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틈 없이 맞물렸던 문이 벌어졌다. 밀폐된 공간으로 외부의 빛이 새어 들어와 기다란 빛줄기를 만들어 냈다.
점점 넓어진 빛줄기는 이윽고 애리얼과 그 뒤에 선 데본시아의 윤곽까지 뒤덮었다.
너르게 뻗어져 나온 빛의 끝에는 익숙한 인물이 문고리를 쥐고 있었다. 황태자와 닮은 얼굴. 그러나 그보다는 좀 더 사납게 치뜬 눈에 냉랭한 인상.
스카이라.
그의 벽안이 애리얼을 향했다. 그녀의 붙잡힌 손목을 훑고, 그녀를 붙잡는 손의 주인도 훑고서, 그가 파르르 눈가를 떨었다. 스카이라는 꼭 배신당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애리얼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의문을 가지고 있을 뿐.
‘왜 이 순간에 스카이라가 잠긴 문까지 열고 찾아왔을까.’
이유는 지금 그녀의 뒤에 선 인물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애당초 초대부터가 이 일을 상정하고 벌인 계획일 거다.
함정에 빠진 죄책감이 애리얼을 내리눌렀다.
애리얼은 황자 스카이라의 연줄로 아카데미에 편입한 건데, 두 번째 만남에는 황태자와 붙어 있는 모습을 그에게 보였다. 의도적이었든 아니든 스카이라의 입장에선 기만처럼 비칠 것이다. 그러니 애리얼은 그가 보는 앞에서 데본시아를 뿌리쳐야 했다.
애리얼이 팔에 힘을 주고 비틀려는 순간 손목을 잡아챘던 악력이 사라졌다. 힘은 갈 곳을 잃었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유영하며 맥 빠지게 흐느적거렸다.
애리얼이 뒤에 있는 황태자를 뿌리치려고 마음을 먹자마자, 황태자가 먼저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스카이라의 오해에 박차를 가하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홱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자 이미 멀어진 데본시아가 미세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아쉬워도 지금은 참아 줄래? 나중에 또 해 줄 테니까.”
황태자의 말은 소름이 끼쳤다. 애리얼은 경악한 표정으로 당혹감을 내비쳤다.
“전하! 왜 그런 말씀을…….”
그러나 그는 대답 대신 요사하게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몽환적인 오드 아이로 요악하게 웃었다.
“데본시아!!!”
스카이라가 애리얼의 항의를 완전히 덮어 버리며 고함을 쳤다.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분노한 음성이었다.
애리얼을 보고 있던 데본시아의 눈이 그녀의 너머를 향했다. 여전히 웃음기를 띤 그의 얼굴이 사악해 보였다.
“스카이라, 여기 내빈도 계시는데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떡하니. 예절을 다시 배워야겠구나.”
“이 개새끼.”
“입버릇도 좀 고치렴. 그 개새끼보다도 낮은 지위를 가진 동생아.”
콰앙!
화를 못 이긴 스카이라가 반쯤 열려 있던 문을 발로 찼다. 어찌나 세게 찼는지 나무 문에선 쩌적 갈라지는 소리마저 들렸다.
중간에 낀 애리얼은 눈치를 보다가 황급히 옆으로 물러났다.
두 형제가 일직선으로 마주 보았다. 그러나 마주하던 시선은 오래가지 못하고 금세 틀어졌다. 황태자의 두 눈이 애리얼에게로 향했다.
“미안해, 공녀. 내 동생이 워낙 예민한 성정이라, 추태를 부려도 이해해 주길 바라.”
황태자가 애리얼에게 양해를 구하듯이 굴었다.
애리얼은 그런 그의 언행이 공포스러웠다. 원하지 않는 황태자의 배려에 아니라고 대답하든 괜찮다고 대답하든 스카이라가 폭발할 것 같았으며, 그의 쪽은 잠깐 훑어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황태자라는 인간이 이젠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왜 저렇게까지…….’
애리얼은 둘 곳 없는 시선을 떨어트려 괜히 바닥만 보았다.
데본시아는 하나부터 열까지 오해를 만들고 스카이라를 열받게 했다. 당장 분노해 거칠어진 스카이라보다 데본시아 쪽이 더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분기 페널티가 뭐든…… 그냥 오지 말 걸 그랬나.’
애리얼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반대로 숨소리를 죽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냥 아무도 모르는 병풍이 되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애리얼은 병풍은 될 수 없었다.
“애리얼.”
“애리얼!”
둘이 동시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각기 다른 감정의 목소리. 놀랍게도 목소리가 큰 쪽은 데본시아였다. 명랑한 그의 음성이 차게 가라앉은 스카이라의 음성을 누르며 귓속을 파고들었다.
애리얼을 반사적으로 큰 소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잘했다고 칭찬하는 듯한 표정의 데본시아와 눈이 맞았다. 데본시아의 안면에 옅게 서린 미소가 그녀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지이이잉-
케이프 안주머니의 휴대폰이 울렸다. 작은 진동임에도 애리얼에게는 아주 크게 느껴졌다.
방금 동시에 이름을 불리고서 데본시아 쪽을 먼저 바라보는 바람에 스카이라의 호감도가 하락한 것이었다.
‘기껏 올린 호감도가 이렇게 사라진다고…….’
진동만으로 시스템 창의 알림을 지레짐작한 애리얼이 한탄했다.
