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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17화 (17/264)

17화

“내가 뭐 아주 뺏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래. 그리고 나도 네 쪽 사람들 소식은 굳이 안 캐고 다녀.”

“어차피 인맥도 공유하는 상황에 그게 돼?”

“그렇게 예민하게 굴 거면 아카데미 쪽은 내가 발 뺄게.”

“거짓말을 해도 유분수지. 렉스가 돌아오면 영역도 다시 먹을 거고, 하던 짓 잘만 할 거잖아! 황태자 자리 먹었으니까 지방 귀족들도 어지간하면 다 형 쪽에 줄을 댈 텐데, 그깟 백작 공녀가 아까워?”

“그러게. 딱히 걔로 정치질을 하려는 건 아닌데 말이야.”

“…….”

“네 손에 들어간 건 왜 그렇게 좋아 보일까.”

“…….”

“네 약혼녀도 마찬가지고.”

“그만 좀…….”

“근데 가지고 나면 재미가 없더라.”

“……하……!”

스카이라는 헛웃음 같은 한숨 소리를 터트리더니 낮게 욕을 뇌까렸다. 참다못한 분이 임계치에 도달한 것 같았다.

감정을 가라앉히려 해도 소용이 없는지 그의 다물린 입가가 떨렸다.

“……그래……. 아예 내 개인적인 소유가 없어야 속이 시원하겠네. 사람이건 뭐건 모조리 처분해야…….”

머리끝까지 열이 받은 스카이라가 손목에 찬 무언가를 거칠게 풀어냈다.

그러자 데본시아가 좀 놀란 것 같았다.

“진심이야?”

물음에 답하는 대신 스카이라는 손목에서 풀어낸 것을 손에다 쥐고 강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없어도 물살은 느리지 않았다. 이런 가벼운 물건은 금세 흘러가 버릴 테지.

그 의도를 읽은 데본시아가 팔짱을 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씁쓸해하는 듯, 또는 가소로워하는 듯 보이는 미미한 웃음기.

“어머니께 결례야, 스카이라.”

“닥쳐. 어머니를 제대로 추모한 적도 없는 주제에.”

“입장상 내가 추모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거 알잖아.”

“근데 내가 버리든 말든.”

“네가 아끼는 거잖아.”

그 소리에 스카이라는 입을 다물었다. 세찬 감정이 일렁이는 그의 얼굴이 무척 사나웠다.

“……지긋지긋하다.”

분노의 끝에 체념에 다다른 듯이 스카이라가 대화의 방점을 찍었다. 구겨진 미간, 치뜬 눈, 악물린 잇새.

격정에 휩쓸린 스카이라는 손에 들린 것을 강으로 던져 버렸다. 정말로 그럴 작정이었다기보단 데본시아의 행동에 질리고 지쳐 반강제적으로 포기하고 만 느낌이 컸다.

강물에 떨어진 물체가 은빛으로 반짝였다. 가벼워 보이는 그것은 물살에 쉽게 떠내려가고 있었다.

은색의 물체는 공교롭게도 애리얼이 숨은 쪽으로 흘러왔다. 잔잔한 물결에 뜨고 가라앉길 반복하며 그것이 가느다란 몸체를 빛냈다.

원형으로 휘어진 모양새. 체인으로 된 이음새. 물속으로 서서히 잠겨 드는 그것은, 백은빛을 내는 브레이슬릿이었다.

“굳이 버리고 그래.”

“너랑 더 엮일 바에는 버리고 말지.”

“정말 괜찮겠어? 유품인데, 버려도.”

데본시아가 걱정을 내비쳤다. 그러나 그의 말투는 이상하게 코웃음을 치고 조롱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도 스카이라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반대로 동요한 것은 애리얼이었다. 떠내려가는 브레이슬릿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방금 데본시아가 뭐라고 했지……? 유품? 유품이면…….’

죽은 사람이 남긴 것. 고인이 쓰던 물건.

