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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8화 (8/264)

8화

강한 진동이 동반되며 차체가 온통 요동을 쳤다. 차가 달릴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차가 정지해 멈췄다.

스카이라는 감았던 눈을 치뜨고는 화가 나서 중얼거렸다.

“미친놈.”

아는 인물을 만난 듯했다. 흘리는 욕설이 익숙해 보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커튼을 걷어 냈다.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이 바깥을 향했다.

상대도 그가 익숙한지 차창으로 다가와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바깥에 선 인물이 뭐라 입을 움직이자 스카이라의 입술이 벌어졌다. 하, 내뱉은 한숨이 짧고 거칠었다. 그는 손끝으로 비어 있는 옆자리를 상대에게 가리켰다.

차 안으로 드리우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다시 커튼이 쳐졌다.

덜컥, 소리를 내며 차 문이 열렸다. 애리얼의 맞은편이었다.

개방된 문에서 냉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애리얼의 다리로 찬 기운이 스쳤다.

오스스 소름이 돋는 바깥 기운을 몰고 낯선 인물이 들어왔다. 자다 일어난 양 부스스한 황금빛 머리칼이 어깨로 늘어졌다. 허리 밑으로 성글게 땋아진 금발이 흔들거렸다.

남자는 차에 바로 오르지 않았다. 그는 먼저 문틀을 잡고 허리를 숙여서 안쪽을 확인했다. 그을린 피부 위로 진한 황색 눈동자가 맹수처럼 움직였다.

남자는 처음에는 스카이라를 보고, 다음으로는 애리얼을 훑었다. 그는 낯선 이를 발견하고도 놀라지 않았다.

이내 그는 낮춘 몸으로 미끄러지듯 차 안으로 올라와 애리얼의 맞은편에 앉았다.

애리얼은 얼떨떨해 있었다.

갑자기 사고라도 난 것처럼 굉음이 울리더니 차가 멈췄고, 이제는 모르는 이가 제 앞에 앉아 있었다. 애리얼은 멍하게 뜬 눈으로 난입자를 바라보았다.

‘뭐 하는 사람이지?’

의문을 가진 순간, 코트 속에 숨긴 휴대폰이 진동했다.

우우우웅-

옷자락을 타고 오르는 떨림에 한 가지 생각이 애리얼의 머리를 강타했다.

‘공략 대상!’

중요한 인물임을 알게 되자 눈이 저절로 그의 얼굴을 향했다.

헝클어진 금발 밑의 과묵하게 굳은 인상이 위협적이었다. 표범 같은 눈동자가 조용하게 사나웠다.

애리얼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샛노란 홍채를 훔쳐보았다. 그 중심에 자리한 동공이 움직였다. 그가 시선을 느낀 것이었다.

미처 고개를 돌리지 못해 눈이 마주쳤다. 그때였다.

“내가 정상적으로 타라고 했지.”

화난 것이 분명한 스카이라의 으름장에 잠시 마주했던 시선이 곧장 어긋났다.

그가 스카이라를 보았다. 고집스럽게 다물렸던 입술이 벌어졌다.

“이게 편해.”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와 답했다.

스카이라는 골이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니가 편하든 말든, 하지 말라고.”

“왜. 너 정도면 다칠 일 없잖아.”

“그럼 뒤질 일이 생기면 안 할래?”

“차값은 물어 줄게.”

“내가 돈이나 차 때문에 이러는 거 같아? 니가 차로 뛰어내릴 때마다 개같이 흔들리는 게 기분 더럽다고.”

“방어술이, 너무 두꺼운 게 깨져서 그런 거야. 얇게 쳐.”

“누구 좋으라고? 너 좋으라고?”

“둘 다 좋자고.”

“작작 좀!”

짜증 섞인 고함이 터져 나왔다. 터지기 일보 직전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스카이라의 눈치를 보는 건 그가 아니었다.

애리얼의 눈이 불안하게 둘 사이를 오갔다. 안 그래도 예민한 성정의 황자인데. 화난 나머지 다 내리라고 하면 어쩌나.

흔들리는 시선을 느낀 건지 금빛 눈이 스카이라를 주시하다가 옮겨 왔다.

“저건 뭔데.”

그는 애리얼을 보면서 스카이라에게 질문했다.

“알 거 없어.”

칼같은 즉답이었다. 스카이라의 성격다운 대답이지만, 보기에 따라 애리얼에게 향한 상대의 관심을 끊어 내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혹은 설명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든가.

그도 세세하게 캐물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스카이라의 답에 수긍한 건지, 아니면 더 신경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건지.

오히려 애리얼이 궁금해져서 간단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

노란 눈이 조용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답을 줘야 할 입은 꾹 다물렸고, 시선은 삭막했다. 도저히 애리얼의 인사를 받아 줄 것 같지 않았다.

