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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12화 (12/264)

12화

칼날이 오가도 놀라지 않을, 날 선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팽팽한 집안싸움의 현장에 이물질로 낀 애리얼은 눈치만 보는 신세에 불과했다.

‘그래도 데본시아는…… 감정 변화가 크지 않은 편인 것 같아. 반대로 스카이라는 너무 날이 서 있고.’

상황을 무마하려면 그녀가 달래야 하는 쪽은 스카이라였다. 여기서 같은 공략 대상이라고 데본시아를 신경 썼다간 스카이라가 폭발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데본시아가 스카이라를 너무 무시하고 드는 것이 애리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하께선 현재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침착하게, 또 한편으론 단호하게 그녀가 말을 꺼냈다.

서로를 죽일 기세로 마주 보던 둘이 고개를 돌렸다. 애리얼은 쏘아지는 시선을 피하며 허리를 숙였다.

“제가 함께하면 전하께서 쉬시기 어려우시므로 본의 아니게 무례를 끼칠 듯해 염려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도 될까요?”

애리얼의 입에서 나온 건, 아무리 잘 포장한 변명이라 한들 황태자의 권유를 거절하는 일이었다.

한데 놀라 굳은 것은 오히려 황자인 스카이라였다. 미끈한 미소를 매단 황태자는 흥미로 눈을 빛냈을 뿐이다. 인자하고 너그럽게도.

“내가 괜찮다는데도?”

“죄송합니다. 부디 너그러이 봐주세요.”

애리얼은 물러섬이 없었다. 곱게 두 손을 포개어 정중한 자세를 취하고 끝까지 거부를 표했다.

“그래. 어쩔 수 없구나. 너는…….”

결국 그녀의 뜻에 수긍하는 데본시아의 말끝이 아련하게 흩어졌다. 어딘지 의미심장하게.

애리얼이 굽힌 허리를 원상태로 폈을 때, 황태자는 재차 풀린 가운을 여미며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대로 스카이라의 눈은 애리얼을 향했다. 줄곧 등을 보이며 제 형제에게만 발끈하고 집중하던 그 얼굴이 방금의 말로 새겨진 충격을 고스란히 보였다.

의아해하고 놀란 그의 얼굴. 그 표정. 확장된 눈이나 슬며시 벌어진 입술 같은 것.

‘화내지는 않네. 다행이다.’

애리얼은 자신의 행동이 그를 자극한 게 아니어서 안심했다. 긴장감이 풀어졌다. 그녀의 입꼬리가 약간이지만 올라갔다.

스카이라는 애리얼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자그마한 표정 변화에 별안간 그에게 심장이 조이고 얼굴에 열이 뻗치는 생소한 경험이 닥쳐왔다.

놀란 데 불과하던 스카이라의 낯이 스멀스멀 다른 감정을 담으며 구겨졌다. 화난 것과 진배없이 험해졌다.

“왜 너는…….”

갑작스럽게 인상을 찌푸리는 스카이라의 반응에 되레 애리얼이 놀라 웃음기를 거뒀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뭔가 심기를 건드렸나?’

이럴 땐 기분을 더 건드리기 전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애리얼은 황급히 꾸벅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남기고 종종걸음으로 떠났다.

***

애리얼은 겨우겨우 외운 길로 제 객실을 찾아왔다. 휴대폰의 위치 지도를 보면 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눈에 띌까 염려스러웠다.

사방이 닫힌 개인실에 돌아와서야 그녀의 경계심이 물러졌다.

애리얼은 챙겨 나간 열쇠를 유리컵에 담아 놓고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시계의 시침은 이미 7을 넘어가 있었다. 저녁 식사를 부탁한 일곱 시는 지나간 뒤였다. 부재중인 객실에는 식사가 놓이지 못했다.

“다시 부탁해야 하나…….”

귀찮다. 지친 나머지 애리얼은 곧장 구두를 벗고 쓰러지듯이 침대에 누웠다.

장시간의 이동으로 누적된 피로감에 갑작스러운 만남 때문에 생긴 긴장감이 겹쳤다.

“등록만 하고 오면 된다더니.”

애리얼은 볼멘소리를 뱉으며 눈을 감았다. 푹신한 매트리스에 누워 버리니 만사가 다 귀찮았다. 이대로 잠들고 싶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

똑. 똑똑. 똑.

규칙적인 듯하다가 불규칙하게 다급해지는 소음.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무의식으로 깊게 가라앉았던 애리얼의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

‘……바람이라도 부는 건가?’

졸음에 무너진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정면으로 보이는 너른 유리창에 검은 윤곽이 드리웠다. 달도 뜨지 않은 창밖은 괴물이라도 찾아온 것같이 괴괴했다.

