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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7화 (7/264)

7화

목이 따가웠다. 찬물로 목을 축이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애리얼은 주변을 더듬거리며 손을 뻗었다. 무언가 손끝에 닿았다. 아쉽게도 차가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부드럽고 온기가 느껴졌다.

뭘까. 기분 좋은 감촉에 이끌려 애리얼은 그것에 손을 포개었다. 따뜻한 것이 손바닥을 타고 마주 겹쳐졌다.

포근했다. 슬며시 미소마저 떠오를 것 같았다.

“아주 좋다고 잡네.”

냉랭한 음성이 몽롱한 정신을 호되게 깨우쳤다.

애리얼은 경기를 하듯 움찔 떨며 눈을 떴다.

잠에서 벗어난 애리얼의 시야에는 익숙하다면 익숙해진 침실의 풍경을 배경으로 성격 나쁠 것 같은 인상의 금발 소년이 있었다.

비 내리는 밤에 개고생을 선사한 황실의 싸가지.

“왜, 유령이라도 본 것 같아?”

“……황자 저하……?”

“내가 누군지 알기는 하네.”

곱지 않은 말투가 지난밤을 떠올리게 했다. 애리얼은 그래서 더 의아했다. 그가 왜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 꼭 걱정이라도 한 것처럼.

“……저하께서 왜 여기에?”

“너 데려가려고 기다렸지. 일어났으면 이제 준비하고 나와.”

“데려가다니, 어디를요?”

“자세한 건 백작한테 들어.”

짧은 대화가 일방적으로 끝났다.

애리얼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그녀의 손 아래 있던 따스한 것이 매몰차게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빈 손바닥에 느껴지는 시트의 감촉뿐.

“……!”

애리얼은 제가 잡았던 것이 다름 아닌 황자의 손이었다는 걸 알아채고 다시 한번 소스라쳤다.

“그만 좀 놀라고 정신 차려.”

황자가 매몰차게 말을 내뱉었다. 달칵, 은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도 이어졌다. 황자는 순식간에 방 안에서 자취를 감췄다.

홀로 남게 되자 빈손의 감촉이 도드라졌다. 애리얼의 창백한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저렇게 칼같이 냉정하게 굴 거면서 왜 손을 내주고 있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까칠하고 독선적이고, 나쁜 쪽으로 종잡기 어려운 성격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내 휴대폰!’

침대에서 튀어 오르다시피 뛰쳐나간 애리얼은 잠가 둔 마호가니 서랍장을 바삐 열었다.

똑바로 넣어 둔 휴대폰이 그대로 눈에 담겼다.

‘제발 뭐라도 정보가 있어라!’

애리얼은 빌다시피 하며 곧장 전원 버튼을 눌러 화면을 켰다.

『스토리가 해금되었습니다. 자유로운 플레이가 가능합니다. 새로운 정보가 추가됩니다.』

『공략 대상에 대한 정보가 해금되었습니다.』

『도움말이 해금되었습니다.』

시스템 창이 주르륵 뜨며 새 알림을 띄웠다. 애리얼은 기쁘기 이전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드디어, 귀환의 첫걸음이 될 정보가 주어진다.

급해지는 마음을 찬찬히 추스르며, 애리얼은 가장 먼저 공략 대상에 관한 정보부터 확인했다.

『공략 대상

*[???]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

*[???]』

네 개의 칸. 애리얼은 그중 이름이 채워진 칸을 눌러 보았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직위: 황자(황제의 직계 중 차남)

*나이: 17세

*예민함에 주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말을 걸면 받아 줄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위치: [비활성 상태](활성화 가능)』

애리얼의 바람대로 황자는 공략 대상이 맞았다. 몰랐던 그의 이름까지 보고 있으니 극비 정보를 마주한 양 심장이 두근거렸다.

간밤의 고생으로 얻었을 것이 분명한 분홍색 하트 한 개에 눈물까지 날 듯했다. 말을 걸면 받아 줄 확률이 높다는 추가 설명도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말이라도 붙일 수 있구나.’

기껍게 여기며 프로필을 정독하던 애리얼의 눈이 제일 끝줄에서 멈췄다. 현재 위치라는 단어가 어쩐지 기이했다.

‘위치를 볼 수 있다는 건가?’

손가락은 자연스럽게 비활성 상태로 되어 있는 칸을 터치했다.

『공략 대상 추적을 활성화하시겠습니까?』

『네』 / 『아니요』

이어서 별 의문 없이 ‘네’ 버튼을 터치. 그러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떴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말을 걸면 받아 줄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위치: 허클리 백작저 본관 - 2층 복도』

간소화된 프로필과 함께 그의 위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보기 쉽도록 지도까지 떴다. 그의 얼굴이 작은 초상화의 형태로 건물 도면 위에 찍혀 있었다.

황자의 조그만 초상화가 띄엄띄엄 움직여 1층 응접실로 향했다.