과묵한 그를 대신하여 스카이라가 첨언했다.

“네가 인사해 봐야 얜 안 받아 줘. 그런 놈이거든.”

대화의 시도를 차단해 버리는 답변이었다. 애리얼은 더 말할 구실이 없어졌다.

이제는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분위기는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어쩐지 잠이 와서, 애리얼은 눈을 감았다.

빨리 어디든 도착하기나 했으면.

***

감은 눈 밑으로 의식이 희미해졌다. 잠에 빠진 호흡은 미약하나 규칙적이었다.

레이신의 황금색 눈동자가 슬그머니 공녀를 담았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그는 바로 몇 분 전의 상황을 상기했다.

차창을 두드릴 때부터 보이던 낯선 얼굴. 차 문을 열고 보았을 땐, 무심코 길게 눈을 두고 말았던 여자.

가죽 가방을 품에 안고서 어정쩡하게 착석한 모습이 어리숙해 보였다. 긴장과 어리둥절함으로 뒤죽박죽된 표정. 길 잃은 개를 닮아 있었다.

스카이라는 종종 모르는 사람을 달고 다녔지만, 그중에 여자는 잘 없었다. 또래라면 더더욱 없었다.

딱히 여성을 싫어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성을 옆에 두지 않는 이유라면 아마도 황태자, 제 형 때문이 크겠지.

그런데 이번에는 여자를 데리고 있었다.

“누구야.”

레이신이 한 번 더 물었다. 보통 두 번 묻는 일이 없는 그였기에, 스카이라는 희한하다는 표정을 했다.

“왜 자꾸 관심을 가져? 아는 사람한테도 말 한번 안 붙이는 놈이.”

돌아오는 말투가 쌀쌀하며 사나웠다.

스카이라의 성격은 까탈스럽기 그지없으나 안면을 트고 허물없이 지내는 몇에게는 예외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닌 모양이었다.

레이신은 포기하고서 입술을 굳혔다. 어차피 그는 집요하게 달라붙는 성격도 아니었다. 오히려 관심이 없으면 없었지.

레이신은 공녀에게 향한 눈길을 거두고서 스카이라를 보았다.

고매한 황자의 옆모습이 심란함에 휩싸여 있다. 평소 신경질적이긴 해도 매사 시큰둥한 기색과는 달라 보였다.

저 여자 때문인가, 레이신은 짐작해 보았다.

낯선 소녀는 말 한마디 없이 고요해도 단박에 사람의 눈을 뺏을 만큼 미인이었다. 스카이라가 평소 미색에 관심을 두는 이는 아니라 해도, 혹시 몰랐다. 저 애 정도면 가지고 싶을 수도 있지 않은가.

‘황자비로 둘 참인가.’

그는 스카이라의 반응으로 미루어 추측해 보았다. 그러나 이내 부인했다.

스카이라는 저 애를 별로 아끼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스카이라가 저 애를 황자비로 두려 한다 해도 어차피 황태자가 빼앗으려 들 게 분명했다. 스카이라의 형제라는 인간은 그런 작자였다.

황자는 황태자에게 많은 것을 빼앗겼다. 정치적으로도, 정치 외적으로도.

레이신은 눈썹을 찡그렸다. 복잡한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파헤치는 데 진절머리가 났다.

황실의 사정은 황실의 사정이었다. 눈앞의 공녀가 거기에 휘말릴지도 모르지만,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

“일어나.”

무뚝뚝한 소곤거림이 귀에 닿았다. 조금이지만 다정하게도 들리는 목소리였다.

애리얼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루비가 박힌 금브로치와 볼로 타이가 보였다. 눈 바로 앞에 스카이라의 가슴팍이 다가와 있었다. 그의 흰 목선이 애리얼의 옆얼굴을 스치며 멀어졌다. 그녀를 깨우려고 일부러 이런 자세를 취한 듯했다.

예상치 못하게 가까운 거리였다.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스카이라는 개의치 않았다. 무심하게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애리얼은 머쓱해하며 주변을 확인했다.

차는 이미 멈춰 있었고, 앞자리는 비어 있었다.

‘도착…… 한 건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애리얼은 오래 앉아 있던 몸을 움직여 찌뿌둥한 무릎과 팔꿈치를 주물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품이 허했다. 애리얼은 의아하게 여기며 고개를 떨궜다. 그녀가 안고 있었던 가방이 차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자는 동안 스카이라가 신경 써 준 것 같았다.

그렇게 인지하자 애리얼은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어젯밤 이후부터, 그녀는 그에게서 자꾸 묘하게 상냥한 점을 발견하게 됐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애리얼이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저하.”

“그래.”

문이 열렸다. 스카이라는 애리얼에게 무어라 말 한마디 건네는 일 없이 빠르게 차에서 내려 버렸다. 그의 등 뒤로 늘어진 빳빳한 코트 자락이 금세 애리얼의 시야를 벗어났다.

