관마저 나가 버린 채 문이 닫혔다. 이제 완전하게 그와 애리얼 둘만이 남았다.
한층 조용해진 공간이 극도의 어색함을 자아냈다.
물이 차올라 기도를 막는 것처럼 가슴이 갑갑했다.
애리얼은 묵묵한 표정으로 찻잔만 바라보았다.
반대편 상석에 앉은 황자가 자세를 바꿔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러고는 저를 보라는 듯이 일부러 인기척을 냈다. 애리얼을 자극하기 위해 취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애리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용건이 있으니 남으라던 것은 그였다. 그녀에게는 먼저 입을 열어 말할 것이 없었다.
애리얼의 그런 행동은 알게 모르게 황자를 자극했다. 예의를 지키면서도 무심하게 구는 것.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그가 깔보는 눈빛을 하고서는 애리얼을 주시했다.
“어느 쪽도 흘금거리지도 않고, 시선은 아래로, 식사는 조용히. 그렇게 훈련받은 건가?”
“……아니요. 저하의 앞이라 예를 갖추었습니다. 평소에는 좀 더 자유분방한 편입니다.”
애리얼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황자와 눈을 마주했다. 막상 상황에 던져지고 나니 침착해진 머리 덕분에 태연히 대답할 수 있었다.
그녀의 대각선 자리에 앉은 황자는 지루해 보였다. 그가 입꼬리를 늘어뜨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뭔가가 못마땅한 눈치였다.
“백작이 그러던데. 네가 나랑 나이가 같다고.”
“그런가요……. 저하의 춘추가 어떻게 되시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올해 열일곱입니다.”
“그리고 올해, 아카데미로 들어올 예정이라고.”
“네. 어머니께서 오늘 아침에 언질을 주셨습니다. 늦어도 올해는 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저도 마음먹고 있던 차였습니다.”
“백작이 네가 황자비로 어떠냐고 묻던데.”
“……네?”
도무지 차분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단어가 던져졌다. 황자비.
침착하던 애리얼의 얼굴이 놀라 깨졌다. 휘둥그레진 눈이 그녀가 느끼는 혼란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황자는 동요한 애리얼의 표정을 찬찬히 훑었다. 그는 누가 봐도 감상한다는 표현이 어울리게, 그녀를 뜯어보고 있었다.
애리얼은 그가 던진 ‘황자비’라는 단어만큼 그가 취하는 저 눈빛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별로 탐탁지 않아 하는 게 분명한 저 눈이…….
“애리얼이라고 했지. 애리얼 허클리.”
황자가 기억하려는 듯이, 어쩌면 경고하는 듯이 그녀의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넌 어때. 황자비 자리가 탐나?”
“……미처 몰랐던 사안이라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그렇다고 하기엔, 옷자락에 숨기듯이 가져온 그것도 나한테 바칠 거 아닌가?”
명확하게 주머니 속 선물 상자를 지칭하는 발언이었다.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제 허리를 내려다보았다. 허리춤에 묶인 벨벳 주머니 속엔 아직 그에게 건네지 못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를 곧장 간파해 낸 황자의 예민한 통찰력에 애리얼은 소름이 끼쳤다.
‘이왕 들킨 거 그냥 줘 버릴까?’
불쑥 그런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금세 마음이 또 바뀌었다.
‘그래도 지금 주는 건 너무 별로일 것 같은데……. 차라리 적당히 얼버무리는 게 낫나?’
애리얼은 고민에 빠져 주춤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황자의 두 눈은 그녀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짐짓 무료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 아래에는 날이 선 판단력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어설픈 거짓말이나 금방 들킬 속내를 숨기는 짓 따윈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애리얼은 순순히 주머니를 풀고 상자를 꺼내 들었다.
“네. 저하께 드릴 선물입니다.”
솔직한 대답과 행동에 황자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나한테 사심이 있다고 봐 줄까? 아니면 나한테 아부하는 거로 봐 줄까.”
