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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19화 (19/264)

19화

실시간으로 하트의 개수가 올라갔다.

애리얼은 두 눈을 끔벅거리며 시스템 창을 주시했다.

‘갑자기? 왜?’

뭔가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와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은 지금, 홀로 호감도가 상승했다.

애리얼은 잘못 본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몇 번을 봐도 스카이라의 하트는 하나 반이 아니고 두 개다.

당장 한 것도 없는데……. 있다면 브레이슬릿을 주워 준 정도다. 그것도 좀 전의 일이었다.

“새삼 감동한 건가?”

조금 뜬금없긴 했지만, 어쨌든 간에 잘된 결과였다.

목표는 세 개. 스카이라의 호감도는 두 개. 목표 수치에 하나 차이로 근접했다.

애리얼은 마냥 기쁘진 않았다.

두 개를 채운 건 좋은데, 아직도 스카이라의 취향이라든가 이런 건 잘 모르겠다. 사실 애리얼은 그와 알게 된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끽해 봐야 일주일 조금 넘었나.

그러니 스카이라의 호감도는 언제든 다시 떨어질 수 있었다.

‘앞으로도 별일 없이 이대로만…… 이대로만 지내면 괜찮은데.’

애리얼은 아무래도 전망이 좋지 않았다. 애초에 좋았던 적 없는 전망이었다. 공략 대상들을 겪고 나서도 미래가 어두운 건 여전했다. 당장 황태자의 성격만 봐도 앞날이 컴컴했다.

애리얼은, 어휴, 한숨을 한 번 쉬고는 담담하게 표정을 굳혔다.

“긍정적으로 보자. 긍정적으로.”

그녀가 다짐하듯 말하자마자 또 휴대폰이 울렸다.

지이이잉-

연이어 오는 알림에 애리얼은 움찔거리며 몸이 떨렸다.

또 뭔 일이 난 건가. 궁금증보다는 피곤함이 덧씌워진 애리얼의 눈이 새로이 뜬 시스템 창을 마주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누가……?’

근처에 있는 스카이라의 위치는 변한 게 없고, 데본시아도 이 건물 내엔 없다. 새로운 접근 알림이었다.

이어서 뜨는 창에 의문이 해소된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 위치: 황성 중앙관 - 1층 서쪽 복도』

황급히 휴대폰을 숨기려는데, 긴 그림자를 드리운 인영이 옆을 스쳤다.

애리얼은 뒤늦게 인기척을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시야로 길게 땋은 금발이 휘날렸다.

익숙하지 않은 남자의 뒤태가 순식간에 복도를 휙 꺾어 빠져나갔다. 귀신이라고 해도 믿을 속도였다.

‘급하게 뛰지도 않는데 어떻게 저런 속도를 낼까.’

경이로운 움직임에 감탄을 하던 사이, 애리얼은 제 손에서 미처 숨기지 못한 휴대폰을 뒤늦게 인식했다.

‘……못 봤겠지?’

그녀의 이마로 식은땀이 흘렀다.

휴대폰이 내는 소리나 액정에 뜨는 화면 같은 건 애리얼 자신만 듣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휴대폰의 외관은 타인이 볼 수 있었다. 이걸 봤다면, 그도 충분히 궁금해할 수 있었다.

그나마 오만 가지 마도구가 존재하는 세상이니 큰 의심을 받진 않을 터였다. 설령 타인의 손에 넘어가더라도 이 안의 내용은 들킬 일은 없었다. 그녀 자신만 볼 수 있으니까. 뺏기거나 잃어버리더라도 다시 찾을 수만 있으면 됐다.

“괘…… 괜찮아. 나쁘지 않아. 괜찮을 거야.”

『*무시에 주의』, 라던 그의 프로필 창 속 설명에 기대어 애리얼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스며드는 불안과 걱정을 죽이며 그녀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숨겼다. 이제는 정말 백작저로 돌아가고 싶었다.

레이신이 왜 황성에 왔는지 잠깐 궁금하긴 했지만, 신경을 더 기울이기엔 몸이 피로했다. 가뜩이나 집 안에서만 살아서 체력도 없는데, 강물에 뛰어들기까지 해서 힘들었다.

애리얼은 멀어지는 그의 초상화를 뒤로하고 화면을 껐다.

애리얼이 황성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할 때, 레이신은 그녀의 정반대 쪽으로 향했다. 유령 같은 속도를 뽐내던 그의 다리가 점차 느려졌다.

목적지에 다다른 그는 문을 열면서 스쳐 지났던 애리얼을 회상했다.

비밀리에 귀환한 남부 영웅, 대공자의 방문으로 황성의 출입이 엄밀히 통제되는 이 시기에 저 여자와 다시 마주칠 줄은 몰랐다. 의외였다. 하지만 그녀를 향한 감상은 그것뿐. 그는 다른 관심이 생기진 않았다.

