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마지막 줄에 새로운 이름이 표기되어 있었다. 오늘, 황자의 차량을 무식하게 세우고 난입한 인물의 이름일 것이었다.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새로운 창이 튀어 올랐다.
『레이신 디 솔렘
*직위: 공자(황제와 크레시앙 대공의 사촌 형제인 솔렘 공작의 차남)
*나이: 17세
*무시에 주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 위치: [비활성 상태](활성화 가능)』
호감도는 오르지 않은 상태. 말을 걸었으나 곧장 무시당했고 추가로 대화할 기회조차 스카이라에게 차단당했으니 아쉽지만 당연한 결과였다.
그보다 눈에 들어온 건 그의 지위였다.
공작가 차남. 황자인 스카이라와는 육촌 되는 관계였다.
애리얼은 차 안에서 보았던 그의 진한 금발을 떠올렸다. 황족의 상징인 금발을 그도 지녔다. 아마 같은 조상을 두어서겠지. 스카이라와 격식 없이 대하던 걸 보면 계급도 높을 것은 당연지사.
애리얼은 제국의 계급도를 떠올려 보았다.
제국법에는 지고함을 침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계급의 두 가지 경우가 명시되어 있었다.
황실의 피와 개국 공신의 피.
두 혈통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존귀한 존재로 제국에서 오래도록 신성시되어 왔다. 단순히 귀한 피여서가 아니었다. 그 피로 발현되는 유전적 우월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왕국을 정벌하고 홀로 제국으로 세워진 이유. 혈통. 이어진 그 피의 흐름. 제국이 존립하는 이유와도 동일시되는, 유전으로 발현된 무력.
그래서 제국은 황권이 무척 강했고, 귀족 간의 계급 차도 극심했다. 그 탓에 아무리 귀족이라 한들 차별이나 상대적인 멸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급 귀족이라면 제국의 상부를 차지한 제국의 핏줄들에게 말 한번 붙이기 어려웠다.
레이신의 프로필을 보면 볼수록 애리얼의 머릿속에는 난항만이 그려졌다.
높은 계급. 바닥인 호감도.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눠 본 적 없는 빈약한 관계.
심지어 그의 주의 사항은,
『*무시에 주의』
제가 먼저 인사를 했지만 한마디도 답하지 않던 과묵함이 떠올랐다. 애리얼은 눈앞이 캄캄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접점이라도 있었던 스카이라와 달리 레이신, 그와는 만날 명분도 없었다. 이래 가지고 공략이 가능할까.
‘최소한 어디에 있는지라도 알아보자.’
애리얼은 희망을 바랄 요량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위치 정보를 활성화했다.
『2인 이상의 위치 정보를 활성화하였습니다. 간편화를 위해 통합 추적이 자동 활성화 됩니다. 앞으로 만날 공략 대상의 위치가 자동 활성화 됩니다.』
예상한 문장과는 조금 다른 게 떠올랐다. 시스템이 멋대로 변해 새로운 창을 여러 개 띄웠다.
건물 도면의 일부를 포함해 바깥까지 표현된 넓은 조감도. 애리얼이 있는 곳을 표시하는 검은색 화살표를 중심으로 뻗어 나간 지도에 초상화가 한 개 표시되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말을 걸면 받아 줄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위치: 황성 중앙관 - 1층』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 위치: 솔렘 공작저(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멀면 추적이 안 되네…….’
아주 만능인 기능은 아니구나 싶다가도 이게 어디냐는 생각이 들었다.
애리얼의 위치를 표시하는 검은 화살표에서 저 멀리, 다른 건물 안에 정지한 스카이라의 초상화가 도드라졌다.
멀다면 멀지만, 열심히 걸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스카이라가 있었다. 애리얼은 일단 레이신은 미뤄 두기로 했다.
‘스카이라가 있는 곳은…… 황성 중앙관.’
애리얼이 자신이 머무는 객실도 황성의 일부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난히 웅장한 내부 하며, 시녀까지. 사실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애리얼은 고민에 빠졌다. 시녀의 설명으로는 22시까지 주변의 출입이 자유롭다고 했었다. 그리고 호감도 하나를 채운 스카이라는 그녀와 대화를 해 줄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그를 만나기 위한 구실이었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 할까?’
내가 왜, 하고 단칼에 거절하는 스카이라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애리얼의 뇌리를 스쳤다. 그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으나 예상외로 몸이 움츠러들지는 않았다. 이미 겪어 본 반응이라 그런가 싶었다.
‘밥 말고 다른 구실도 괜찮지. 기왕이면 거절이 어렵고 대화가 길어질 만한 거로 구실을 만들자.’
마침 적당한 구실이 될 서류 묶음이 보였다.
스카이라의 말로는 편입 관련 서류라 했다. 혹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으면 그걸 빌미 삼아 그를 찾는 게 좋을 듯했다.