‘이 정도로 자세하다니…….’

새로 생긴 기능의 유용함에 애리얼은 감탄이 나왔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이 기능이 공략의 난도를 확 줄여 줄 수 있을 것이었다.

들뜬 마음에 애리얼의 온 신경이 화면에 집중된 사이, 문밖에서 인기척이 다가왔다.

똑똑똑.

“아가씨, 일어나셨습니까? 들어가도 될까요?”

카논의 목소리였다.

애리얼은 다급하게 이불 속으로 휴대폰을 숨겼다.

“응. 들어와.”

허락을 내리자 카논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여행용 가죽 가방이 들려 있었다. 조금 의아하지만 애리얼은 당장은 시선을 거두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카논이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애리얼은 그제야 간밤의 일이 떠올랐다.

비 오는 정원, 날이 밝고서야 겨우 찾은 사파이어, 피로 누적으로 고단했던 몸, 황자의 앞에서 기절하고 만 순간까지.

그러고도 별로 아프지 않았다. 무리 없이 깨어난 게 천운이라 해야 하나.

“괜찮아.”

“괜찮으시다니 천만다행입니다. 역시 황실의 힘은 다르네요. 속도도 굉장히 빠르고, 효과도 엄청나고.”

“……황실의 힘?”

“아가씨께서 기절하신 걸 황자 저하께서 치료하셨어요. 저는 그쪽으론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아마 마도구나 마법을 쓰신 거겠죠.”

또다시 모르는 이야기가 머릿속에 부유했다. 애리얼은 머리가 멍해졌다.

당장 닥친 상황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애리얼은 당황스러워서 여러 질문이 입으로 튀어 나갔다.

“내가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가방은 또 뭐고? 어디 나가야 하는 거야?”

“저도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입장이라……. 중요한 건 백작님께서 말씀해 주실 거예요. 우선 옷부터 입죠. 얼른 준비해 올게요.”

카논도 황자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백작이 말해 줄 거라니. 도대체 백작과 황자의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간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질문을 꺼낼 새도 없었다. 애리얼이 황망히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카논이 외출용 옷을 꺼내 오고 있었다.

애리얼은 제대로 된 상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무작정 옷부터 입어야 했다. 그녀는 허둥거리면서 잠옷을 벗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줄줄이 밀려드는 요구에 이리저리 치여 정신이 없었다.

정장 원피스 위로 한 번도 입은 적 없던 두꺼운 케이프 코트가 걸쳐졌다. 멀리 나가는 것이 확실한 차림새가 되고 보니 애리얼은 더 의문스러워졌다.

‘황자와 관련해서 약속된 이야기가 따로 있었나?’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바쁠 일도 없지 않나. 애리얼은 이전의 기억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애썼다.

“백작이 그러던데. 네가 나랑 나이가 같다고.”

“너와 같은 나이시다. 아카데미에 가서도 마주치겠지.”

애리얼은 헝클어진 머리칼을 적절히 정돈하고 나서야 아카데미 생각이 났다.

일전 백작을 통해 고지받았던 아카데미 입학일은 4월. 늦어도 3월까지는 추가 등록을 마쳐야 했다.

편입은 연중 내내 가능하지만, 혹시 중간에 추천인을 낀다면 최대한 빨리하는 게 좋았다. 추천인의 지위에 따라 아카데미에서도 준비해야 할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애리얼의 눈이 황급히 탁상 달력을 찾았다. 흰 달력에 표기된 달은 2월. 오늘의 날짜는 2월 24일.

추가 등록을 하자면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이토록 서두른다는 건…….

‘황자 추천 편입.’

***

황실의 클래식 카는 막 출고된 차처럼 매끈하게 광이 났다.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온 흔적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황족을 직접 모시는 차량답게 관리가 철저했다.

그런 차에 오르려니 긴장이 됐다. 애리얼은 괜스레 제 신발만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차에 올랐다.

내부에는 흰색 가죽 시트가 씌워진 좌석이 마주 보는 형태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정방향 오른쪽 창가 좌석에 앉은 황자는 애리얼을 보지도 않았다. 눈을 감은 그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구겨져 있었다. 또 뭐에 기분이 언짢은 건지.

애리얼은 그의 기색을 살피다 조용히 맞은편 자리로 갔다. 그와 시선이 어긋나는 대각선의 가장 먼 자리.

애리얼이 좌석에 앉는 인기척을 느낀 그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파란 눈동자가 서슬처럼 드러나 그녀를 쓱 훑고 갔다.

아주 잠깐의 눈빛이었지만 애리얼은 조금 소름이 끼쳤다.

“출발해.”

단조롭게 던져진 황자의 명령에 클래식 카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역방향으로 앉은 탓에 애리얼은 조금 이질감이 들었다. 밖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창문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커튼을 걷자니 괜스레 황자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그는 잠을 청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빛이 들면 그가 싫어할까. 애리얼은 가만히 손을 내렸다.

