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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15화 (15/264)

15화

유일한 출입구가 닫히며 내는 잠금장치의 소리가 선득했다. 애리얼은 피부에 날카로운 것이 스친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그녀는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애리얼은 데본시아를 예의 주시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왜 잠갔지? 중간에 누군가 들어올 걸 염려해서? 아니면 내가 도중에 뛰쳐나가 버릴까 봐? 문을 잠가 완전히 엄폐하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는 검사인가?’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인 애리얼의 머리가 질문을 쏟아 냈다.

“너무 경계하지 마. 그냥 검사니까. 문은 보안상 잠그는 거고, 금방 끝나.”

그녀의 동요를 눈치챈 데본시아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애리얼은 두려움을 숨기고 표정을 가다듬은 후 데본시아를 응시했다.

“어떻게…… 어떤 절차로 진행되는 건가요?”

“너무 딱딱하게 구네. 난 검사보다는 애리얼하고 친해지고 싶어서 부른 건데.”

“……가, 감사합니다. 저도 전하와 친밀해질 수 있다면 큰 영광일 거예요.”

“그래? 그럼 검사 같은 거 때려치울까?”

“그래도 우선 검사는 하는 게…….”

“농담이야.”

데본시아는 본말이 전도된 소리를 장난스럽게 하고 있었다. 듣는 애리얼의 입장에선 장난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중간에 저거 보여?”

한참 딴소리를 하던 데본시아가 주제를 환기하듯 슬쩍 손짓했다. 애리얼의 눈이 자연스레 그가 가리킨 곳을 향했다.

중심에 있는 구체 하나가 원형 링에 겹겹이 싸인 은색의 금속체. 원자 모형 혹은 고리를 여러 겹 두른 행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걸로 검사를 하는 건가요?”

“응.”

데본시아가 애리얼의 손목을 잡고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억세지 않은 그의 손길에 애리얼 역시 크게 저항하지 않고 따라갔다.

애리얼이 불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당장 어제만 해도 데본시아에 대해선 성격을 파악할 때까지는 거리를 두자고 메모했었다.

“사념이 많은 것 같네.”

멈칫거리는 기색을 파악한 건지 다가온 음성이 조곤조곤했다.

애리얼은 살짝 고개를 돌려 음성의 주인을 살폈다.

“안심해. 별일 없으니까.”

데본시아는 온화한 눈빛을 해 보이며 애리얼을 안심시켰다. 어쩐지 거짓 같지 않아서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황태자의 눈이 다정하게 휘어졌다. 그는 제 손에 쥐었던 애리얼의 손목을 풀어주고서 그녀의 뒤로 돌아갔다.

애리얼의 시선이 데본시아를 따라갔다. 그녀의 고개가 힘겨울 만치 꺾어졌다. 그가 피식거렸다.

“내 얼굴이 재밌는 건 알겠는데, 지금은 앞을 봐.”

일부러 놀리는 것 같은 발언이었다.

아차 싶어 애리얼은 데본시아의 쪽으로 과하게 꺾어져 있던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 그녀는 괜스레 부끄러워져 머리를 숙였다.

원자 모형과 같은 물체가 어느새 애리얼의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데본시아의 설명으론 적성 검사에 쓴다던 기구였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하는 걸까. 애리얼은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나요?”

“기다려 봐.”

데본시아의 입에서 간단한 답이 떨어졌다. 그러더니 그는 잠시 양해를 구했다.

“잠깐만 손 좀 쥘게. 검사하려면 필요하거든. 괜찮지?”

“……네, 괜찮아요.”

허락과 동시에 데본시아의 손이 애리얼의 양쪽 손등을 감싸 쥐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접촉이었다.

“긴장 풀고.”

달래듯 다정한 음성. 약간 떨어져 있던 틈을 좁히며 황태자가 다가왔다. 서로의 간격이 좁아지며 애리얼의 등 뒤로 그의 너른 품이 와 닿았다. 영락없이 뒤에서 안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황태자 전하……?”

그는 대답이 없었다. 애리얼은 당황스러움에 입술을 우물거리다 일자로 꼭 다물었다. 긴장한 입이 약하게 떨렸다.

