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애리얼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스카이라의 턱짓을 따라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손을 짚으면 서로 겹쳐질 정도의 거리였다.
애리얼과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던지 스카이라의 두 눈이 치켜뜨였다가 불만스럽게 가늘어졌다. 그러나 그는 애리얼에게 더 떨어지라거나 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물에는 왜 들어갔어.”
온기나 걱정이라고는 추호도 없는 음성이었다. 말투도 물론 차가운 쪽이고. 어떻게 들으면 그가 신경질이 난 것같이 느껴졌다.
애리얼은 소매에 숨긴 브레이슬릿을 꺼내 스카이라에게 내밀었다.
한낮의 고양이 동공처럼 가늘어졌던 그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이거 주우러 들어간 거였어?”
“……네.”
“……네, 는 무슨. 이게 뭐라고 주우러 가.”
스카이라의 반응은 생각보다 건조했다. 잠시 놀란 모습을 비치긴 했으나 그는 금세 시큰둥해졌다.
심지어 스카이라는 그녀의 행동이 어이없고 희한하다는 투로만 말했다. 왜 거기 있었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따라오던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때서야 애리얼은 제 어설픈 미행이 전부 들켰음을 눈치챘다. 머쓱한 기분이 된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뺨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내 뒤를 밟은 거? 아니면 데본시아의 뒤를 밟은 거?”
“……황태자 전하도 알고 계신가요?”
“그 눈치 빠른 놈이 모를 리가.”
애리얼의 미행을 황태자도 알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면 데본시아는 그녀가 제 뒤를 밟도록 그냥 내버려 뒀다는 소리가 된다.
애리얼은 그 점에 대해서 뭔가 찝찝한 감상이 들었지만, 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눈앞의 상황이 더 중요했다.
눈앞의 스카이라는 브레이슬릿에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내민 애리얼의 손만이 덩그러니 남아 브레이슬릿을 얹어 두고 있었다. 그가 가져가도록 조심히 모셔 왔는데,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머니의 유품이라면서…….
“저하, 이 물건은…….”
“버린 시점에서 그건 내 물건이 아니야. 네가 가지든지, 버리든지 해.”
그는 냉정하게 브레이슬릿에 대한 처분을 내렸다. 일말의 관심을 끊어 내듯 차가운 태도로.
하지만 그렇기에 그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정말 관심이 없다면 굳이 관심 없는 척을 하고 차갑게 굴 필요가 없었다. 스카이라가 브레이슬릿 쪽으로는 억지로라도 눈을 두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그는 이걸 버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왜 고집을 피우는 걸까.’
애리얼은 스카이라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알지 못했고, 감히 헤아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브레이슬릿을 던져 버린 그의 행동이 충동적이었다는 건 알았다.
그리고 이 브레이슬릿이 충동적으로 버릴 만한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애리얼은 무언가를 잃는 공허함을 어렴풋이 알았다. 기억은 제대로 없으나 이전 세계에 대한 그리움만은 남아 있어서, 부재가 주는 허무를 알았다.
하물며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이라니. 그런 것을 잃는 상실감은 애리얼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어설픈 참견인 줄은 알아도, 그가 이걸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리얼은 한 손에 올려져 있던 브레이슬릿을 양손으로 곱게 모아 들었다.
“버리지 마세요.”
브레이슬릿을 내밀며 부탁하는 애리얼의 목소리가 조금이지만 처연했다. 스카이라는 당황한 눈초리로 그녀를 흘겼다.
“……뭐?”
“저하께서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
“버리지 말아 주세요.”
애리얼은 고집스럽게 요구하며 예의 바른 자세로 은빛의 고리를 끝까지 건넸다. 스카이라가 고집스럽게 군 만큼 완고하게 버티며.
내내 큰 반응이 없었던 스카이라가 이번에는 적잖이 동요했다. 그는 애리얼을 가소롭다는 듯이 보다가도 희한해하며 눈을 떼지 못했다.