‘그렇다면 스카이라와 관련된 고인은……. 아까 누구라고…….’

“어머니께 결례야.”

“어머니를 제대로 추모한 적도 없는 주제에.”

어머니. 친모. 그의 친모가 그에게 남긴 물건.

그녀가 있는 곳마저 지나쳐 저 아래의 하류로 떠내려가는 것은, 스카이라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다.

그 순간, 애리얼은 사고보다 본능이 앞섰다.

풍덩!

애리얼은 땅을 박차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앞뒤 없이 뛰어들었다. 수면이 깨지며 일어난 세찬 파장에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아직 초봄에 불과한 날씨로 수온은 차가웠고, 겨우 허리에나 올 줄 알았던 물은 그녀의 목을 넘어서는 깊이였다.

애리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결을 가르며 나아가는 그녀의 두 눈은 브레이슬릿을 찾아 빠르게 움직였다.

흔들리는 수면 밑이 혼탁했다. 잠시 잔잔해지길 기다리자 투명해지는 물결 아래로 은색의 둥근 물체가 포착되었다. 은색의 고리가 비스듬히 떠내려가며 침전했다. 저 아래, 강의 어두운 토사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애리얼은 물 밑으로 고개를 집어넣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추락하는 은색 고리를 잡기 위해 물살을 헤치고 강바닥을 헤집었다.

진흙을 향해 내민 애리얼의 손끝에 금속체가 닿는 서늘한 감각이 관통했다. 그녀는 뻗은 손가락을 휘어 고리를 붙잡아 손안에 넣었다. 단단한 강도가 느껴지자 왠지 안도감이 스몄다.

‘잃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다.’

애리얼은 굽혔던 몸을 일으키며 수면을 깨고 나와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축축한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줄기가 애리얼의 흰 얼굴을 적셨다. 젖은 소매로 얼굴을 훔치고 가늘게 눈을 뜨자 햇살이 눈부셨다.

시야가 새하얗게 탈색됐다. 그러다가 서서히 적응하며 멀쩡해졌다. 애리얼의 눈에 삼나무 그늘에서 강변으로 다가온 두 인물이 보였다.

물가 바로 앞에 선 스카이라. 그리고 조금 뒤에 따라온 데본시아.

“미친 거야?”

앞서 있던 스카이라가 황당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물음이라기보단 아예 감탄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가 애리얼에게 타박성이 짙은 눈길을 던졌다.

“머리가 어떻게 된 거냐고.”

“……괜찮아요, 저하. 이래 보여도 저는 정상이에요.”

겨우 대답한 애리얼은 색색 호흡을 몰아쉬며 스카이라와 눈을 맞췄다. 그녀는 물속에선 잠긴 손을 은밀히 움직여 브레이슬릿을 옷 안으로 숨겼다. 지금 내밀면 스카이라가 절대 받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물건이 빠지지 않게 잘 들어간 걸 확인하고서 발을 옮겼다.

애리얼은 물살을 헤치고 강변으로 향했다. 축축해진 손으로 풀밭을 짚고 엉금엉금 기어올랐다. 물먹은 옷이 끔찍하게 무거웠다.

그나마 몰래 얼른 확인한 휴대폰은 멀쩡했다. 외부 충격으로 부서지거나 고장 나지 않는 특수한 물건이라 다행이었다.

애리얼은 다가오는 시선을 적당히 흘리며 흠뻑 젖은 옷자락을 짜냈다.

두 번 말을 걸었던 스카이라는 조용했다.

애리얼은 그의 표정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전에도 본 듯한 애매하게 화나고 못마땅해하는 표정.

‘그러고 보니까 비 오던 날 밤에…….’

그가 던져 버린 걸 주워 오라고 명령한 날. 그걸 찾아온 날.

공교롭게도 애리얼은 그때와 비슷한 상황, 비슷한 꼴이 되어 있었다.

그때는 사파이어, 오늘은 브레이슬릿.

‘이쯤 되면 난 스카이라가 던진 걸 물어 오는 충직한 개가 아닐까…….’