엎드려 있던 애리얼은 소스라치며 일어났다. 뻣뻣해진 몸으로 바짝 얼어선 그림자가 스멀거리는 유리를 주시했다.

그녀가 창문 유리 너머 어른대는 게 인영이라는 걸 인지하는 데는 십여 초가 넘게 걸렸다.

“사람……. 황자님?”

스탠드의 주황색 불빛에 비친 금발과 익숙한 얼굴 윤곽을 보자 애리얼은 맥이 탁 풀렸다. 전혀 모르는 외부인이나 괴물이 아니라는 안도감.

애리얼은 풀린 다리로 비척비척 걸어가 갑작스러운 방문객이 선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와 함께 상쾌한 향기가 스몄다. 약한 바람에 산들거리는 금발과 얇은 블라우스.

뾰로통한 얼굴로 창틀을 짚고 선 스카이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늘 그렇듯이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그가 왜 여기 있는지…….

“저하, 왜 문이 아니라 이쪽으로 오셨나요?”

“……알 거 없어.”

스카이라는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가끔은 설명을 좀 해 줘도 좋을 텐데.’

그는 과묵하다 못해 약간의 붙임성조차 없었다.

뭘 더 물어도 될지 모르겠다. 어색해진 애리얼은 제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푸른 눈이 꼼지락거리는 흰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괜스레 흘긴 눈길에 애리얼이 움직임을 멈추자 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보다 아직도 저녁을 안 먹었다며.”

말한 적도 없는데 그는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을까.

“……시녀를 통해 들으셨나요?”

“그래.”

“그러면 제 다른 행동도 전부 보고가 가는 건가요?”

“당연한 거 아냐? 내 이름 걸고 내 손님으로 데려온 건데, 행적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지.”

맞는 말이다. 애리얼도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당연한 얘기를 말하는 것에 스카이라는 치부를 들킨 것같이 귀를 붉혔다. 뭐가 무안한 모양인지.

경직된 그의 기색이 금방이라도 등을 돌리고 멀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예상과는 반대로 가까이 다가섰다.

창틀 밖에 가려져 있던 스카이라의 왼팔이 다가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애리얼의 눈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연분홍색 종이 상자. 하얀 리본까지 곁들인 앙증맞고 예쁜 물건이었다.

“저하, 이건……?”

“이거라도 먹으라고.”

그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 손님으로 왔는데 계속 굶고 다니면 내 체면이 뭐가 돼.”

상냥하지 못한 말투였으나 스카이라가 보이는 행동은 분명 그녀를 챙겨 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딴에는 굉장히 신경을 쓴 축이리라.

“감사합니다.”

애리얼이 공손하게 양손을 모아 내밀었다. 스카이라는 그녀의 가지런한 손바닥 위로 미끄러트리듯 상자를 넘겼다.

상자는 차가웠다. 디저트 같은 게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애리얼은 그에게서 넘겨받은 작은 포장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그를 마주 보았다.

스카이라와 정면으로 눈이 맞았다. 줄곧 그녀를 지켜보던 스카이라는 갑작스레 부닥친 시선에 놀랐는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파란 눈동자가 바르르 떨리다가 비스듬히 돌려졌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애리얼은 스카이라의 심정을 대략 짐작해 보았다. 그는 살갑게 대하는 데 서툰 성격인 듯 보여서, 아무래도 이런 일을 하자니 쑥스러운 게 아닐까 싶었다.

애리얼이 계속 바라보자 스카이라의 유려한 얼굴이 슬쩍 고개를 숙였다.

“왜 황태자의 제안을 거절했어?”

망설이나 싶더니 그가 의외의 것을 물었다. 애리얼은 잠시 생각해 보다 대답했다.

“저하께 무례해서요.”

의외의 답변이었는지 스카이라는 놀란 기미를 보였다. 눈동자가 커졌다.

“저는 저하께 초대받아 온 사람으로서, 저하께 무례하게 구는 사람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게 황태자 전하라 할지라도요.”

“…….”

스카이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무슨 생각 중일까. 애리얼은 그의 심정이 잘 짐작되지 않았다.

‘화를 내진 않겠지?’

궁금하던 차, 그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네 가문의 평판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잘 처신해. 내 이름도 걸려 있으니까, 계속 정신 차리고 똑똑하게 굴어.”

칭찬이라도 해 주나 싶었는데 스카이라는 또 날 선 소리를 했다. 애리얼도 듣다 보니 익숙해져서, 이 정도면 잔소리 정도로 상냥하게 들렸다.

“네.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얌전히 있어. 괜히 얼굴 내밀지 말고.”

스카이라는 끝까지 굳어 버린 표정으로 안부 인사 한마디 없이 등을 돌렸다.

‘기껏 먹을 걸 챙겨 왔으면서, 생색 한번 제대로 못 내고. 쓴소리만 하고.’