“왜…….”
의문스러워하는 그에게 애리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하께 중요한 물건인 것 같아서요.”
“고작…… 그런 이유로 물에 뛰어든 거라고?”
스카이라의 말에서 다른 이해관계나 이득을 볼 셈 없이, 고작 그딴 이유로 그런 짓을 벌인 거냐는 비난 아닌 비난이 느껴졌다. 잘 들으면 그녀를 향한 야단 같기도 했다. 걱정이 서린 것도 같아 정겹게 들리는 말이었다.
애리얼은 묘하게 웃음이 나서 입꼬리를 휘었다.
“네. 저에겐 더없이 충분한 이유였습니다.”
스카이라를 보던 애리얼의 조용한 얼굴이 방긋 웃었다. 고운 눈이 사르르 접히고 분홍빛인 입술이 해사하게 곡선을 그렸다. 가지런한 이가 천진한 웃음을 짓는 입술 새로 살짝 드러났다.
스카이라는 순간 숨을 멈췄다.
애리얼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자 머릿속이 충격으로 깨끗하게 비워지고 말았다. 만난 이후로 줄곧 맹하니 표정 없던 얼굴이 웃는 것이, 이토록 화사할 줄 몰랐다.
해맑게 웃는 애리얼과 달리 스카이라는 낯을 굳혔다. 그는 기분이 몹시 이상해서 인상이 써졌다. 손마디가 저릿저릿하고, 속에다 망치질을 당한 듯 가슴이 쿵쿵 울려 댔다.
속이 울렁거려 욕지기가 치미는 기분. 이어 목부터 머리까지 화끈하게 열이 오르는 느낌이 났다.
모르는 감정, 생소한 감각에 치받혀 뇌가 정상적인 사고를 못 했다.
화가 났을 때처럼 흥분한 상태인데 뭔가 조금 다르다.
스카이라는 무심코 안아버릴 듯 애리얼을 향해 뻗어진 제 팔을 인지하고는 황급히 저지했다.
애리얼을 어떻게든 하고 싶다는 기이한 욕구가 들끓어 그의 이성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고고한 황족의 품위가 곧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는 오히려 품위 따위는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치밀었다.
‘……내가 미친 건가?’
스카이라는 혼란스러웠다. 제 안에 통제되지 않는 무언가가 마구 날뛰었다.
그는 저 예쁘게 웃는 얼굴을 빨리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싶었다.
우우우웅-
드레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애리얼만이 알아듣고서 잠시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미소를 거두고 시선을 돌리자 스카이라는 드디어 말할 여유가 생겼다.
“그것만 두고 나가.”
냉랭한 명령에 돌아가던 그녀의 시선이 다시 원위치했다. 스카이라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눈이 맞으면 아까처럼 말도 못 하는 상태로 되돌아갈 것 같았다.
그는 저 까만 눈동자를 잠시도 견딜 수가 없었다.
스카이라는 애리얼의 손에 올려져 있던 브레이슬릿을 빼앗듯이 주워 갔다.
“안 버릴게. 됐지? 나가.”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보던 애리얼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저하.”
자리에서 일어난 애리얼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남겼다. 조용히 물러나는 걸음은 거슬리지 않게 적당히 빨랐다. 문 여닫는 소음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녀가 떠나고 나자 스카이라의 눈이 원망스럽게 빈자리를 훑었다. 소파의 옆자리서부터 닫혀 버린 문 사이까지.
코앞에 있을 때는 빨리 가 버렸으면 싶더니, 막상 떠나 버리니 야속하게 느껴졌다.
스카이라는 제 이중성에 진저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는 차분해지려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손안의 브레이슬릿을 시야에 담고서는 되레 심란해져 버렸다.
“버리지 마세요.”
“저하께서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빌어먹게도 중의적으로 들리는 말이었다. 브레이슬릿 말고 꼭…… 저를 가지라고 하는 듯이.