적어도 애리얼 스스로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래도 오늘은 명령이 아니라 그녀의 의지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

“저하, 저는…….”

“춥겠다. 들어가자. 옷 줄게.”

애리얼이 스카이라에게 용건을 말하려는 사이에 데본시아가 끼어들었다. 그는 물에 젖은 애리얼에게 손을 내밀며 친절한 웃음을 건넸다. 그녀에게 물로 뛰어든 이유도 묻지 않고 친절만 보였다.

애리얼은 데본시아의 권유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황자 저하께 꼭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애리얼은 말끝을 흐리다가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부디, 너그러운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완연한 거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있던 스카이라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의 표정이 변했다.

애리얼은 곧장 감기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로 끝끝내 거절을 표현했다.

데본시아는 의아하다는 감상이 들었으나 티 내지 않았다. 그는 친절한 얼굴을 그대로 유지한 채 애리얼을 보았다.

사실 그녀가 그를 받아들였다면 좋았겠으나 오늘은 시기가 아니었다. 더 신경을 쓰기에 그는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강 옆으로 느껴지는 기온이 찼다. 미열이 도는 그의 신체가 휴식을 호소했다.

아쉽긴 해도 다음이 더 중요했다.

“그렇구나.”

데본시아는 너그러이 애리얼의 거부를 포용했다.

“감사합니다.”

애리얼이 허리를 숙인 그대로 이번에는 감사를 말했다.

데본시아는 손을 거두려다 다시 내밀었다. 그의 창백한 손이 바닥을 보고 숙인 애리얼의 얼굴을 살짝 어루만졌다. 그녀의 차가운 뺨에 닿은 그 손길의 촉감은 의외로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데본시아의 길고 흰 손가락이 물기가 어려 냉기가 도는 애리얼의 머리칼 귀 뒤로 살며시 넘겨주었다.

“아프지 말렴. 네가 아프면 내 마음이 안 좋을 것 같아.”

“본의 아니게 걱정을 끼쳐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답을 마치자 황태자의 손길이 거두어졌다.

그렇게 데본시아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삼나무가 줄을 이어 심긴 강 옆의 잔디밭에는 애리얼과 스카이라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침묵 속에 먼저 입을 뗀 쪽은 스카이라였다.

“따라와.”

그의 입에서 뱉어진 건 짧은 명령. 그 후 그는 애리얼의 손목을 덜컥 붙잡고는 발을 옮겼다. 걷는 방향은 데본시아가 간 쪽과 반대였다.

스카이라의 걸음은 빠르고, 손목을 쥔 그의 악력은 뼈마디가 저릴 정도로 강했다.

***

애리얼은 중앙관 1층 객실에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다.

다만 휴대폰과 브레이슬릿이 신경 쓰여 시녀의 도움은 거절했다. 다행히 스카이라도 별다른 제재 없이 그녀 혼자서 씻도록 내버려 두었다.

스카이라는 그녀의 몰골이 멀쩡해질 때까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몇십 분이 지나고, 애리얼은 따로 제공해 준 옷을 입고 말끔해진 모습이 되었다.

황실에서 준 드레스는 감촉이 무척 부드러웠다. 겹겹이 교차된 치맛자락은 검독수리의 날개 같았다.

‘비싸 보인다.’

황실에서 준 것치고는 상당히 단순한 디자인의 드레스였으나 애리얼은 이마저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애리얼은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스카이라가 있는 응접실로 들어갔다.

휴대폰은 드레스의 주머니에, 브레이슬릿은 소매에 숨기고서 애리얼은 문을 열었다.

소파에 앉아 서류 같은 걸 읽던 스카이라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동작을 멈춘 채로 애리얼을 훑어보더니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앞 테이블에다 들고 있던 서류 다발을 툭 내려놓았다.

“앉아.”

그가 턱짓으로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맞은편 자리도 있는데 구태여 옆을 내어 줬다.

무슨 심경의 변화일까.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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