황자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애리얼의 의도를 물어 왔다. 비웃음 뒤에 이어진 낮은 어조의 물음은 조롱처럼 들렸다. 그녀의 머릿속 정도는 다 읽고 있으니 허튼소리는 말라는 듯이.
애리얼은 조용히 심호흡을 하고서는 그가 내준 선택지 중 하나를 골랐다.
거짓말을 했다가는 괜한 술수를 부린다고 여겨질 게 뻔했다. 더 나아가 그를 기만하는 거라 여겨지면 위험했다. 그러니 여기선 차라리 솔직하게…….
“아부의 의미입니다.”
“왜 아부하는데?”
“저는 사교계에 한 번도 발을 들인 적이 없어, 혹 아카데미에 가서 귀족 가문 간의 기 싸움에 치이진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하께 잘 보임으로써 저하의 사람으로 조금이라도 인식되어 차후의 입지를 다지고자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내 연줄이 필요하다는 거지?”
“네, 저하.”
“그래……. 분명 백작도 황자비 자리가 탐난다기보단 그런 투였지.”
황자가 혼잣말하듯 백작과의 일을 언급했다. 그러고는 뭔가를 가늠해 보듯 잠시 대화를 중단했다. 줄곧 애리얼을 주시하던 두 눈도 슬쩍 다른 곳을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애리얼은 질문하지 않았다. 잠자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침묵하는 황자의 얼굴은 우수에 젖은 것처럼 비치기도 했다.
“너 하나 뒤 봐주는 것쯤이야 못 할 것도 없어.”
정적을 깨며 들려온 그의 음성은 굳이 대답을 바라는 투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애리얼의 옆얼굴을 살짝 비껴가 빈 곳으로 향해 있었다. 뭔가를 진중하게 고려한다기보다는 순간의 지루함을 희석할 유희거리를 찾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게 잠시 허공을 보다가 이내 애리얼에게로 돌아오는 파란 눈동자.
“근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거든.”
“…….”
“아무리 백작의 성의를 고려한다 쳐도, 딱히…… 내가 그렇게까지 해 줘야 하나 싶네.”
“…….”
“그러니까 네가 내 비위를 맞춰 봐. 어차피 하루 있기로 했으니, 그동안 네가 내 마음에 들게 굴면 네 편의를 봐주는 것도 생각해 볼게.”
싸늘하게 득실을 따지는 그의 논리에 구태여 따지고 들 부분은 없었다.
애리얼은 그에게 초면인 사람이었다. 그것도 사교계에 얼굴 한번 비친 적 없는 인물.
그런 이의 편의를 봐주라는 제안이었다. 잘못하면 평판에 금이 갈 수도 있었다. 그런 제안을 누가 들어주겠는가.
심지어 그는 황족이라는 지위를 가졌다. 매몰차게 거절해도 상대방은 할 말이 없었다. 백작은 몰라도 그녀의 딸까지 챙길 책임도 온정도, 그에겐 없다.
애리얼은 침묵 속에 수긍했다. 이건 백작과 황자의 관계와는 구별되는, 황자와 그녀만의 관계였다. 공녀로서 그녀가 새로이 그에게 신뢰를 주고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뒤를 봐줘도 괜찮을 사람이라는 확신을 줘야 했다.
이는 애리얼이 황자라는 연줄을 제대로 쥐고자 한다면 반드시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또한 공략을 위해서도…….
“네. 알겠습니다.”
애리얼이 담담히 그러겠다 답하니 황자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그는 의외라는 양 눈을 가늘게 찌푸리다 미간을 조금 구겼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러다가 금세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로 살짝 눈을 감더니,
“그럼 따라 나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갔다.
애리얼은 그 뒤를 얼른 따라갔다. 손에는 미처 전하지 못한 벨벳 상자가 들려 있었다. 마음만 급했다.
그의 걸음은 애리얼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문 열어.”
황자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문고리를 쥔 황자의 보좌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는 백작과 집사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황자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휙 지나치며 한 가지 명령을 던졌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호출할 테니 일일이 쫓아다닐 필요 없다.”
“예, 저하.”