황태자는 애리얼의 등에 밀착해선 서서히 고개를 숙였다. 정장을 입은 가슴팍이 오르내리며 옅게 퍼지는 그의 일정한 숨소리가 그녀의 뒷덜미를 감싸며 닿아 왔다.

살결을 타고 전해진 그의 온기에 애리얼의 몸이 움찔거렸다. 손등, 그리고 목덜미.

데본시아의 기다란 손가락이 천천히 애리얼의 손마디를 훑고 손을 겹쳤다. 그녀의 작은 손이 그의 손바닥 안으로 포개졌다. 느릿하게 문지르는 피부의 감촉이 선연해지고, 맞닿은 자리의 열기가 진해졌다.

굳이 필요가 없는 과도한 밀착. 누가 봐도 노골적인 접촉이었다.

‘왜?’

도대체 무슨 영문에 이러는지. 애리얼은 황태자의 의중이 헤아려지지 않았다.

“저…… 전하? 조금 거리를 두면…….”

“집중해야지.”

데본시아의 숨결이 애리얼의 귓가를 간질였다.

애리얼의 손등을 덮은 그의 손이 조금씩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그녀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깍지를 끼더니 천천히 당겼다.

데본시아에게 붙잡혀 끌려간 애리얼의 손이 구체로 향했다. 벌어진 고리 사이로 침투한 그녀의 손끝이 동그란 중심점에 닿았다.

“……!”

갑작스럽게 선뜩함이 애리얼의 손안을 내달렸다. 냉기라도 흐르는 건가 싶은 순간, 손끝이 아려 왔다. 어디에 찔린 건가 싶어 애리얼이 눈을 크게 떴다.

구체는 애리얼의 손끝이 닿은 부분부터 붉게 물들었다. 조금씩 퍼져 나간 붉은색이 고리를 휘돌아 나갔다. 은장식처럼 희게 빛나던 기구가 피라도 머금은 것처럼 조금씩 스멀거리며 잠식되었다.

이윽고 완연하게 핏빛으로 물든 기구가 느리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서로 겹치기는 하되 애리얼의 손은 건드리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갔다.

고리들은 대여섯 바퀴 정도를 천천히 회전하고는 서서히 멈추었다.

“이제 끝났어.”

애리얼이 여전히 고리에서 눈을 못 떼고 있는 동안 데본시아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손을 끌어당겨 기구에서 떨어트렸다.

검사는 매우 간편하고도 빠른 방식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데본시아의 손은 아직 애리얼의 손등을 덮어 쥔 상태였다. 매우 당연하게도, 그가 애리얼을 안고 있는 것 같은 자세도 유지되었다.

애리얼은 눈앞의 기이한 검사보다도 황태자와 닿아 있는 이 상황이 몹시 불편했다. 그녀는 빨리 용건을 끝내고 나가고 싶었다.

“검사 결과는 얼마나 있어야 나오나요?”

“사람에 따라 달라서 확답은 못 주겠는데?”

“대략이라도 부탁드립니다.”

“음……. 일 주에서 한 달?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고.”

“아, 설명 감사드립니다. 검사해 주신 것도 감사드려요.”

애리얼은 쫓기는 것처럼 말이 빨라졌다.

“전하, 저는 그러면 이만…….”

애리얼은 헛숨을 들이켜며 하던 말을 잇지 못하고 멈추었다. 황태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마디를 훑고 내려와 구체에 닿았던 손끝을 매만지고 있었다.

“피가 나는 것 같네. 지혈해 줄까?”

느리고 조곤조곤한 어조. 한숨 섞인 유려한 목소리. 다정하게 건네는 데본시아의 말은 사람의 정신을 노곤히 풀어지도록 유도했다.

애리얼은 전혀 피를 흘리지 않는데 데본시아는 계속 그녀의 손끝을 만졌다. 맞닿은 곳의 온기가 야릇하게 느껴지고 긴장감이 올라갔다.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필요 이상의 과민한 접근과 행동들……. 데본시아가 애리얼에게 행하는 것은 저번의 정원 때와 같은 명백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왜?’

또다시 겹쳐지는 의문에 애리얼은 갑작스럽게 스카이라를 떠올렸다.

“아프단 새끼가! 쉬지도 않고 어떻게든 나를 엿 먹이겠다고!”

그는 며칠 전 황태자와의 대화에서 그렇게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황태자는 그때도 줄기차게 애리얼을 유혹했다. 제 방에 가자거나, 같이 저녁을 먹자거나.