레이신은 그 애 자체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갔다.

‘묘한 걸 들고 있던데.’

그는 아까 공녀의 손에 들려 있던 희고 네모난 물체를 떠올렸다.

트럼프 카드보다는 크고 두꺼운데, 여타 복잡한 기능이 있는 물건이라기엔 얇았다. 특이하다면 특이하지만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뭘까. 레이신은 그 물건이 궁금하긴 해지만 조사해 볼 정도의 열의까지는 나지 않았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그는 물건을 향한 잠시 동안의 궁금증마저 지워졌다.

레이신은 문을 탁 닫고서 소파에 드러눕다시피 널브러진 인물을 향해 갔다. 누워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헝클어진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친우인 렉시우스. 그가 널브러진 그대로 입을 열었다.

“레이.”

“언제 왔어.”

“보는 사람마다 똑같은 소리네.”

“오래 부재하다가 왔으니까 그렇겠지.”

“거꾸로 말하면 내가 언제 왔는지도 모를 만큼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잖아.”

렉시우스는 픽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볼멘소리를 했다. 실제로 관심이 고파서라기보다, 관심도 없이 의무적으로 묻는 안부에 짜증이 났기 때문일 거다. 의미도 없는 대화가 반복되니 귀찮아졌겠지.

레이신의 물음도 그런 축에 속했기에 렉시우스의 반응이 시큰둥하다 못해 불만에 찬 것이리라.

레이신은 안부 묻기를 때려치웠다. 어차피 그와 어울리는 일도 아니었다.

“남부는? 어땠어.”

“별로였어. 시체가 많아서 썩은 내가 나.”

“그거 말고, 동향.”

레이신이 정정해서 물으니 렉시우스의 눈이 허공을 부유했다. 아마도 남부를 회상하는 중일 거다. 소파 아래로 늘어진 그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세듯 까딱거렸다.

“생각보다 별로. 한 번 더 가야 할 거 같아.”

“그럼 아카데미는.”

“어, 가야지. 가긴 해야지.”

별 열의는 없어 보이는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렉시우스가 남부 정세 쪽에 뜻이 있냐 물으면 그쪽도 아닐 거다.

렉시우스는 그저 자신의 명성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해치우고 있을 뿐이었다. 쌓은 명성이 안정기에 접어들면 그동안 모은 재물로 한량 같은 삶이나 영위할 인간이었다.

‘최근 황태자 쪽 줄을 타는 걸 보니, 그래도 정계를 아주 떠날 건 아닌가.’

전쟁에 나갔다 온 눈앞의 남자는 황제 측의 세력에 가까웠다. 바뀔 세력에 발을 뻗치는 걸 보아 하니 제 나이 젊음을 알긴 아나 보다.

짐작이 현 정세에 다다르자 레이신은 머리 굴리길 멈췄다. 섣부른 짐작은 판단을 그르쳤다.

레이신은 상대의 행동을 보고, 되도록 명확한 것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기실 그 이상으로 그가 타인에게 관심이 없기도 하고.

오늘은 그냥 벗의 얼굴이나 보고자 왔다. 전쟁에서 돌아온 친우를 맞는 정도는 해야 했으니까.

그런 마음을 먹었다고 레이신이 딱히 살가운 말을 할 줄 아는 건 아니었다.

조금 길게 침묵이 지나갔다.

레이신이 묵직하게 입을 닫고 있으니 반대편의 렉시우스가 한숨을 쉬었다. 이후 이마를 긁적이다 눈을 감는다. 그는 레이신과의 마땅한 대화거리를 찾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와서 몰랐는데, 황태자, 아프다며.”

황실의 내밀한 소식을 내뱉는 렉시우스의 입에 레이신의 무표정이 한참 만에 깨졌다. 노란색 눈동자를 담은 눈이 약간이지만 커졌다.

“아프다고?”

반문하는 레이신에 되레 렉시우스가 희한하다는 얼굴을 해 보이다 눈썹을 찌푸렸다.

“계속 수도에 있던 놈이 그런 것도 몰라? 무심한 것도 정도껏 해라.”

“아니, 그거랑 별개로 이해가 안 가. 황태자가 아플 일이 있다는 게 좀 이상한데. 마력이 고갈 난 것도 아니고.”

“나도 이상하긴 한데, 어쨌든 아프다더라. 선전용 거짓말은 아닌 것 같던데.”

그렇다면 더 이해가 안 됐다. 그 정도 방대한 마력을 지닌 자가 제 상태 하나 못 고치고 아프다니. 어지간한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납득은 어려웠다.

추측만 해 봐야 답도 없고, 황태자 본인에게 묻는 게 차라리 빠를 것 같았다.

레이신은 데본시아에게 들러야 하나 생각하다가, 돌연 아까 스친 인물을 떠올렸다.

흑발. 하얀 얼굴. 까만 눈동자. 긴 속눈썹. 조용한 표정. 스카이라가 타고 있던 황실의 차 안에서 마주친 여자.

