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그의 그림자조차 남지 않은 문을 보다가 애리얼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제 손에 쥐어진 편입 추천서를 훑어보았다. 황자의 직인이 찍힌 것이니 나중에 도움이 많이 될 터다. 소중히 들고서 다른 서류들과 함께 모아 가방에 넣었다.
‘집에 가면 금고에 보관할까?’
황실의 직인을 생각하면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애리얼의 개인 금고가 없으니 금고부터 사야겠지만.
‘그러려면 가는 길에 잠깐…….’
잡다한 사념들로 머리가 차려는 차에 애리얼은 스카이라가 남긴 말이 퍼뜩 떠올랐다.
알아서 집에 가든가 하라고.
이제 볼일은 다 끝난 셈이었다. 더 머물 만한 이유가 없다. 구실도 없고.
“근데 어떻게 집에 가지?”
황성에서 백작저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 거로 안다. 걸어서는 절대 못 간다.
‘나보고 알아서 가랬으니까…….’
로비에 가서 백작저에 전화라도 해 달라는 게 빠를 것 같았다. 그러면 뭐라도 보내 주겠지.
애리얼은 떠나기 전 확인차 대충 방을 둘러보았다. 짐을 푼 적도 없어서 챙길 게 거의 없었다. 그녀는 가방만 들고나왔다.
올 때는 그래도 황자와 함께였는데, 혼자 떠나려니 조금 쓸쓸한 기분이었다.
복도를 지나 어느새 입구 쪽 로비에 다다른 애리얼은 전화를 부탁하기 위해 긴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러자 테이블을 지키던 시녀가 그녀의 앞으로 나섰다.
“공녀님, 차량이 대기 중입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애리얼이 용건을 꺼내기도 전에 시녀가 알아서 척척 제시했다. 아까는 알아서 가라더니, 황자가 따로 준비를 해 준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좀 더 생색내도 괜찮을 텐데.’
애리얼은 그에게 작별 인사 겸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한 게 아쉬웠다.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도 싫다 그랬던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애리얼은 시녀의 뒤를 따라갔다.
***
집으로 돌아온 애리얼은 백작에게 간단히 상황을 전달했다. 그녀의 말에 백작은 그렇구나 대답했을 뿐이었다. 황태자의 초대에 관한 일에도 마찬가지였다.
건조한 대화를 끝내고 방에 도착하자 고요함이 애리얼을 감쌌다. 떠나기 전과 완전히 같은 방 안의 전경이 어쩐지 외롭게 다가왔다.
“아가씨, 오셨어요?”
가만히 서 있는 애리얼의 등 뒤로 카논이 말을 걸었다. 문을 열어 둔 채 들어온 모양이었다. 문간 너머 복도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애리얼은 왠지 그녀가 굉장히 반가웠다.
“응. 다녀왔어.”
애리얼이 작게 미소를 띠자 카논도 미소로 화답했다.
카논은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자리를 피해 줬다. 애리얼이 홀로 쉴 시간이 필요하다 여긴 것이다.
애리얼은 그 배려가 고마웠으나 쉬는 대신 책상 앞에 앉았다.
분기를 앞둔 지금, 여태 만난 인물에 대해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휴대폰과는 별개로 작은 메모장을 꺼내 애리얼은 제 생각들을 기입했다.
「공략 대상 목록
스카이라: 호감도 한 개 반. 까칠하지만 가끔 상냥한 면도 있다. 솔직하지 못하다. 생각보다는 다정한 사람? 지금까지는 대하기 쉬운 편. 이대로만 가면 순조로움.
레이신: 호감도 없음. 말을 걸어도 무시함. 만나기도 어려워 보임. 난항 예상. 한 번이라도 스칠 때 최선을 다하자.
데본시아: 호감도가 보이지 않음. 오류. 비밀이 많고 의미심장. 첫인상 좋지 않음. 최초로 분기를 일으킨 인물. 위험해 보임. 일단은 거리를 두면서 성격을 파악하기.
???: 아직 만나지 못함. 위의 셋과 관련된 높은 계급의 귀족으로 추정. 마찬가지로 만만치 않은 성격일 것으로 예상 중. 만나는 것이 최우선.
※목표 - 전원의 호감도 3개 이상.(다만 3개부터는 엔딩의 가능성이 있음.)
최대한 비슷한 속도로 동시에 공략하는 것이 중요!」
각 대상의 인상을 잔뜩 적어 내고 애리얼은 펜을 놓았다. 그나마 앞으로의 방향이 대강 정해진 느낌이었다.