차를 탔으니 벌써 정문은 지났을 것이었다. 애리얼은 막연히 짐작해 보았다.

깨어난 이래 계속 머물던 백작저를 나온 것이 애리얼은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그녀는 행선지라도 알고자 대각선 방향에 있는 황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하, 아카데미로 가는 건가요?”

“그것 때문에 그 비슷한 데 가는 거야.”

용기 낸 질문에 황자는 시큰둥하게 모호한 답변을 했다. 그의 안면에는 귀찮음이 신경질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저런 답이라도 해 준 걸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예상대로 백작은 애리얼에게 황립 아카데미의 추천 편입을 이야기했다. 쓰러졌던 딸에게 괜찮냐는 물음 정도는 있었으나 그게 다였다. 애리얼이 괜찮다고 대답하니 백작은 바로 다음을 진행했다. 황자가 추천서를 써 주기로 했으니 구태여 시간 끌 거 없이 바로 일을 처리하는 게 좋겠다고. 그녀는 그런 입장이었다.

이유인즉 편입 신청자는 제출한 서류가 충분히 검토될 때까지 대기해야 하는데, 그 기간이 최소 이틀에서 최대 열흘까지 되기 때문이었다.

급한 결정이니만큼, 진행도 급했다. 서두르느라 짐도 가방 하나만 챙겼다. 황실의 차량을 타야 해서 사용인도 데려갈 수 없었다.

그 탓에 애리얼은 홀로 집을 떠나야 했다.

‘백작은 단순히 편입생 등록만 하는 거니 혼자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애리얼은 피어오르는 약간의 불안을 누르며 품 안 깊숙이 가방을 끌어안았다.

스토리 진행을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아카데미로 갈 거라 생각하긴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게 될 줄이야.

‘하기야 집에 있어도 할 일은 딱히 없으니까.’

어차피 떠나야 할 거, 뜬금없긴 해도 객관적으로 보면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황자 쪽의 시간이 비는 일은 잘 없을 테니 온 김에 겸사겸사 처리하는 게 효율적이고.’

하나둘 이유를 찾자 또 금세 수긍이 됐다.

공짜도 아니고, 황자 때문에 개고생한 값이라 생각하면 애리얼은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이 기꺼웠다.

‘그러고 보니까 카논이 아까…… 황자가 날 치료해 줬다고 했지? 황실의 힘인가 뭔가로.’

이래저래 그로 인해 고생하고, 그로 인해 득을 본다. 어쨌든 이득이 더 큰 것 같으니 감사를 전해야 할까.

애리얼은 슬며시 황자가 앉은 곳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팔짱을 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자는 건 아닌데, 건드리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 같은 느낌. 감사 인사고 뭐고 듣기 싫어할 것 같았다.

프로필에 따르면 호감도 하나를 채워서 말을 잘 받아 준다긴 했는데.

‘그래도 감사 인사 정도는 좋게 봐 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반쯤 입을 연 순간, 그의 프로필에서 보았던 한 문장이 애리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예민함에 주의』

경고 문구처럼 붙어 있던 주의 사항. 그리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 그.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았다.

애리얼은 벌렸던 입을 꾹 다물며 그를 곁눈질했다. 대화를 원천 차단 하는 살짝 찌푸린 미간과 눈 감은 옆모습이 비스듬히 보였다.

‘그러고 보니 쟤 이름이…….’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프로필에 떠 있던 상당한 길이의 본명. 제국명과 동일한 라스트 네임과 황족의 고귀함을 상징하는 미들 네임. 그리고 고유 명칭인 퍼스트 네임.

‘스카이라.’

백작 공녀인 애리얼에겐 허락되지 않는 존귀한 황족의 이름이었다. 감히 입 밖에 냈다간 황자의 성격으로 보아 불경죄로 감옥에 보낼지도 몰랐다.

실수로라도 부르면 절대 안 됐다.

‘이럴 거면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게 나았겠어.’

기껏 알게 된 정보가 페널티인 꼴이라니……. 애리얼은 불만을 드러내며 입꼬리를 늘어트렸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마구 부르는데. 조금 억울했다.

애리얼은 살짝 원망스러워하는 눈초리로 그를 흘겼다.

그는 여전히 눈꺼풀을 꽉 닫고서 주변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차내의 조용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그 모습이 고상하기까지 해 보였다. 명화 같은 자태라 눈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볼거리기는 했다.

‘어차피 쟤가 눈 뜨고 입 열어 봐야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게 뻔하니까 오히려 나은가?’

생각하고 보니 애리얼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황자께서 그 예민한 성정을 알아서 죽이고 계시는 덕분에 평온이 유지되는 면도 있었다.

그래, 이게 차라리 안심된다. 애리얼은 풀어진 얼굴로 시트에 등을 기댔다.

‘잠이나 자자.’

애리얼이 그를 따라 고요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는데,

쿵!

둔탁한 소음이 차체를 크게 울렸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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