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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10화 (10/264)

10화.

얼이 빠지는 경험을 하고 나자 머리가 몽롱했다.

그가 왜 유혹을 했는가. 그에 대한 답은 섣불리 짐작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걸 떠나 방금의 일이 현실성 없게 느껴졌다.

떠난 그를 따라 노을이 완전하게 자취를 감췄다. 해가 떨어지고 어둠이 깔린다. 빛을 머금어 밝았던 잔디도 거무죽죽해졌다.

애리얼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애리얼은 휘휘 고개를 저어 그의 잔상을 흘려보냈다. 혼을 쏙 빼 놓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하? 그렇게 불렸었지?’

애리얼은 뒤늦게 진동했던 휴대폰을 떠올리며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을 옮겨 놓아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그에게 홀린 사이 떨어뜨리거나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식으로 상대에게 휴대폰을 들키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공략 대상에 대한 정보가 해금되었습니다.』

『공략 대상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

*[레이신 디 솔렘]』

켜진 화면, 시스템 창의 최상단에 새로운 이름이 추가되어 있었다.

제국명을 라스트 네임으로 둔 황족의 명칭. 애리얼은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느꼈다.

애리얼은 떨리는 심정으로 새 이름을 눌렀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직위: 황태자(황제의 직계 중 장남)

*나이: 18세

*모욕에 주의

▷당신을 향한 호감도: [확인 불가](일시적인 오류로 호감도 확인이 지연됩니다.)

▷현재 위치: 황성 중앙관 - 1층 복도』

“……뭐?”

당황스러운 나머지 의문사가 머리에만 머물지 않고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호감도 확인 불가에 일시적인 오류. 하필이면 이해하기 어려운, 유혹이라고 추측할 만한 행동을 한 사람의 프로필에서.

찝찝한 감상이 애리얼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왜 하필, 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시스템에서마저 특이 사항을 보이는 그가 꺼림칙했다.

지도에서는 그의 초상화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눈이 절로 그를 좇았다.

황태자, 데본시아. 스카이라의 형. 애리얼은 알게 된 정보를 곱씹었다.

프로필 창의 내용에 골몰하던 애리얼은 문득 화면 윗부분에 자리한 알림을 발견했다.

[!스토리]

[!도움말]

‘아, 맞아.’

스카이라와 조우한 이후 스토리와 도움말이 해금되어 있었다. 공략 대상에 관한 정보를 확인하느라 뒷전이었던 정보였다. 미리 확인했어야 했는데 급히 이동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애리얼은 숨겨 둔 비상금을 발견한 마음으로 차례차례 항목을 터치했다.

『스토리

*스토리는 기본적으로 당신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으며, 분기를 나누는 큰 선택지만 가끔 주어집니다. (한번 선택한 선택지는 무를 수 없으니 유의해 주세요.)

*자유로운 플레이를 누려 주세요!』

『도움말

▽기본 도움말

▽특별 엔딩에 관하여』

스토리 알림은 별거 없었다. 선택지가 나오면 분기라는 것만 기억하면 될 듯했다.

그보다 눈여겨볼 것은 도움말. 특히나 두 번째 도움말이 애리얼의 시선을 끌었다.

‘특별 엔딩에 관하여…….’

특별 엔딩은 애리얼이 원래 세계로 가기 위한 공략의 최종 목표였다.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정보였다.

글자를 누르는 손가락이 약간 떨렸다.

『▽특별 엔딩에 관하여

*공략 대상 전원의 호감도가 ♥♥♥ 이상일 때에만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생일(1월/1일)에 일어납니다.

*[잠금]

*[잠금]

*[잠금]

(스토리 진행에 따라 잠금이 해제됩니다.)』

잠금. 앞길을 막는 벽 같은 표현에 애리얼은 한 번 헛숨을 들이켰다.

집중한 탓에 시야가 무척 좁아졌다.

비록 두 줄뿐이라도, 구체적인 조건을 마주하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모든 공략 캐릭터의 호감도가 ♥♥♥ 이상일 때의 생일날.’

그때 특별 엔딩이 이뤄진다. 그 두 줄만으로도 충분한 수확이었다.