열린 문으로 바깥의 풍경이 훤하게 보였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연청색이 하얗게 희미해지는 하늘. 그 아래로 타오르는 빛에 물든 상아색 건물이 겹겹이 쌓인 계단 위에 자리했다.

‘아카데미 건물일까?’

상상보다 더 웅장한 느낌이었다.

애리얼은 차 문 밖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바닥에 손을 뻗었다. 그녀가 바닥에 놓인 가방을 들었을 때 반대쪽 문이 열렸다.

“내리시지요.”

시종이 정중하게 그녀를 맞았다.

애리얼은 가방을 품에 안고서 차 문을 넘어 발을 내렸다. 혹시나 가방이 차를 긁을까 노심초사하며 조심했다.

좁은 내부를 벗어나니 물 냄새가 물씬 풍겼다. 차를 타고 오는 동안 또 비가 내린 모양이었다.

애리얼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시원한 공기가 스며들어 기도가 시원했다.

“공녀님. 이쪽입니다.”

애리얼은 부르는 소리를 따라 몸을 틀었다. 까마득하게 높은 성의 위용이 압도적으로 드러났다. 널따랗게 펼쳐진 계단 위쪽의 높은 문으로 스카이라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보좌관과 호위가 붙어 따라갔다.

그들과 반대로 계단을 내려온 시녀 한 명이 애리얼에게 다가왔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애리얼의 곁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애리얼이 작게 턱을 끄덕이니 그녀는 그대로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애리얼은 그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머리 위로 구름 그림자가 드리웠다. 흰 계단에 어스름한 자국이 느리게 움직였다. 구름 사이로 비치는 빛이 아직 밝아 그림자의 경계가 환했다. 몇 시나 되었을까. 완연한 밤이 되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 보였다.

계단을 차지한 그늘은 문 너머에서도 이어졌다. 커다란 창문은 하얀 하늘을 그대로 담아내 눈이 부시고, 바닥은 반대로 한층 더 어두웠다.

백색 대리석 위로 빛이 가져온 색의 대비가 선명했다. 애리얼은 신기하여 그 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애리얼. 이리 와 봐.”

애리얼은 한눈을 팔다가 고개를 들었다. 스카이라였다. 한참을 앞서간 그가 프런트와 같은 긴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애리얼이 다가가자 그는 클립에 끼워진 서류 묶음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편입에 필요한 서류. 나중에 내 직인을 찍어 줘야 하니까 잘 가지고 있어.”

“감사합니다, 저하.”

애리얼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가 내민 것을 받아 들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서류의 두께가 꽤 됐다.

애리얼은 그가 벌써 이만큼이나 준비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차가 다니는 시대니, 전화 같은 것으로 미리 사전 설명을 해 놓은 건지도 몰랐다. 상당히 신경을 써 주는구나 싶어 애리얼로서는 연신 놀라웠다.

한 손에 가방을 든 애리얼은 남은 팔로 서류를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양손 가득 물건을 든 그녀의 모습에 스카이라의 표정이 묘해졌다.

“짐을 왜 네가 들고 다녀?”

“……제 짐이라 제가 들었습니다.”

“장난해?”

그의 눈썹이 화난 듯이 추켜올려졌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심사가 또 틀어졌다는 양.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럼 문제가 없다는 거야? 내가 너한테 이까짓 짐까지 다 들고 다니게 할 줄 알았어?”

“…….”

“내가 너한테 그 정도도 못 베풀 사람으로 보이느냐고.”

“……짐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몰라서 그랬습니다.”

그도 그럴 게, 시녀는 애리얼과 신분 차가 크지 않았다. 하녀가 있다면 몰라도 시녀에게 맡기기에는 거북했다. 마찬가지로 시녀들도 왕족 미만의 계급에는 절대로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게 황성의 법도였다.

“그러면 차라리 나한테 맡겨.”

답답하다는 듯 대꾸한 그가 애리얼의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황족이 백작가 여식의 짐을 들어 주려 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의 아량이라 한들, 애리얼에겐 극도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있어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애리얼은 화들짝 놀라 몸을 물렸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들게요!”

“지금까지 뭐 들었어? 그거 직접 들지 말라고 말하잖아.”

“아녜요! 정말 괜찮아요!”

“…….”

거듭된 사양에 스카이라가 손을 거두었다.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한낱 백작가의 공녀가 황족에게 짐을 들리기는 어려운 게 당연하니 이해를 못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그녀의 반응이 불만족스러울 뿐.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그녀를 주시하다가 손가락을 까딱여 누군가를 불렀다. 근처에서 대기하던 시녀 중 하나가 곧장 걸어와 고개를 숙였다. 온통 엄숙한 표정을 짓는 시녀들 사이에 그나마 표정이 덜 굳어 있던 시녀였다. 유해 보이니 잠시 애리얼의 전담으로 붙여줄 생각이었다.

