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예민한 성미는 소리를 지르고 깽판을 치는 종류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르블레탄 제국의 황자는 몹시 예민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그의 예민함은 단지 까탈스럽고 고압적인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상대를 시험하고 평가하며 사람의 한계를 가늠했다. 그러다 상대가 제 기준을 만족하지 못하면 무섭도록 사나워졌다.
그 과정은 몹시 무례하여 사람의 자존심을 땅으로 처박는 일이 많았다.
거기서 파생된 소문은 당연히 최악이었고, 황자의 악명은 삽시간에 자자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황자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저 고약한 성미를 단 한 번만 만족시키면 단물이 떨어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황자도 그들의 속내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호락호락하게 굴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내심을 이용했다.
그렇다고 그가 늘 자기방어적인 이유로 사람을 시험하지는 않았다. 가끔은 온전히 제 성질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의 욕망과 선망을 발판 삼아 행패를 부렸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 그 높은 권력과 빼어난 외모가 주는 이득이 아니겠는가.
금발 아래 잘난 얼굴이 무표정을 깨고 슬그머니 웃었다. 빗속으로 뛰어간 애리얼의 뒷모습에 그는 익숙한 즐거움을 느꼈다.
***
‘첫 번째 공략 대상부터 성격이 너무…… 감당하기 힘든데. 쟤가 공략이 되긴 할까?’
애리얼은 한탄했다.
오늘 날씨는 예삿일이 아니었다. 빗줄기가 너무 거세서 눈을 뜨기 힘들었다. 종종 몰아치는 비바람은 사람을 휘청이게 만들 정도였다.
애리얼은 곧게 편 손을 눈썹 위에다 대고 처마를 만들어 주변을 훑었다. 그래도 뛰어드는 물방울이 자꾸만 시야를 흐렸다.
옷은 뛰어나온 지 고작 몇 초 만에 다 젖어 버렸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드레스를 질질 끌고서 어두운 후원을 걸으니 다리에 돌덩이가 묶인 수준으로 고됐다.
사방에 어둠이 깔려 바로 코앞만 겨우 분간될 지경인데 손마디 두 개만 한 보석을 어떻게 찾을까.
애리얼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쌕쌕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분명히 땅에 떨어졌을 거였다. 확신과 함께 부지런히 눈을 굴려 봐도 파란빛은 보이지 않았다. 잔디가 밟히는 땅은 온통 거무칙칙하기만 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찾아야 해…….’
애리얼은 아예 무릎도 꿇어 버리고 땅바닥을 더듬었다. 귀족 체면이 무너지는 짓이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이 빗속에 누가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저 멀리 문간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황자 외에는 없었다.
그는 애리얼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아무렴, 그의 눈에 들려고 이런 짓까지 마다하지 않는 건데.
‘이랬는데 공략 대상이 아니면?’
아찔한 생각이 머리를 강타하며 애리얼의 손마디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이 꼴을 감내하는 이유는 그가 공략 대상일 확률이 매우 높아서였다. 아마도 분명, 그는 공략 대상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휴대폰만 있으면 확인할 수 있는데.’
혹시나 들켜서 의심을 살까 방에 놔두고 온 것이 줄곧 후회되었다. 그러나 그런들 지금 당장 휴대폰을 가지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 생각해. 닥친 일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판이야.’
설령 공략 대상이 아니더라도 눈에 들어 놓으면 최소한 도움은 된다. 황자의 연줄은 어디든 쓸 만했다. 다른 공략 대상을 만나고 스토리를 진전시키는 데도 유용할 것이 분명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애를 쓰는데도 애리얼은 비참하다기보다는 점점 오기가 생겼다.
그렇게 어금니를 사리물고서 악천후 속에서 몇십 분.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피부는 유령이라 해도 좋을 만큼 창백하고 차가워졌다. 빗물에 불어 버리는 느낌이었다.
애리얼은 땅바닥을 기다시피 한 몸을 잠시 일으켰다.
오전부터 부리나케 치장했던 녹색 드레스는 진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애리얼은 허탈했다. 기껏 애써 준 카논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치장해서 뭘 하겠다고…….’
결국, 기껏 꾸민 게 무용한 일이 되었다.
황자를 만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은 외양이 아니었다. 저 성격을 참고 견딜 인내였다.
애리얼은 망연하게 저택 쪽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 불빛이 새어 나오는 문. 거기에 여전히 황자가 서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빗발이 세서 분간이 어려웠다.
그런데도 애리얼은 왠지 그가 아직 거기 있을 것 같았다. 어름어름 보이는 불빛이 그 추측에 힘을 실었다.
그래서 애리얼은 더욱더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찾지 못했다며 황자에게 빈손을 보이기 싫었다. 그를 위해 이만큼 노력했다는 걸 보이고 싶었다. 그의 신뢰를 얻어야 했다.