‘설마…….’

스카이라를 자극하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이해 가는 방향으로 그의 의도를 파악하자, 애리얼은 깨달았다. 자신이 황태자에게 흥미 있는 체스 말 혹은 재밌는 장난감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는 걸.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닿아 있는 그의 손을 강하게 뿌리쳐 내고 싶었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아무리 공략해야 할 대상이라지만, 상상 이상으로 거북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오해십니다. 저는 별로 아무 생각도…….”

손끝을 문지르던 데본시아의 손이 움직여 덜컥 애리얼의 손목을 쥐었다. 상당한 압박감이 가느다란 팔목을 휘감았다.

“난 네가 짐작하는 그런 의도로 이렇게 행동하는 게 아니야.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그는 마치 애리얼의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했다. 자주 받아 본 오해인 양.

애리얼은 이걸 해명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다.

의심을 품는 건 입 밖으로 내지만 않으면 불경이 아니다. 다만 데본시아는 스스로 지레짐작하여 애리얼의 생각을 읽어 내고 부정했다. 여기서 그녀가 해명하지 않고 입을 닫을 경우 의심을 하였다고 긍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저는 전하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짐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거치곤 침묵이 조금 길던데?”

“그건…… 갑작스러워서 그랬습니다. 저는 결코…….”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 화내지 않으니까.”

“아닙니다. 불경스러운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해도 상관없어. 봐줄게. 지금 거짓말하는 것도 봐줄게.”

숨이 턱 막히는 소리였다. 황태자는 애리얼이 멋대로 짐작하고 판단했다고 확정 짓고 있었다.

애리얼의 손목으로 올라온 그의 손이 핏줄이 지나는 부위를 지그시 눌렀다. 어정쩡하게 늘어진 그녀의 손가락이 움찔거리며 떨렸다.

“애리얼.”

데본시아의 입 안에서 그녀의 이름이 달콤하게 굴려졌다. 꾀어내는 데 특화된 모양인지 살갑고 그는 미혹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걸까. 단지 스카이라를 자극하기 위해서?’

매도를 들으면서도 데본시아의 관심 한 가닥을 원하던 정원의 공녀가 생각났다. 애리얼은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애리얼은 붙잡힌 손목을 비틀며 팔꿈치로 약하게 데본시아를 밀어냈다.

“전하, 검사가 끝났으니까 이제…….”

“날 두고 갈 거라고?”

데본시아는 애리얼의 손목을 붙든 것도 모자라 그녀의 어깨에다 이마를 대었다.

“매정하게 굴지 말고.”

“하지만 전하…….”

“난 지금 너한테 관심이 생기는 중인데……. 잘 꼬시면 너한테 넘어가서 권력이고 재물이고 다 줄지도 모르잖아. 응?”

“전하, 왜 그런 말씀을…….”

데본시아가 칭얼거리듯이 붙어 왔다. 자신을 뿌리치려는 애리얼의 움직임을 차단하며 손목을 움켜쥐는 그의 힘이 거세졌다.

“상냥하게 대해 줘, 애리얼.”

은밀하게 전하는 데본시아의 부탁이, 애리얼은 순전히 거짓임을 아는데도 애절하게 들렸다.

황족에 황태자라는 지위를 쥐고 이렇게 굴고 있으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외부적 압박 때문이든 개인적 끌림 때문이든 마지못해서라도 데본시아를 따를 만했다. 화려한 이목구비로 요망하게 친절을 요구하는 그의 모습이 상당히 매혹적이기까지 하니까.

애리얼 역시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거절하면 불경이나 무례에 가까워지고, 받아들이면 황태자라는 연줄이 생기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 이득인지는 굳이 재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침착하자.’

무엇보다도 그는 공략해야 할 대상 중 하나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애리얼은 데본시아에게 순순히 굴기가 단순히 거북한 정도를 넘어 불안하기까지 했다.

애리얼은 옴짝달싹 못 하고 고민에 빠진 상태로 그에게 뒤에서부터 안겼다.

“친하게 지내자.”

데본시아가 또다시 소곤거렸다. 악마나 이단자가 속삭이는 것처럼 음험하나,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적인 기세로.

그리고 그때, 잠겼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달카닥.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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