애리얼은 서류를 한 장씩 꼼꼼히 읽어 내렸다. 내용은 대부분 편입의 절차에 관한 것이었다. 간간이 어려운 단어가 보이긴 해도 이해 못 할 문장은 없었다.
트집 잡을 구석이 없어 서류가 술술 넘어갔다. 그렇게 마지막 장의 추천서만 남았다.
종이에는 이미 애리얼의 이름이 적히고 허클리 백작의 각인이 찍혀 있었다. 남은 건 황자의 직인이 찍힐 자리뿐.
‘이래서야 뭐로 구실을 만들지…….’
애리얼은 나름 심각한 얼굴을 하다가 서류를 놓았다.
오늘이 지나면 사적으로는 못 보게 될지도 몰랐다. 접점이 있을 때 최대한 호감도를 올려 둬야 했다. 기한은 고작 3년이었다.
답이 보이지 않았으나 일단 나서야 했다. 애리얼의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애리얼은 방을 나와 노을빛이 완연한 복도를 지났다. 색이 진한 걸 보니 곧 해가 질 모양이었다.
애리얼은 소매에 숨긴 휴대폰을 슬쩍슬쩍 봐 가며 움직였다.
스카이라가 있는 중앙관은 그녀가 있는 건물의 뒤편에 있었다. 들어왔던 로비를 통과해 반대편으로 나간 다음 중간 정원을 건너야 했다. 긴 복도를 왼쪽으로 한 번 꺾어서 직진만 하면 되니 나가는 길은 편한 편이었다.
문제는 중앙관으로 들어가고 나서부터.
‘뭐라고 하지? 편입 일자가 언제냐고? ……그거면 되나?’
호기롭게 뒷문을 지난 걸음이 확연히 느려졌다.
‘구실은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짜악!
매서운 마찰음이 잔잔한 공기를 갈랐다.
깜짝 놀란 애리얼은 조경수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녀는 연신 두리번거리다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전하께……! 전하께 실망했어요!”
날카로운 음성이 울분을 토했다. 그러더니 울먹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전하?’
높은 이를 부르는 것이 분명한 호칭에 애리얼은 본능적으로 이끌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몸을 낮추고 근처 벽에 붙어 대화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혹시 공략 대상일까?’
애리얼은 숨을 죽인 채 상아색 벽 모퉁이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조경수에 비스듬히 가려진 너머, 지는 해를 등진 두 인영이 보였다. 키가 큰 소년이 한 명. 그 앞에선 보닛을 쓴 소녀가 어깨를 떨고 있었다.
“아멜리아.”
“사과는 하지 않을 거예요! 불경한 줄은 알지만……!”
“불경한 짓인 줄은 아는구나. 그러면 이 행동으로 무슨 벌을 받는지도 아니?”
소녀의 어깨가 겁을 먹었는지 바짝 굳었다.
“……하, 하지만……! 전하께서 저를…… 제 마음을! ……그렇게 잘라 내시려고 하니…… 그래서!”
“머리가 나쁜 줄 알았는데, 갓난애처럼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거였구나.”
“……저는, 정말…… 그저 장난이셨던…… 건가요……?”
“…….”
“거, 거짓…… 거짓말이죠……?”
“…….”
“……전하…….”
“울지 마. 추잡해지잖아. 네 가문처럼.”
짝!
모욕을 들은 소녀가 매섭게 손을 치켜들고선 소년의 뺨을 내려쳤다.
반쯤 돌아간 그의 얼굴, 드러난 볼이 붉었다.
애리얼은 흔들리는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두 사람을 주시했다.
소년의 얼굴이 천천히 원위치로 돌아왔다.
노을이 가장 찬란한 순간, 소년의 금발이 휘날리고 조각처럼 매끈한 얼굴이 드러났다.
멀리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오드 아이가 소름 끼치게 아름다웠다. 새파란 바다색과 칼날 같은 은빛의 눈동자. 서로 상이한 색의 두 눈이 소녀의 보닛 너머로 향했다.
낯선 이를 감지한 그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이윽고 그가 정확하게 애리얼을 찾아냈다.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조마조마하던 애리얼의 심장이 덜컹거리며 놀랐다. 애리얼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서 입을 벌렸다. 그러자 소년이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대고는, 쉿, 조용하고 은밀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착실하게 그의 신호를 따른 모양새였다.
남자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는 애리얼에게 넌지시 미소를 지어 보냈다. 유혹하는 것처럼 요사한 미소였다.
우느라 고개 숙인 소녀는 그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 흐느끼는 소리만 점점 격해질 뿐이었다.
그는 손찌검에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소녀를 내려다보는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현혹적인 온기가 사라지고 몹시도 차가운 표정만 남았다.
“두 번이나 맞았네.”
“……전하…… 저는……. 저는…….”
“그래. 봐줄 테니까, 가.”