목표가 명확해졌다. 지금부터 생일이 세 번 지나가기 전에 모두의 호감도를 하트 세 개 이상으로 늘리는 것.

여태 만난 공략 대상들의 면면을 따져 보면 전망이 밝지는 않았다.

‘성격이 만만한 애가 없는데. 아직 안 나온 애는 좀 나으려나?’

애리얼은 곰곰이 가능성을 따져 보다 그만 생각을 갈무리했다. 미리 사서 걱정하기보단 현재에 집중하는 게 나았다.

애리얼은 특별 엔딩에 관한 내용에 앞서 띄워져 있던 기본 도움말을 열었다.

『▽기본 도움말

*각 캐릭터의 프로필을 통해 호감도와 위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공략 대상의 호감도를 올리면 스토리가 자동으로 진행됩니다.

*엔딩을 보기 위해선 호감도 ♥♥♥ 이상의 공략 대상이 최소 한 명은 존재해야 합니다.

(스토리 진행에 따라 도움말이 추가됩니다.)』

예상보다 담백하고 예측 가능한 정보가 나열되었다. ‘기본’이라는 단어에 충실한 내용이었다.

눈여겨볼 부분이라면 세 번째 줄, 엔딩의 최소 조건. 공략 대상 한 명의 호감도 ♥♥♥ 이상.

바꿔 말하면 한 명이라도 호감도 ♥♥♥ 이상이 되면 엔딩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특별 엔딩 말고 다른 엔딩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거겠지?’

까다로운 가능성에 애리얼의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애리얼은 심각한 표정으로 경우의 수를 셈했다.

한 명의 호감도가 너무 특출나면 그쪽의 엔딩을 보게 될 터. 최대한 누구 하나에게 치우치지 않는 균형적이고 수평적인 공략이 필요했다.

애리얼은 다시 한번 공략 대상 프로필 창을 켰다.

『공략 대상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

*[레이신 디 솔렘]』

비어 있는 세 번째 자리.

지금까지 나온 공략 대상들은 모두 혈연으로 엮여 있었다. 남은 한 명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고위 계급, 제국에서 정한 귀한 혈통, 그리고 또…….

“애리얼?”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음성이 애리얼의 등을 넘어왔다.

애리얼은 흠칫 놀라면서도 휴대폰만은 빠르게 코트 속으로 숨겼다.

“여기서 뭐 하는 건데.”

조금 멀리서 들리던 목소리는 이제 귀 뒤를 스칠 정도로 다가와 있었다. 애리얼은 굳어 있던 표정을 짐짓 태연하게 바꾸고는 고개를 돌렸다.

스카이라가 그녀와 한두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정지했다.

“아……. 안녕하세요, 황자 저하.”

애리얼의 입에서 꽤나 어리숙한 인사가 날아갔다. 스카이라가 고개를 기울이며 피식 김빠지는 소리를 냈다.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맹한 얼굴이나 하고.”

애리얼 딴에는 잘 갈무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소 바보 같은 표정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해명이라도 해 볼까 했으나, 스카이라의 추궁이 더 빨랐다.

“저녁 안 먹고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어……. 날씨가 좋아서요.”

“해가 졌는데 날씨가 뭐가 좋아. 어두운 게 취향이야?”

“아뇨……. 그냥 밤하늘이 좋아요.”

“그래서 저녁도 먹지 않고 나와 있는 거야?”

“네. 별이 보이는 게 낭만적이라서요.”

“그래? 그럼…….”

스카이라는 뭔가 말하려다 멈추고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목에 뭐라도 걸린 듯이 이를 깨물었다. 내뱉고 싶은데 도저히 내뱉을 수 없는 어떤 것을 삼키는 느낌이었다.

왜 저럴까. 애리얼이 궁금해하며 바라보니 그의 뺨이 옅게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부끄럼을 타나? ……뭐 때문에?’

묘한 호기심이 피어오를 즈음, 그가 괜스레 화난 얼굴을 해 보였다.

“싸돌아다니지 말고 적당히 들어가.”