보좌관이 가장 먼저 나서서 명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다른 이들이 지나지 못하도록 길목을 막고 섰다. 유일하게 애리얼만 통과시켜 주었다.
미리 얘기된 일인지, 아니면 황자가 평소 이런 행동을 자주 하는지. 잽싼 대처를 보이는 보좌관의 태도에서는 숙달된 능숙함이 묻어났다.
반면 백작저 사람들은 당혹한 것이 명확한 얼굴이었다.
애리얼은 그 사이를 빠르게 스쳐 지났다. 황자의 뒤를 바쁘게 쫓아가느라 주변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황자는 걷는 속도를 맞춰 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복도를 꺾어 빠져나가는 황자의 뒤태가 멀어졌다. 대체 어디를 갈 작정인지, 무작정 따라오기를 요구하는 뒷모습이 무정하기만 했다.
애리얼은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을 쥐고서 복도를 질주하다시피 걸었다. 기다란 드레스가 더없이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다급한 걸음이 모서리를 돌아 나갔다.
황자가 향한 곳은 현관이었다. 문과 직선으로 이어진 복도로 들어서자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던 황자의 모습이 다시 포착되었다.
황자가 현관문을 열었다. 비바람이 치는 바깥의 한기가 하얀 복도 바닥으로 밀려왔다.
음산한 소리가 연신 울리는 문 쪽으로 애리얼은 조금씩 거리를 줄여 다가갔다.
문간에 기대선 황자가 비 오는 바깥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애리얼을 향하는 황자의 파란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빛깔이었다. 그의 안면을 내내 덮은 무표정은 냉정하다 못해 사납기까지 했다.
이제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것인가. 애리얼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두렵다기보다는 막연하게 느껴졌다.
열린 문으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요란했다.
애리얼은 흐트러졌던 호흡을 진정시키며 걸음을 멈췄다.
“저하,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애리얼이 각오를 다진 사람처럼 선언하니, 황자는 다짜고짜 손부터 내밀었다.
“일단 나한테 줄 거부터 주고.”
명령이 떨어졌다.
애리얼은 두 손을 곱게 모아 조심스레 그에게 선물을 건넸다. 환히 펼쳐진 그의 손바닥 위로 벨벳 상자가 올라갔다.
황자에게로 넘어간 벨벳 상자가 그의 손에 의해 곧장 열렸다.
상자는 새것이라는 티를 내며 다소 뻣뻣하게 벌어졌다. 겉과 같은 색으로 벨벳을 두른 상자의 내부 중간에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사파이어가 자리했다.
사각형으로 세공된 보석이 진한 푸른색으로 빛났다. 결점 없는 최고 등급의 물건이었다.
선명한 바닷빛의 사파이어는 높은 등급의 다이아몬드에 비견될 만한 가격으로 측정되었으니까.
백작이 황족의 특유의 파란 눈동자 색을 염두에 두고서 일부러 고른 선물인 듯하나, 정작 황자의 반응은 시들했다.
황자는 별 볼 일 없는 물건인 양 취급하며 손가락 사이에 보석을 끼워 들었다.
애리얼은 불안하게 그의 손가락을 주시했다. 엄청나게 비쌀 것이 분명한 사파이어가 그의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어 위태하게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애리얼.”
황자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보석을 향하던 그녀의 눈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황자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행동을 취했다. 그의 팔이 유연하게 움직여 어깨 뒤로 물러나더니 휙, 앞으로 휘둘렸다.
힘을 받은 사파이어가 빗속을 꿰뚫고 빠르게 날아갔다.
애리얼은 한발 늦게 보석이 던져졌음을 알아차렸다.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얼얼함을 느끼며 그를 보았다.
황자의 곱상한 얼굴을 덮은 여전한 무표정이 흉악했다.
“찾아와.”
황자가 마치 개를 부리듯이 말했다.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끔찍하다는 평이 과하지 않았다.
애리얼은 보석이 날아간 궤도조차 눈에 담지 못했다. 우레와 같은 빗방울 소리에 묻혀 부딪치거나 떨어지는 소음도 나지 않았다. 낭패였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