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애리얼은 황성의 중앙관 초입에서 간단히 신원을 밝히고 허가증을 받았다. 은색의 내빈용 임시 출입증에는 스카이라의 서명이 적혔다. 오늘 하루 동안 애리얼의 중앙관 출입을 허락한다는 증명이었다.
“하루면 좀 짧은데.”
애리얼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이미 해도 다 떨어진 시각이었다. 머물 수 있는 건 몇 시간 안 될 거였다.
황성, 특히나 황족이 주로 머무는 중앙관은 출입 통제가 엄격했다. 아무리 황자의 보증을 받는 손님이라도 검증을 확실히 해야 했고, 오랜 기간 머물 수 없었다.
그래도 황족의 재량에 따라 조절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짧은 시간만 허락받은 건 스카이라가 애리얼에게 큰 신뢰를 두고 있지 않다는 의미였다.
‘아직 하트 한 개……. 신뢰를 얻기엔 모자라긴 하지.’
휴대폰을 확인하지 못한 애리얼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었다.
아쉬움에 괜히 서명이 적힌 아랫부분을 문질러 댔다. 스카이라가 친히 써 준 가지런한 필기체가 도드라지게 시야로 들어왔다.
보고 있자니 애리얼은 상당히 긍정적인 의문에 휩싸였다.
‘내가 아직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게…… 맞나?’
반대로 생각하면 스카이라는 본 지 고작 이틀 정도 된 사람에게 이만큼의 특권을 준 것이기도 했다.
애리얼은 옷 속에 숨긴 휴대폰을 더듬었다. 뭔가 확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뭔가가 변해 있을지도 모른다.
“애리얼.”
묵직하게 내려앉는 목소리에 애리얼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스카이라는 언제나 꽤 엄중한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조금 들고서 바라보면, 그는 무뚝뚝하다 못해 조금 싸늘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지금처럼.
“따라와.”
딱딱한 명령이 떨어졌다. 같이 식사하러 가면서 쓰기에는 차가운 어법이었다. 그래도 그의 목소리엔 이전처럼 조롱의 기미는 없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스카이라는 말만 툭 던지고 앞장섰다.
애리얼은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갔다.
빠른 걸음이 흑백 격자무늬 바닥을 가로질러 복도로 들어갔다.
스카이라는 백작저에서 앞서던 것과는 달리 차분한 걸음이었다. 애리얼은 이전처럼 그를 쫓느라 달릴 필요가 없었다. 가끔 주변을 눈에 담는 여유도 보이며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
발소리가 옅어지는 벨벳이 깔린 복도였다. 황족의 내밀한 주거지임을 알리듯이 고풍스럽고 엄숙했다.
‘이런 데 들어가도 될까?’
걱정을 하게 만드는 귀한 미술품들이 걸려 있었다. 몸짓 하나하나까지 전부 감시되고 있을 것만 같은 장소였다.
애리얼은 양손을 곱게 모으고 두리번거리던 시선마저 앞으로 고정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혹시나 책을 잡힐 수도 있었다.
‘좀 더 철저히 예를 갖추고 지나자. 여긴 황성이니까.’
고요한 가운데, 애리얼은 목적지도 모른 채 그의 뒷모습을 앞세우고 걸었다. 돌연하게 그가 멈추기 전까지.
길을 가로막듯이 문이 열렸다. 금장을 두른 백색 문짝이 벽처럼 세워졌다. 그 뒤로 서서히 인기척이 나타났다.
앞서던 그의 등이 굳었다.
“스카이라.”
나직한 발음. 안개같이 몽롱하고 고상한 음성.
애리얼이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그녀는 홀린 듯이 스카이라의 등 너머로 고개를 기울였다.
문 뒤로 스카이라와 비슷한 빛깔의 금발, 비슷한 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난입한 인물은 걸음을 옮겨서 문을 반쯤 닫고는 빈 복도 자리를 차지했다.
애리얼의 눈이 두어 번 빠르게 깜박거렸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그 남자다. 조금 전에 정원에서 본 치정의 주인공.
그가 아까보다 훨씬 흐트러진 차림으로 나타났다. 침의로 쓰는 검은색 가운을 맨몸에다 대충 걸치고, 깔끔하던 금발은 조금 산발이 된 모습으로.
남자가 미소를 띠며 앞을 가로막았다. 작은 움직임에 허술하게 입은 가운이 벌어졌다. 비단옷이 미끄러지며 덮여 있던 그의 쇄골이 희게 드러났다.
애리얼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시야가 바뀌고, 스카이라의 손이 보였다. 그의 희고 긴 손가락이 옅게 떨리다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프다더니…….”
“응. 몸이 좀 별로네.”
“그러면 들어가서 쉬어. 그 꼴로 기어 나와 있지 말고.”
스카이라가 성난 듯 사나운 기세를 내비쳤다.
데본시아는 너그럽게 웃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가 가운의 허리끈을 느슨하게 풀었다가 다시 조여 묶으며 풀어진 앞섶을 천천히 여민다. 험상궂은 얼굴로 노려보는 제 동생을 놀리듯이, 느릿하게.
“네 뒤에 걔는…… 새 황자비?”
데본시아가 넌지시 던진 질문에 스카이라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황태자를 앞에 두고서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가 자제심을 끌어모아 겨우 억누르고 있는 게 애리얼의 눈에도 보였다.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지?’
앞을 가로막힌 정도로 저렇게 분노하는 건 이상했다.
몇 초 침묵한 끝에 부들거리던 스카이라의 주먹이 겨우 진정했다.
“아니.”
“그래?”
“백작과의 거래로 데려온 거 뻔히 알잖아. 유능한 정보원은 싹 다 데려가 거느리는 주제에 몰랐다는 소리 하지 마. 쓸데없는 추측도 하지 말고.”