애리얼은 한발 늦게 스카이라가 있는 쪽을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밀실 문을 박차고 나간 뒤였다. 분노가 선명한 그의 뒷모습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애리얼은 거의 뛰듯이 바닥을 박차고 문으로 향했다. 그녀는 스카이라를 쫓아가고 싶었다. 도리라고 해야 하나, 양심인가. 그 비슷한 자책감이 들어 그를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까지 스카이라의 배려를 많이 받았으니까.
하지만 애리얼의 앞은 훼방으로 가로막혔다. 그녀가 발걸음을 재촉하며 문간을 넘어서려 할 때, 황태자에 의해 앞이 막혔다.
팔뚝으로 문을 닫고 가로막은 데본시아가 약간이지만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고서 애리얼을 내려다보았다.
“신경 쓰이는 건 알겠는데, 집안일이라. 공녀가 뒤쫓지는 말아 줘.”
“하지만 전하, 제가…….”
“당황스럽게 해서 미안해. 근데 자주 이러거든. 내가 수습하고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줄래?”
“……아…….”
그 스스로 황족끼리의 집안 사정이라는데, 애리얼은 뭐라 항의할 여지가 틀어막아진 기분이었다.
데본시아의 말대로 스카이라가 화가 난 근본적인 원인은 만난 지 고작 며칠 된 애리얼에게 느낀 배신감 따위는 아닐 거였다. 오래 알고 지낸 데본시아의 언행 때문이지.
그러니 데본시아 본인이 직접 나서서 스카이라와 해결하겠다면 애리얼이 나설 이유는 적었다. 아까의 대화를 생각하면 더 골이 깊어지는 건 아닌가? 우려되어 찜찜하긴 했지만.
“네, 전하.”
애리얼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수긍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데본시아가 막았던 앞을 터 주며 문을 열었다.
“여기 복도 끝 쪽에 대기실이 하나 있어. 거기서 기다려 줄래? 의자도 편하니까 기다리기 괜찮을 거야.”
“네. 그럴게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금방 다녀올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데본시아는 이미 복도에서 사라진 스카이라의 뒤를 쫓았다. 어디 있는지 뻔히 안다는 듯 여유 넘치는 그는 걸음이었다.
애리얼은 멀어지는 데본시아를 바라보며 문간에 서 있었다. 황태자의 뒷모습을 좇는 그녀의 눈동자가 무심한 척 집요했다.
황태자가 계단을 내려가 모습을 감추자 애리얼은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그가 일러 준 방을 향하지 않고 그 반대로 움직였다.
애리얼은 복도의 카펫을 밟으며 살살 계단으로 향했다. 추적하듯이 미행하듯이. 그녀는 황태자가 지난 길을 따라갔다. 아까의 광경을 봤는데 그에게 다 맡기고 물러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또 스카이라한테 개소리할 거 같은데.’
애리얼은 둘 사이에 난입할 생각까지는 안 하지만, 차후 스카이라에게 해명은 할 생각이었다. 황태자 멋대로 상황을 끌고 가도록 두지는 않을 작정이다.
***
살금살금 뒤를 밟아 따라갔으나, 너무 신중했던 탓일까. 애리얼은 황태자를 놓쳤다.
갈 곳을 잃어 확연히 느려진 애리얼의 걸음이 복도를 배회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앞서간 둘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아예 인적조차 드물어 사용인의 그림자도 찾기 어려운 장소였다.
‘하기야 미행해 본 경험도 없는데, 하물며 생소한 장소에서 황족의 뒤를 밟는 일이 잘될 리가.’
현실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애리얼은 서성거리길 멈추지 않았다. 행동을 그만두면 혹시나 찾아올 우연한 기회마저도 놓치고 말 터…….
‘아니, 잠깐만. 굳이 힘들게 미행할 필요 없지 않아?’
애리얼은 불현듯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이 떠올라 케이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왜 처음부터 이걸 쓰지 않았을까.
애리얼은 휴대폰 액정을 켜고서 익숙한 기능을 실행시켰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확인 불가](일시적인 오류로 호감도 확인이 지연됩니다.)
▷현재 위치: 황성 서관 후원』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말을 걸면 받아 줄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위치: 황성 서관 후원』
넓은 후원의 조감도 위, 강이 흐르는 부근에 두 개의 초상화가 나란히 멈춰 있었다. 애리얼은 그 초상화를 목표로 곧장 서관을 나섰다.
하늘이 맑은 데다 바람도 없었다. 정원수의 잎사귀들은 가지런한 모양을 하고 햇살에 반짝반짝 빛을 냈다.
‘이렇게 날도 좋은데 둘은 또 무슨 말다툼을 하고 있을까.’
초상화와의 거리가 눈으로 보일 만큼 좁혀졌다. 애리얼은 잔잔한 잔디밭을 돌아 나가 샛길을 따라 접근했다. 삼나무가 늘어진 강 옆길로 들어서자 물소리가 들렸다.
그늘이 짙은 아래, 어두운 정복 차림의 두 황족이 보였다.
“……다고 했잖아.”
스카이라의 말투는 여전히 화가 나 묵직하고 신경질적이었다. 그에 데본시아가 조용히 뭐라고 대꾸했다.
대화가 명확하게 들리질 않았다. 애리얼은 삼나무 사이로 숨어 조금씩 전진했다. 다행히 나무가 빽빽한 편이라 들킬 염려는 적어 보였다.
낮게 오가는 두 음성이 선명해졌다.
“왜? 애리얼 허클리도 애인 삼으려고? 그래서 뒷조사까지 했어?”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