애리얼은 내용을 외워 차곡차곡 뇌리에 새기고는 메모를 찢어 버렸다. 한글로 적긴 했지만, 처리를 해 두는 게 깔끔했다.
***
애리얼의 일상은 아카데미 편입이 결정되고서도 달라진 게 없었다. 가끔 산책하러 나가고, 필요한 교육을 받고. 남는 시간에는 책을 보거나 카논과 잡담을 하거나 했다. 사실 그녀로선 별달리 할 일이 없기도 했다.
구체적인 편입 일자는 황성에서 따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아카데미의 지침이나 과목도 편입 절차를 마쳐야만 알 수 있었다. 특히나 애리얼은 황자 추천 편입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것들은 미리 그쪽에서 챙겨 준다고 했다.
솔직히 애리얼의 입장에선 지금의 생활이 편하긴 했다. 다만 사전에 황태자에게서 받은 초대가 마음에 걸릴 뿐.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확인 불가](일시적인 오류로 호감도 확인이 지연됩니다.)
▷현재 위치: 황성(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애리얼은 황태자의 프로필을 바라보고 있으면 음습한 불안을 느꼈다.
그녀는 여전히 오류 상태인 황태자의 호감도가 몹시 거슬렸다. 거리까지 멀어져서 위치 파악도 힘들어지니 아주 비밀 천지인 히든 프로필이 완성되었다. 이런 인물과 당장 엮일 일이 있다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황성에서 떠난 날부터 오늘로 일주일.”
황태자와 약속한 날짜였다.
‘황립 아카데미에 가기 위해선 마법 적성 검사가 필수니까, 이참에 받는 게 맞고 결국 황태자의 제안은 나한테 여러모로 손해 볼 것 없는데…….’
그래도 애리얼은 막상 그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여전한 찝찝함이 남았다. 황성에서 마주했던 황태자의 인상이 그리 유쾌하지 못한 탓이었다.
똑똑똑.
사념을 깨고 들리는 노크 소리에 애리얼은 약속의 시각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아가씨, 황실에서 차량을 보내왔습니다.”
“지금 나갈게.”
***
황금 독수리가 박힌 황실의 차량을 두 번이나 타는 호사를 누리고 황성에 도착했다.
두 번째로 온 황성은 저번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맑은 날씨. 푸른 녹음. 건물도 유백색의 벽면은 여전하나 지붕과 기둥의 색이 검은색으로 달랐다. 저번에 온 남관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새를 한 서관의 성은 극명한 색의 대비로 기하학적인 화려함을 선사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확인 불가](일시적인 오류로 호감도 확인이 지연됩니다.)
▷현재 위치: 황성 서관 - 3층 밀실』
애리얼은 황태자의 위치를 확인하다 시녀가 다가오자 재빨리 휴대폰을 숨겼다.
시녀는 정확하게 휴대폰에 나온 위치로 애리얼을 인도했다.
서관 3층.
복도를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자 창이 없는 긴 통로가 나타났다. 척 보기에도 밀실의 규모가 상당함을 예상케 했다.
시녀가 검은색 더블 도어를 앞에 두고 벽면의 초인종 같은 버튼을 눌렀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아마도 밀실의 내부에서만 들을 수 있는 구조인 모양이었다. 얼마나 방음이 잘되는지 내부의 소리는 하나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애리얼이 호기심에 문틈을 보는 사이 시녀는 할 일을 끝낸 듯 먼저 자리를 떠나 버렸다.
그렇게 그녀가 혼자가 되자 문이 열렸다.
“안녕.”
짤막한 인사와 함께 황태자가 잘 차려입은 차림새로 마중을 나왔다. 검은색 정장. 문 사이로 드러난 그의 손목으로 커프스에 달린 은단추가 빛났다.
애리얼은 잠시 소매에 눈을 주다가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데본시아의 오드 아이가 그녀를 반기며 은은히 빛났다. 그의 반듯한 눈썹 아래 기다란 눈이 매끈하게 휘어졌다. 볼 때마다 사람을 무섭게 홀리는 화려한 얼굴이었다.
애리얼은 아주 잠깐만 데본시아와 얼굴을 마주하고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뻣뻣하게 굴 거 없는데.”
“아, 그……. 친근하게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리얼이 얼어 있는 게 확연한 대답을 보이자 그가 작게 웃었다. 한숨처럼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면서.
“일단 들어와.”
황태자가 한쪽 문을 밀어젖히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애리얼도 그를 따라 밀실에 진입했다.
창문 하나 없는 내부는 극도로 어두웠다. 스탠드를 몇 개 켜 두었지만 넓은 공간을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애리얼은 조심조심 발을 디디며 벽면 쪽에 자리해 안쪽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커튼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거대한 방 안. 그 중앙에는 혼천의처럼 생긴 묘한 기구가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사람도 물체도 더는 없었다.