“그래. 근데…….”
데본시아가 몇 걸음 다가와 스카이라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들여다보았다. 웃을 듯 말 듯 애매한 입꼬리로 고개를 기울이며, 속을 파헤치듯이.
“네 눈을 보면, 이상하게 자꾸 의심이 들거든. 사심…… 같은 게 보여서.”
사심. 그 단어에 실금이 그어지는 미간과 동요로 물결치는 파란 홍채. 스카이라는 그의 눈앞에서 확연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데본시아가 즐거운 듯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정말 아니야?”
“아니라고 했잖아.”
경계하는 스카이라를 향해 데본시아가 한 발 더 가까이 거리를 좁혔다. 그가 고개를 기울인 모습 그대로, 스카이라의 귓가에 다가갔다.
“그러면.”
갑작스럽게 목소리를 줄인 데본시아가 은밀하게 소곤거렸다. 눈동자에는 뒤에 있는 애리얼을 담고서, 스카이라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도발적으로.
“내가 뺏어도 돼?”
“입 다물어.”
스카이라가 상당히 거친 어투로 대응했다. 그 목소리에 놀란 애리얼이 바닥만 보던 고개를 들었다.
데본시아는 화난 게 확연한 스카이라를 관찰하며 벽에 기대서더니 키득거리며 웃었다. 새된 호흡 소리가 섞인 게 꼭 어린아이를 귀여워하는 것 같은…… 깔보는 게 확실한 코웃음.
둘 사이엔 부정적으로 촉발된 감정들이 거세게 오갔다. 서슬 퍼런 눈동자가 깔보고 증오하며 눈빛을 주고받는다. 말도 없이, 한 명은 웃음까지 띠고서. 그렇게 살벌하다.
“뭘 하든 알아서 해. 평소 하던 대로 저급하게 굴러먹든가.”
“그렇게 날 비하해 봐야 너만 더 비참해지지 않아, 스카이라?”
“닥쳐. 이 가벼운 새끼.”
“형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넌……!”
열받은 스카이라가 울컥 욕을 터트리려다 겨우 참아 냈다. 하아, 그가 분노에 떨리는 숨결을 깊게 들이켰다 뱉으며 심호흡했다.
“공녀.”
스카이라의 잔뜩 억눌린 음성이 음산하게 흘러나왔다. 바짝 긴장한 애리얼은 바로 알아듣고서 용케 빠른 반응을 보였다.
“네, 저하.”
“이름으로 불러 줘야지. 애리얼, 하면서.”
그러나 그마저 황태자가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다. 하나하나 제 동생의 신경을 건드리며,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애리얼의 눈이 데본시아와 마주쳤다. 선명하게 다른 색으로 물든 그의 두 눈동자가 묘한 분위기를 흘리고 있다. 정원에서처럼.
“공녀.”
또다시 무겁게, 스카이라가 애리얼을 불렀다. 두 눈은 여전히 제 형제를 사납게 노려본 채.
“일단 방으로 돌아…….”
“애리얼, 나랑 있을래?”
데본시아가 곧바로 말을 끊어 버렸다. 스카이라의 얼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덧씌워졌다. 차갑게 얼어붙은 그의 안면에 증오 이상의 감정이 너울댔다. 그 순간에 찾아온 정적은 공포 그 자체였다.
애리얼은 자신을 향해 뒷모습만 보이는 스카이라와 은근하게 눈길을 보내는 데본시아를 번갈아 보았다.
“……방으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그녀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대답했다.
스카이라의 경직된 어깨가 미세하게 느슨해졌다. 과도하게 힘이 들어간 주먹의 떨림도 멈추고, 말아 쥔 손가락마저 풀렸다. 자신을 따라 주는 애리얼의 대답 덕분에 그는 끓어오른 감정을 억지로 참아 낸 거였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황태자가 애리얼을 향해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다 곱게 올라간 입술을 열었다.
“식사가 아직이라며. 나도 안 먹었는데, 같이 먹을래?”
“…….”
“응? 애리얼.”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래. 그러면 내 방으로 와.”
데본시아가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진행했다. 부탁도 명령도 아닌 은근한 태도가 상냥하고 거북했다. 그는 이런 일에 도가 텄는지 물 흐르듯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황태자의 거듭된 요구를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지위인 백작가의 여식. 애리얼은 제 처지 때문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가 굳은 사이, 스카이라가 황태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쾅!
그가 커다란 소음이 나도록 데본시아를 벽에다 밀어붙였다.
“아프단 새끼가! 쉬지도 않고 어떻게든 나를 엿 먹이겠다고!”
“프흐흐…….”
일그러진 스카이라의 얼굴을 마주한 데본시아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헝클어진 머리칼. 열로 붉어진 눈가. 은실로 자수가 놓인 옷깃과 묶었던 허리끈이 늘어져 가운이 흘러내린 꼴. 데본시아는 아픈 게 확연한 모습으로 계속 스카이라를 자극했다.
데본시아는 애리얼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굴지만, 진심이 아닐 것이다. 그에게 애리얼은 단지 매개일 뿐이었고, 구실에 불과했다.
황태자 데본시아에게는 동생을 기분 나쁘게 만들 생각밖에 없었고, 황자 스카이라는 그의 의도대로 예민한 성정을 마구 자극당해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이상한 사람과 이상한 상황.
“착하게 굴어야지, 스카이라.”
“역겨운 놈…….”
나긋하게 또는 으르렁거리며, 조롱과 비난이 오갔다.
황태자와 황자는 기름과 산소처럼 작은 요소만 있어도 활활 타오르는 화마였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