쫄딱 젖어 진흙밭을 뒤지고 있는 게, 이제는 그냥 제 의지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사파이어를 찾아야 했다. 애리얼은 자신이 시작한 일을 끝마치고 싶었다.
빗속에서 애리얼은 다시 허리를 굽혔다.
갤 줄 모르는 하늘 아래, 빗방울은 더 굵어졌다.
***
휘오오오, 물을 먹어 부는 바람이 연신 음산한 소리를 냈다.
황자는 문 앞에다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건물 포치 지붕으로 방어되는 계단 밑 자리까지 물이 흥건했다. 이따금 저택 안까지도 물이 튀어 들 정도니, 밖의 상황은 안 봐도 뻔했다.
그는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도대체 언제까지 찾을 작정이지?’
십여 분이면 지루해질 줄 알았던 유희는 어느덧 두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애리얼이라는 저 공녀가 먼저 지칠 줄 알았고, 아니면 자신이 지루해져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대체 뭔가.
부러질 것같이 왜소하던 공녀는 비바람 속에서 돌아올 줄을 몰랐다. 고집인지 아집인지.
하면 공녀는 그렇다 치고, 기다리는 자신은 또 뭔가.
평소처럼 무시나 하면 될 것을, 그는 저 공녀가 신경 쓰여 아직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귀족 집안의 외동딸이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구는 걸 처음 보아서 그런지. 솔직히 노예들이나 할 법한 궂은일에 매달리며 제 연줄을 원하는 게 신기하긴 했다.
‘하지만 정말 그것뿐인가…….’
또 다른 궁금증이 그의 머리를 헤집었다.
여태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그만큼 큰 요구를 해 왔다. 그리고 그들은 철저하게 계산해서 문서화하기 전에는 절대 몸을 내세워 행동하지 않았다. 그게 기본이었다.
그런데 저 공녀는 아무 문서도 받지 못한 빈손으로도 폭우 속에 뛰어들었다.
실제 백작의 말대로, 그녀는 경험이 없고 순진한 게 확실했다. 그러니 고작 제 신뢰 하나 얻겠다고 저 짓을 하는 것일 터였다. 뭘 받을지 약속도 없이.
아둔하다 비웃어 마땅했다. 평소의 그라면 그랬을 거였다.
그런데 지금, 웃음은 하나도 나지 않았다. 처음에만 해도 입꼬리를 올리고 애리얼이 하는 양을 보던 그는 이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황족이 부르지 않는 이상 오지 말라 일렀으니 이 근방에 접근하는 이는 없을 것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가 포기하고 울면서 이 문 앞으로 와야 했다. 그러면 그가 사람을 불러 줄 거고, 더 험한 꼴을 보기 전에 끝날 것이었다.
이제 그는 아예 애원하는 것처럼 바라고 있었다.
불현듯 불쾌함을 느낀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의문이 바깥의 빗발처럼 세차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도저히 밖을 헤매는 저 공녀만 두고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알량한 양심 같은 게 아니었다. 그냥…… 정의를 내리지 못한 감정이 그의 속을 뒤집었다.
휘오오오.
빗소리는 여전히 거칠고,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졌다. 톡, 토독. 간밤의 빗소리에 비해 무척이나 잔잔한 소리가 났다. 하늘은 아직도 구름이 끼어 흐렸으나, 비는 완전히 그쳤다.
황자는 피곤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문지르다 가늘게 눈을 떴다.
희끄무레한 시야로 밤새 주시했던 문밖이 보였다. 온통 캄캄했던 곳이 지금은 환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깜박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이 짓으로 밤을 지새우다니. 그는 밤새 습기로 눅눅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흘려보냈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이른 아침의 고요함마저도 지금의 그에게는 거슬리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그 공녀는?’
아직도 혼자 정원의 진흙밭을 더듬고 있을까. 엉망이 되었을 공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그는 어젯밤처럼 속이 엉키는 기분이었다. 누군갈 곤경에 처넣은 게 한두 번도 아니었는데, 기이할 만큼 생소한 감정이 들었다.
불편함에 못 이긴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직접 공녀를 찾으러 나섰다. 화난 것처럼 인상을 쓰고 성큼성큼 문간을 넘었다.
그러고 얼마 안 가 그는 공녀와 마주쳤다. 문으로 오르는 계단 앞이었다.
“황자 저하.”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또렷했다. 어제보다 조금 잠겨 있는 것을 제외하면 멀쩡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애리얼의 외관은 그렇질 못했다.
물먹은 머리칼이 형편없이 늘어졌다. 창백하다 못해 핏줄이 비칠 듯한 피부는 병인의 것 같았다. 빗물과 진흙으로 더러워진 드레스는 거의 넝마였다.