황태자를 떠올리고 그녀를 떠올리자 묘한 추측이 피어올랐다.

어릴 적부터 익히 지속되던 데본시아의 나쁜 버릇. 남의 것을…… 특히 형제의 것을 탐하는 지독한 습관.

그것 때문에 아픈 건 아마 아닐 거다. 하지만 아예 관련이 없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저 추측에 불과할 뿐이나, 이상하게 날카로워진 레이신의 감이 그녀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스카이라가 어떤 여자를 데려왔어.”

레이신이 애리얼을 언급하자 이번에는 렉시우스의 표정이 깨졌다. 휘둥그레진 그의 눈동자는 레이신과 같은 황금빛이었다.

“여자?”

“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스카이라 쪽 사람 같았어.”

“진짜 여자라고?”

레이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렉시우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어떻게 생겼는데.”

“머리카락은 검은색. 눈도 검은색이고, 피부는 햇볕을 못 쐰 것처럼 창백해. 키는 평균이고, 체형은 가늘어. 표정은 그다지 없는 편이고…….”

“그리고 또.”

말끝을 늘이는 그를 향해 렉시우스가 성급하게 재촉했다. 레이신은 잠시 그답지 않게 어물거리다 못다 말한 문장을 이었다.

“예쁘게 생겼어.”

그 발언을 듣자 렉시우스는 확연하게 놀란 티를 냈다.

“예쁘다고? 네가 예쁜 것도 알아?”

“그냥 그렇게 느꼈어.”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고…….”

렉시우스가 입을 길게 찢으며 웃었다. 흥미가 동했다는 표현이었다.

“최근엔 어디서 봤는데? 여기 있어?”

“아까 복도에서 지나쳤어.”

아까 복도, 까지만 듣고 렉시우스는 단박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소파를 뒤엎어도 안 일어날 것 같더니, 그는 벌떡 기립해선 문까지 갔다.

레이신은 렉시우스의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를 쓱 움직였다.

“어디 가.”

“아까 복도에 있었다며. 보러 가야지.”

방금까지만 해도 지루함에 빠져 있던 렉시우스의 황금색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그가 만면 가득 흥미를 내비치며 문을 열고 나갔다.

***

에리얼은 중앙관 정문을 나서자마자 준비된 차량이 눈에 보였었다. 이번에도 황실의 황금 독수리가 박힌 황실 전용 클래식 카였다. 황성이 그녀에게 제대로 귀빈 취급을 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애리얼은 커튼을 슬쩍 들치며 창밖을 보았다.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차 밖으로 일정한 간격의 나무들이 지나쳐 갔다. 아직 황성 안이었다. 백작저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은 더 달려야 했다.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리겠지?’

애리얼은 커튼을 놓고 좌석에 몸을 기댔다. 푹신한 감촉과 잔잔한 진동이 졸음을 몰고 왔다.

요람처럼 안락한 내부였다. 황실의 차라 그런지 승차감이 무척 좋았고, 기사의 운전도 훌륭했다.

‘누가 준비해 준 걸까. 스카이라? 황태자의 초대로 왔으니 황태자가 해 준 건가? 아니면 그냥 황실에서?’

정확히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추측하다 보니 머리가 서서히 무거워졌다. 꾸벅꾸벅 졸리기 시작하자 애리얼은 별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한숨 자고 나면 백작저에 도달해 있길 바랐다. 하지만 그 바람은 얼마 가지 못해 깨어졌다.

쾅! 쿠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체가 요동쳤다. 사고라도 난 것 같은 굉음과 가해진 충격에 애리얼은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강한 기시감이 애리얼의 몸을 관통했다.

스카이라와 함께 처음 황성으로 향한 날이 삽시간에 뇌리를 채웠다. 그때도 시끄러운 소음과 함께 차가 멈추었었다.

‘설마, 그때 그 사람이…… 또?’

차가 멈춘 것을 확인한 애리얼은 몸을 기울였다. 앞자리로 통하는 작은 창을 밀어 열자 앞좌석이 보였다.

창 너머 운전기사의 어깨가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 어깨 너머, 차의 앞 유리로 보닛 위에 누군가 쭈그려 앉은 것이 보였다. 잘 훈련된 기사처럼 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주먹을 뻗어 쿵쿵 앞 유리를 두드렸다. 문 열어,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남자의 자세 때문에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강렬한 색의 적발이 애리얼의 눈을 사로잡았다.

애리얼이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누구지?’

첫인상은 지금껏 만난 인물 중 제일 심상치 않았다.

도적도 아니고 갑작스럽게 달리는 차를 붕괴시킬 기세로 멈추다니…….

그의 행동이 일전에 만난 레이신처럼 차를 얻어 타려는 의도는 아닌 듯싶었다.

지이이잉-

휴대폰이 울렸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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