말마디에 힘이 잔뜩 배어 있었다. 치부라도 들켜 무마하려는 양 어색한 발음이었다. 그러나 애리얼을 두고 뒤도는 움직임은 여느 때처럼 냉담하고 매끄러웠다.

애리얼의 뇌리로 그의 호감도가 스쳐 갔다. 하트 한 개. 빈약한 그 호감도가.

‘……보내면 안 돼!’

애리얼은 운 좋게 마주한 이 우연한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멋대로 손이 뻗어져 그의 팔목을 붙들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다부진 팔뚝이 움찔 떨렸다.

다행히 뿌리쳐지지는 않은 채로, 그의 걸음만 멈추었다.

이내 아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스카이라가 시선으로 질문을 던졌다. 지금 뭐 하는 거냐, 그는 애매하게 찡그린 인상으로 애리얼을 내려다보았다.

애리얼은 그 기세에 지지 않고 다급히 만들어 낸 용건을 꺼냈다.

“같이 저녁 먹어도 돼요? 혹시 아직 안 드셨으면.”

“뭐?”

“혹시 폐가 안 된다면 저하와 같이 저녁을 먹고 싶어요.”

말을 들은 그의 얼굴이 굳었다. 애리얼도 자신이 입에 담은 말이 다소 무리수라는 걸 느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수평적 접근이고 자시고 기회 자체가 별로 없을지 모른다. 그런 마음이 급작스러운 행동을 이끌었다. 애리얼은 스카이라의 손목을 꼭 붙들고서 우직할 정도의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안면에 의아함이 짙어졌다. 마치 애리얼에게 지금 제정신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화났다기보다는…… 정말 의아해하는 그런 종류.

그래서인지 그는 애리얼을 뿌리치지 않았다. 말로 밀어내지도 않았다. 외려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뭐…… 네 가문의 대접이 섭섭지 않았던 것도 맞으니까. 오늘 저녁 정도는…….”

“감사합니다, 저하!”

말끝을 흐리는 애매한 허락이었으나, 애리얼은 그것만으로도 날 듯이 기뻤다. 그녀는 휘둥그레 눈을 뜨고서 기운차게 대답했다.

스카이라를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애리얼은 진실로 좋아하는 티를 확연히 내보이며, 개가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굴었다. 미소도 없이 그랬다.

오히려 스카이라가 쑥스러워질 만큼.

“좀 놓고 말해.”

스카이라는 괜히 퉁명스러워져서 뒤늦게 붙잡힌 팔을 빼냈다. 그의 심기를 읽은 애리얼이 재빠르게 손을 물렸다.

그녀가 순순하게 물러나자 스카이라는 또 이상하게 화가 났다. 큰 저항 없이 떨어져 나가는 자그만 손이 괘씸했다.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이해되지 않는 이중성이었다.

애리얼을 내려다보는 파란 눈동자에 심란함 같은 게 모여들었다. 여유가 줄어들고 쓸데없는 감정을 부르는, 미지의 불편함.

“앞으로는 나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

스카이라는 쌀쌀맞게 경고를 뱉어 냈다. 그런데도 애리얼은 눈썹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았다.

“네. 이젠 안 그럴게요. 죄송합니다.”

그녀는 담담하며 공손했다. 화를 낼 줄 모르는 이처럼.

거기에 또 스카이라의 예민한 심사가 뒤틀렸다. 스카이라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따라오라는 말도 없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먼저 떠나는 발길을 쫓아갔다. 사박거리며 잔디를 밟는 소리가 스카이라를 뒤따랐다. 스카이라는 그 소리가 왜인지 모르게 좋았다. 멀어지는 저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다급해진 빠른 발소리가 기꺼웠다.

감정이 널을 뛰고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화가 나면서도 기이하게 설렜다.

짜증 난다, 짜증 나……. 계속 되뇌면서 그는 알게 모르게 걷는 속도를 조금 늦추었다.

따라가는 애리얼의 걸음에 약간이지만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 순간, 팔랑거리던 코트 자락의 안쪽 주머니, 숨겨진 휴대폰이 진동했다.

우우우웅-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합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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