애리얼은 뭔가 이상하여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분들은 아직 안 오신 건가요?”
“응. 여태 적성 검사를 안 받은 귀족은 애리얼뿐이라서.”
모르는 척 슬그머니 거리를 좁힌 데본시아가 상냥하게 답했다.
그에게 은근하게 이름을 불렸으나 애리얼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이들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애리얼은 이곳의 초대객이 자신뿐이라는 점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분명 일부 귀족을 대상으로 한다고…….”
“그 일부가 한 명일 수도 있는 거지.”
“그럼…….”
“맞아. 오늘 여기에 오는 건 너뿐이야. 내가 검사할 거고.”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거리까지 다가온 데본시아가 애리얼의 귓가에서 소곤거렸다.
미적지근한 숨결이 귓바퀴를 간질이고 가자 애리얼은 놀란 나머지 그를 밀쳐 버릴 뻔했다. 다행히 스스로 두 손을 꽉 맞잡아 멈춘 덕에 불경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 대신 그녀는 한 발짝 옆 걸음을 쳐서 그에게서 벗어났다.
데본시아는 멀어지는 그녀에게 따라붙지는 않았지만 으음, 하는 미묘한 소리를 냈다.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호기심을 느끼는 듯한 반응이었다.
“딱히 별다른 의미를 가지고 초대한 건 아니야.”
“네. 오해 없이 명심토록 하겠습니다.”
밀실에서 오로지 둘뿐이었으나 애리얼은 침착을 유지했다. 상대가 황태자임에도.
그런 애리얼의 반응은 데본시아에게 묘한 인상을 주었다.
“귀족들이 황성에서 적성 검사를 받는 건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보통은 다섯 살 정도에 받거든. 늦어도 열 살 전에는 끝마치고. 그런데 공녀는 여태 받질 않았더라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집에 칩거하느라 시기를 놓쳤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 지금이라도 받으면 그만이고, 몇 살까지 받으라는 조례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런가요. 부득이한 사정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애리얼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으나 긴장했다는 티는 났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는 데 아주 능숙하지는 않지만, 상황을 생각하면 상당히 덤덤한 편이었다. 그 나이대의 귀족 공녀라고 보기는 어려운 냉정이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지금 황태자와 둘이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제 편의를 봐준다는 황태자와 있는데, 심지어 사교계에 발을 들여 본 일도 없는, 존재감도 희미한 고작 백작 공녀 따위가.
‘그런데 저런다고. 사회성이 떨어져 이 나이가 되도록 칩거했다는 공녀가?’
딱 들어맞지 않고 어긋나는 상황에 데본시아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진해졌다. 그는 풀리지 않는 의문에 애리얼의 얼굴을 집요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갸름한 얼굴선과 연분홍빛 입술 위로 스탠드 불빛이 비스듬히 비쳤다.
데본시아는 알 수 없는 갈증에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훑어 냈다.
저 얼굴을 볼수록 뭔가…… 허기 같은 게 자꾸 속을 자극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흥미. 혹은 괴롭혀서 깨트리고 싶은 가학성.
“공녀는 혹시…….”
순간 속에서 끓어오르는 열에 데본시아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일주일째 낫질 못한 몸이 또 난리를 부리는 것이다. 그는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을 멈추었다.
무심하게 내리깔린 그녀의 눈이 순식간에 동그래졌다. 까만 눈동자가 놀라서 그를 향했다.
“괜찮으세요? 시녀를 불러올까요?”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상냥하게 애리얼의 걱정을 무마한 데본시아가 살포시 눈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애리얼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걱정도 쉬이 거두지 않았다.
“힘드시면 들어가서 쉬세요. 제가 다음에 올게요.”
어쩐지 기특하면서도 세상 물정 모르는 대답이었다.
이 기회를 그가 어떻게 만든 것인데. 애리얼이 아카데미에 편입하게 되면 아무리 황태자인 그라도 이렇게 비밀리에 그녀를 검사하기는 힘들다.
“있잖아, 애리얼. 황족에게는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아.”
짧은 말마디를 내뱉는 동안 데본시아는 스르르 움직여 나가는 문을 막아섰다. 애리얼은 그의 움직임을 좇아 고개를 기울였다. 스멀스멀, 그녀의 기저에 깔린 불길함이 올라와 형체를 갖추는 느낌이 선연했다.
“오늘 안에 끝내야지.”
다정하게 선언하는 데본시아의 뒤로, 철컥, 문이 잠겼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