전혀 그런 뜻이 아닌 줄 아는데도,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스카이라는 애리얼이 건넨 은빛 고리를 꽉 쥐었다. 힘이 너무 들어가서 금속체의 딱딱한 겉면이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래도 그는 힘을 풀지 않았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릴 때까지 세게 움켜쥐었다.
브레이슬릿은 어머니가 스카이라에게만 남긴 유품이었다. 오로지 형만을 편애했던 어머니가 마지막에는 저에게만 유품을 남겼다.
그래서 의미가 있었던 물건이고, 데본시아가 수없이 빼앗으려 심통을 부린 물건이기도 했다.
데본시아가 그러는 이유는 이 물건 자체가 탐나서도, 어머니를 그리워해서도 아니다. 독점욕이 강해서가 첫 번째 이유이고, 스카이라가 아끼는 것들을 빼앗으면 재미있기 때문이라는 게 두 번째 이유이다.
고작 그딴 이유로 유품을 탐냈다. 좋은 걸 훨씬 많이 들고도 끝없이 그의 것을 빼앗았다. 지금도 여전히.
데본시아는 그렇게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으며, 끝없이 열등감만 자극하는 개자식이었다.
‘뒤틀린 성격에 재능 하나는 끝내주게 타고 태어나서 먹음직한 걸 다 먹어 치우는 게걸스러운 악마 새끼.’
그게 그의 형이었다.
차기 황제인 데본시아는 마음만 먹으면 스카이라의 것들을 쉽게도 가져갔다. 그러다 흥이 식으면 처참하게 버렸다. 스카이라가 더욱더 비참해지도록.
아무리 스카이라가 아등바등해 봤자 정해진 수순처럼 그리되었다.
스카이라는 이 유품도 그렇게 될 것 같아서 미리 버리려고 한 것이었다. 빼앗겨 데본시아의 손에 쓰이다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꼴을 목도하기 전에.
그런데 애리얼이 이걸 주워 왔다. 그냥도 아니고 차디찬 강물에 뛰어들어서.
제아무리 백작 공녀에 불과한 신분이더라도 일단은 귀족이라는 지위를 가진 상위 계급의 인간이 그런 짓을 했다.
당연히 스카이라는 애리얼의 노고에 응당한 대가를 줄 생각이었다. 그녀도 그런 계산을 하고서 뛰어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어떤 요구도 없었다. 아예 요구를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 게 목적이 아닌 것처럼, 아무것도 보장받지 못한 주제에 그에게 이걸 돌려주려고 안달을 했다. 아주 고집을 부렸다.
황태자의 비호를 살 수 있음에도 버리고서, 그 아래인 황자의 기분 따위를 먼저 신경 쓰면서.
그녀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천치 같았다.
그런데도 왜인지 그녀의 얼굴이 굉장히 올곧고 순수하게 보였다.
“이해가 안 돼.”
스카이라가 중얼거렸다.
기분이 계속 이상하다. 두둥실 떠오른 것같이 몽롱한데 심장은 속절없이 요동쳤다.
평정이 유지가 안 되니 그 애의 앞에선 황족다운 품위도 줄어들었다. 오만하게 모든 걸 차지하고 군림해야 할 황실의 핏줄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게.
그런데도…….
“애리얼.”
스카이라는 그 애가 싫지 않았다.
***
애리얼은 인적이 드문 복도에서 곧장 휴대폰을 확인했다.
『호감도가 하락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말을 걸면 받아 줄 확률이 높습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합니다.)
좋지 않은 알림. 그 뒤에는 다행히 희소식이 떠올라 있었다.
한 번 떨어졌다가 복구된 호감도를 보며 애리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쁘기보단 한숨 돌렸다는 안도감만 들었다.
크게 일이 벌어질 것 같던 분기점이 그래도 과한 사고 없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옷도 챙겼고, 이제 집에 가야지.”
애리얼이 드레스 주머니에 다시 휴대폰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지이이잉-
휴대폰이 한 번 더 진동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많아집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