애리얼은 인간관계에 서툰 스카이라의 모습이 어쩐지 정감이 갔다.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에다 대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저하.”

애리얼의 배웅에 멀쩡히 걸어가던 스카이라의 뒷모습이 한 번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절대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대답을 들려주는 일도 없었다. 몇 번 봤다고 애리얼은 멀어지는 그의 모습이 벌써 익숙했다.

애리얼은 창문을 닫고 돌아와서 테이블에 앉았다. 조심스레 리본을 풀고 포장을 열었다.

상자의 내용물은 은식기에 담긴 백색의 조각 케이크. 밋밋한 겉면을 쪼개니 설탕에 절인 과일이 한가득 들었다.

무심한 척 가장했지만 나름대로 신경 쓴 모습이 어쩐지 조금 전의 스카이라를 닮았다. 까칠하게 굴어도 자꾸만 은근히 상냥함을 내비치는…….

“뭔가 변한 건가?”

애리얼은 케이크의 한 귀퉁이를 입으로 가져가며 주머니를 뒤적거려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새 알림이 와 있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합니다.)

▷현재 위치: 황성 정원 - 남관과 중앙관의 사잇길』

“두 개……. 한 개 반인가?”

뒤늦게 상승한 호감도를 발견하고 애리얼은 하트의 개수를 헤아렸다. 예상보다 빠르고 순조로웠다.

아직 갈 길은 멀고, 비어 있는 프로필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는 괜찮아.’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애리얼은 허기를 달래며 케이크 조각을 우물거렸다. 입 안에서 으깨지는 과일이 달았다.

***

타다다다다.

빗방울이 창문을 시끄럽게 두드려 댔다. 좀 개었나 싶더니, 또 쏟아진다.

안 그래도 열이 올라 머리가 아픈데.

짜증 난다.

데본시아가 눈썹을 찡그리자 눈치 빠른 시녀들이 앞으로 나섰다.

일사불란하게 두꺼운 커튼을 쳐서 창문을 막고 스탠드를 켰다. 빗소리가 상당히 차단됐다.

데본시아는 보던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서서 벽에다 등을 기댔다.

수십 장의 서류는 모조리 허클리 백작가에 관한 뒷조사 내용이 담긴 것이었다. 그중에 고작 한두 장 정도가 백작의 외동딸, 애리얼 허클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녀에 대한 건 조사해 채울 내용이 턱없이 부족했다. 애초에 조사할 거리가 없었다. 그녀는 집 안에 틀어박혀 사회와 교류도 없이 지내 왔으니.

데본시아가 종이에 담긴 인적 사항을 내려다보다가 슬쩍 고개를 틀었다. 그는 제 전속 시녀에게 눈치를 보냈다. 그녀가 눈치 빠르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가 일부러 뒷조사를 해 오라고 보냈던 자신의 직속 정보원 중 하나다.

“아직 적성 검사를 안 했네?”

“예. 기본적인 마력 검사도 거치지 않은 상태입니다. 기본 검사와 더불어 상세 검사도 전부 진행할까요?”

“응. 예정대로 준비해 줘.”

“참관인은…….”

“나만.”

“그러면 백작도…….”

“배제해야지. 진짜 결과는 함구하고. 황성이나 백작에겐 겉보기용 서류로 조작해서 보내 주고.”

흔하지 않은 일에 시녀의 얼굴이 굳었다.

마법은 곧 무력이다. 마법으로 대륙을 평정하고 세워진 제국은 마법에 관해선 무척 엄격했다. 나라의 근간과 관련된 일이기에 더욱더.

그렇기에 적성 검사로 나온 마력의 결과는 필히 제국에 알려야 했다. 만약 비밀로 할 경우 제국법을 어기는 중죄가 된다. 죄를 저지른 자는 물론 사정을 아는 인물들 전부가 사형에 준하는 중형을 받는다.

그런데 나라의 황태자가 검사 결과를 비밀에 부치자 말하다니. 아무리 황태자가 황제 바로 아래의 직위라 해도…….

아니, 그렇기에 더 위험했다. 자칫 역적으로 몰릴 수 있었다.

측근이자 정보원인 황태자의 직속 시녀가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아무리 그래도 비밀로 하는 것은 위험…….”

“시에나.”

그가 이름을 부르자 시녀가 입을 닫았다.

시녀를 내려다보는 황태자의 얼굴은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이면적인 차가움이 짙게 깔려 있다. 그를 오래 모신 직속들은 알 수 있었다. 거스르지 말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내가 어렵게 설명하지 않았잖아.”

제국의 엄중한 법령보다 더 두려우면서도 은연중에 달콤하게 스며드는 나른한 소리. 황태자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잘 들어야지. 잘 처신하고.”

그의 발아래 들어온 종으로서 절대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시에나는 몸을 떨었다.

“따르겠습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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