“허클리 백작 공녀다. 내 손님이니까 잘 모셔라.”

“예, 저하.”

시녀는 고개를 숙인 채 애리얼에게 다가갔다. 애리얼의 앞에 선 그녀가 공손하게 양손을 내밀었다.

“공녀님, 짐을 주세요.”

귀중품이라도 받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동작에 애리얼은 멈칫거리며 조금 주저했다. 그러나 결국 시녀의 손에 가방 손잡이를 넘겨주었다.

시녀가 손가락을 말아 가방을 쥐고서 기울였던 몸을 세웠다. 스카이라가 그제야 만족한 눈치를 보였다.

“따로 시녀든 하녀든 붙여 줄 테니까, 이 안에선 궁상맞게 그러고 다니지 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저하.”

“……그래.”

그는 아주 잠깐 주저하나 싶더니, 금세 대화를 끝내고 뒤로 돌아 버렸다.

“공녀를 안내해 줘라.”

“예, 저하.”

시녀에게 짤막한 명령을 하달한 그는 이내 멀찍하게 멀어졌다. 일이 바쁜지 매정했다.

애리얼은 덩그러니 남겨졌다. 자세한 설명이라곤 무엇도 듣지 못한 채였다. 얻은 건 서류 묶음뿐. 스카이라는 이걸로도 충분하다고 본 것 같았다.

“공녀님, 묵으실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짐을 든 시녀가 멀뚱히 선 그녀를 이끌었다.

정확히 어떤 장소인지도 모르는 거대한 성 안. 폭이 넓은 흰 복도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백색 계열로 통일된 내부에는 드문드문 은장식이 걸려 있었다. 백금일지도 몰랐다. 요란한 화려함은 없으나, 값비싸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신전 같은 웅장한 분위기가 애리얼에게는 압박으로 다가왔다.

애리얼은 이곳이 아카데미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귀빈을 모시는 곳이든가, 혹은 행정 업무를 처리하는 곳이든가. 어쨌든 예사 인물이 쓰는 장소는 아닐 것 같았다.

서서히 진해지는 노을빛이 창문을 넘어왔다. 걷는 옆으로 계속되는 풍경이 낯설었다.

전혀 모르는 곳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게 애리얼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급하게 진행되는지.

‘그래도 일이 잘못되진 않겠지? 아무래도 황자의 이름이 걸려 있는 일이니까, 아마도…….’

애리얼이 여러 걱정에 골몰한 사이, 앞서 걷던 시녀의 걸음이 멈췄다. 열쇠를 꺼내어 문을 연 시녀가 옆으로 비켜섰다.

“머무실 방은 이곳입니다.”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이고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석고를 조각해 내부를 장식하고 모서리에 금테를 둘러 놓은 객실은 화려했다. 백작저도 상당하게 꾸며 두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열쇠는 입구 테이블에 올려 두겠습니다.”

뒤따라 방으로 들어온 시녀가 장식물을 보관하는 유리컵에다 열쇠를 세워 넣었다. 애리얼은 시선을 돌려 테이블의 위치를 확인했다.

“저녁은 만찬장에서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방으로 가져다드리는 게 편하실까요?”

시녀는 말을 끊지 않고 안내 사항을 전해 왔다.

애리얼은 평소 집안의 사용인에게 하듯이 반말을 하려다 멈칫했다.

하녀와 다르게 에이프런을 두르지 않고 격식을 갖춰 흰옷을 입은 시녀. 특별 직위를 받은 극소수 평민 또는 하급 귀족 이상만 발탁되는 자리였다. 애리얼 본인과 신분 차가 크지 않아 말을 놓는 데에 약간 망설여졌다.

하지만 황자의 손님으로 온 이상 하대를 하는 것이 그의 품격을 지켜 주는 일일 터.

“방으로…… 부탁해.”

“그러면 한 시간 후인 일곱 시경에 준비해 드리면 될까요?”

“응. 그렇게 해 줘.”

“알겠습니다. 요구 사항이 있으시면 벽면의 벨을 눌러 주세요. 이곳의 모든 장소에의 출입은 공녀님께 한해 자유로우나 22시까지는 입실해 주시기 바랍니다.”

빠르게 설명을 마친 시녀가 카펫 위에 가방을 놓아두고는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인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혼자가 된 애리얼은 곧장 케이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녀는 가방도 풀지 않고 휴대폰부터 꺼내 들었다. 이어 근처 테이블에 서류 묶음을 놓아두고 액정 화면에 집중했다.

『공략 대상에 대한 정보가 해금되었습니다.』

『공략 대상

*[???]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

*[레이신 디 솔렘]』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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