그의 나긋한 말투에 애리얼은 이상하게 스카이라가 생각났다. 목소리가 조금 닮았다. 하지만 주는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겉모습을 제외한 기색이나 성격, 모든 부분이 판이했다.
소녀는 끅끅 울음 참는 소리를 내가다 휙 돌아섰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빠르게 도망치는 걸음에서 두려움이 엿보였다.
저지르고 보니 무서웠던 거다. 그에게 손을 댔다는 사실이.
홀로 남은 남자는 저 멀리 달아나는 여자를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어디까지 가나 거리를 재듯이. 딱 그 정도의 감상만 담겨 삭막한 시선이었다.
이윽고 여자가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게 멀어졌다. 성난 듯 구르던 그녀의 발소리마저 희미해졌다.
정원이 조용해졌다. 먼 곳을 보던 그가 고개를 돌렸다. 미미한 웃음기가 어린 얼굴로.
애리얼은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위압적인 긴장감이 오금을 타고 올랐다.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혹시나 하여, 애리얼은 소매에 넣어 둔 휴대폰을 재빠르게 코트 안쪽으로 옮겼다.
해 질 녘의 하늘이 잔디밭을 진홍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몽환적인 풍경을 등지고 선 남자가 천천히 애리얼에게 다가왔다. 사박사박, 잔디가 밟혀 꺾였다. 길어진 그의 그림자가 조경수와 벽 모퉁이 사이까지 닿았다.
“추태를 보였네. 미안.”
목소리며 어조가 산뜻하고 가벼웠다. 살짝 허리까지 굽혀 그녀를 들여다보는 눈빛은 상냥했다. 그의 얼굴은 기이하리만치 아름다웠다. 색이 다른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사람이 아닌 것을 마주한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압도된 듯 굳어 버린다. 애리얼은 순간적으로 반응하는 걸 잊었다.
우우우웅-
코트 안 깊숙하게 숨겨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가 애리얼의 오른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애리얼의 손등에다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손등에 닿은 그의 이마가 델 듯이 뜨거웠다. 열이 나는 듯했다.
“너랑 길게 말해 보고 싶은데, 내가 지금 몸이 별로 안 좋거든.”
그가 화끈거리는 이마를 애리얼의 손에 댄 채 나지막이 속삭였다. 흘러내린 금발이 애리얼의 손등을 간질였다. 손끝으로는 한숨 같은 숨결이 흘렀다.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어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애리얼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가 애리얼의 손등에서 이마를 떼고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아름다운 얼굴로 애리얼의 손을 붙들어 쥐고서 생긋 웃어 보인다. 아까 소녀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오늘 본 건 비밀로 해 줘.”
내뱉는 중저음이 살갑게 부드러워 미성처럼 들렸다. 그는 초면인 애리얼에게 분에 넘치도록 다정하게 굴었다. 그녀가 그의 치정을 엿본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애리얼의 입술은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대답도 질문도 하지 못하고, 애리얼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의 오드 아이가 휘어져 감기며 완연한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그의 뒤로 노을의 마지막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찬연하게, 그의 후광으로 빛났다.
애리얼은 숨이 막혔다. 만들어 낸 것만 같은 순간에 절로 마음이 동요했다.
애리얼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차분하려고 애썼다.
그가 휘었던 눈을 원상태로 떴다. 그랬는데도 오히려 미소가 진해지는 느낌이었다.
“다음에 보자.”
담백한 인사를 건네며 그가 조심스럽게 애리얼의 손을 놓았다.
애리얼은 그에게 끌려갔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떨구었다.
남자는 애리얼을 향해 또 한 번 활짝 웃어 주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서서히, 그러다 완전히 멀어졌다.
그는 마지막까지 애리얼에게 뜻 모를 친절함을 고수했다. 완전히 초면인데 기이했다. 아니면 초면인 이에게만 이렇게 구는 걸까.
고작 이 잠깐의 시간 동안, 애리얼은 울며 뛰어간 보닛을 쓴 소녀…… 그녀의 심정만은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빠져들어 현혹될 것만 같은, 위험한 분위기. 잔혹한 말을 뱉다가도 너그러워져 매달리고 싶게 만드는 그의 이중적인 상냥함. 남자는 단시간에 사람의 마음을 마구 뒤흔들었다.
애리얼은 소녀가 맹목적으로 매달리다 화를 내고 날뛰던 모습을 이해하게 되었다. 알 수 없는 순간 속의 유일하게 알 것 같은 감정이었다.
그의 이마에 닿았던 피부가 아직도 뜨거웠다. 애리얼은 바짝 말라 버린 입 안을 혀로 훑었다.
섬세한 움직임에 날을 세우는 감각. 그로 인해서 서서히 고조되는 긴장감. 일시적이어도 강렬했다.
그는 이런 일에 능숙해 보였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상황을 되짚던 애리얼은 돌연하게 깨달았다.
남자가 행한 것이 명백한 유혹이었음을.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