처참한 몰골로 비척비척 계단을 오르는 게 꼭 무덤을 파고 나온 시체 꼴이었다. 어젯밤 동안 어지간히도 고생한 모양이었다.
황자의 안면이 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구겨졌다. 안 그래도 갑갑하던 속이 더 뒤틀려 버렸다.
“매장이라도 당했다가 나온 것 같네.”
황자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말투의 서늘함에 놀란 건지 무표정으로 계단을 오르던 애리얼이 멈칫했다. 그래도 그녀는 끝내 그의 앞으로 와서 섰다. 파랗게 질려 버린 손끝을 내밀며.
“찾아왔습니다.”
가느다란 손가락을 펴서 보인 것은, 선명한 푸른색의 보석. 그가 던져 버렸던 사파이어.
애리얼은 과한 감정이라곤 조금도 내비치지 않고서 그걸 내밀었다. 그녀는 분노하지도,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내리는 비에 감정을 모두 희석하고 온 것처럼, 투명한 얼굴이 고요한 표정을 지었다.
황자는 복잡한 기분으로 입을 다물었다.
저 얼굴에 대고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는 그만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사파이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주변도 잊었다.
이유 없이 또 속이 들끓었다. 어젯밤처럼.
“이걸로, 괜찮으셨으면 좋겠어요.”
공녀는 잠자코 침묵을 지키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달관한 사람처럼 초연한 말투였다.
나풀거리는 속눈썹 아래 두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더는 못 할 거 같아서……. 저는 잠을 좀 자야겠어요.”
멀쩡하게 또박또박 말하는가 싶더니, 황자에게 내밀었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궈졌다. 무거운 졸음을 매달고 침잠한 눈동자 위로 눈꺼풀이 덮였다. 빈 포대 자루가 폭삭 내려앉듯이 애리얼의 마른 몸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무너졌다.
황자는 반사적으로 양팔을 뻗어 공녀를 받았다. 그녀에게 온전히 품을 내줬다.
축축한 머리칼의 감촉과 자그마한 몸, 진흙투성이의 드레스를 껴안고, 황자는 곤혹스러움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잠든 공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사파이어는 무가치하게 계단으로 떨어졌다. 저깟 보석은 이제 아무 상관도 없었다.
그녀의 차가운 피부가 황자의 온 신경을 빼앗았다.
그는 가슴팍에 가해지는 무게감에 고개를 떨궜다. 그에게 가만히 안긴 공녀의 얼굴엔 진흙 얼룩과 빗물 마른 자국이 남아 있었다.
황자의 가슴에 뭐라 정의하기 힘든 불편한 응어리가 얹혔다.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무리하다 이 모양이 된 그녀 때문에, 그는 죄책감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이에겐 느끼지 않던 부분이었는데. 왤까.
‘너는 왜 나한테 이런 기분이 들게 하는 거지?’
괜스레 울컥해 그는 애리얼의 탓을 하고 싶어졌다.
‘왜 이렇게까지 해?’
그래 봐야 기절한 그녀에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황자는 답답함에 길게 한숨을 쉬었다.
여자의 잠든 얼굴을 계속 봐 봐야 갑갑하기만 해서 그는 그만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두 눈으로 이슬 향이 나는 정원을 가만히 주시했다.
황성의 그 어떤 정원보다도 작은 곳이지만, 이 조그마한 몸으로 바닥을 훑으며 돌아다니기엔 턱없이 넓었을 터.
애리얼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억센 비바람 속을 헤치고 다녔다. 그러더니 기어코 그가 집어 던진 사파이어를 찾아오고야 말았다.
문서화된 확실한 약속의 증거도 없이 무작정. 아둔하게.
‘그렇게까지 내 연줄이 필요한가? 그만큼이나 내가 중요했나?’
계속해서 맴도는 의문과 함께 약간의 고양감이 뒤따랐다. 황족의 드높은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는 그 찰나의 고양감이 그의 머리를 휩쓸었다.
그래, 그는 매번 이런 이유로 이따위 일을 벌여 댔던 것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열과 성을 다하도록.
그는 익숙한 충족감에 적셔졌다.
이 공녀도 이전까지 만났던 수많은 이들과 다를 것 없이, 보인 노력에 적절한 보상을 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걸로 그만이다. 굳이 더 생각할 필요 없다. 왜 이랬을까 하고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이 애도 결국 그런 보상을 원했을 게 분명하니까.
복잡하던 머리가 개었다. 처음부터 단순히 생각하고 넘겨 버리면 그만인 것을. 경직되었던 그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리며 올라갔다.
그는 한층 여유로워진 얼굴로 고개를 숙여 공녀를 확인했다.
“수고했다. 애리얼.”
그러고는 친절하게 이름을 불러 주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