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공략 대상…….”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네 줄로 된 목록 중 비어 있는 세 번째 칸의 주인일 것이다.
애리얼은 작은 창으로 앞자리를 살피며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공략 대상에 대한 정보가 해금되었습니다.』
『공략 대상
*[데본시아 본 엘리오스 르블레탄]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렉시우스 크레시앙]
*[레이신 디 솔렘]』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세 번째 자리가 해금되어 있었다.
애리얼이 얼른 프로필을 확인하려는데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진해지더니, 쩌적, 앞 유리가 부스러졌다. 그 투명한 잔해가 좌석으로 떨어졌다.
‘무슨 힘이 저렇게 세…….’
애리얼은 놀라는 이상으로 두려워졌다. 방어술을 두른 유리는 현대의 강화 유리보다도 강도가 높았다. 근데 그걸 주먹으로 때려 부수다니.
뚫린 유리 틈새로 남자의 웃는 입술이 슬쩍 보였다.
“대공자 저하! 이러시면 위험합니다!”
“입 다물고 내리자. 잠시면 끝나니까.”
“하지만…….”
“너보고 하는 말 아니야. 너 말고 뒤에.”
떨궈져 있던 남자의 고개가 서서히 들리며 황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의 노란 눈이 정확하게 애리얼의 얼굴이 보이는 작은 창을 향했다.
“너보고 하는 말이야.”
묵직한 저음이 고막을 후려갈겼다. 목소리만으로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높은 지위의 귀족이 가지는 위압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겐 전장귀 같은 살기등등한 기세가 있었다. 피를 보는 데 익숙하고 죽음에 덤덤한, 잔학무도하면서 참상에 무딘 기색 말이다.
애리얼은 낯선 남자의 얼굴을 보다가 운전사를 보았다. 핸들을 잡은 기사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애리얼에게도 봉변이지만, 운전사에게는 까무러칠 만큼 더 심한 봉변일 거였다. 귀족도 아닌 한낱 운전기사는 작은 반항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이대로 남자를 무시하고 길을 가는 건 불가능했다.
결정을 내린 애리얼은 되도록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내릴게요.”
남자를 향한 말이었다. 운전사에게 넌지시 신호를 주는 말이기도 했다.
굳어 있던 운전사는 망설이다가 상석의 문 잠금을 풀었다.
애리얼이 문을 열고 하차하자 차 위를 지키고 있던 남자가 훌쩍 뛰어내렸다. 그가 있던 자리는 거의 박살이 나 있었다.
찌그러진 보닛, 반쯤 떨어져 나간 범퍼, 깨진 차창.
도대체 뭘 했기에 차를 저렇게 다 때려 부숴 놨는지. 운전사가 안 죽은 게 용하다 싶은 수준이었다.
반파된 앞부분을 경악하며 보는데 애리얼은 돌연 턱이 잡혀서 돌려졌다. 그녀는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과 억지로 마주했다.
상대를 갈가리 분해할 것 같은 패기가 엿보이는 시선.
그 눈 외에 다른 이목구비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잡힌 건 턱인데 목이 졸리는 느낌이었다.
남자가 상체를 숙였다. 애리얼의 얼굴을 보려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 낯선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자 오른쪽 귀에 달린 은색의 체인 이어링이 드러났다. 아래쪽 체인에 가느다란 막대 모양의 날붙이가 이어져 있었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거렸다.
어쩐지 양아치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장신구였다. 이어링은 남자의 신분은 귀족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귀족적으로 굴지는 않을 거란 강한 암시를 줬다.
“레이신이 예쁘다길래 어느 정돈가 했더니…….”
남자가 애리얼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번뜩이는 동공이 그녀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그가 재밌는 걸 발견한 듯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의 눈꼬리가 보기 좋게 휘었다.
“상상 초월이네. 따라잡은 보람이 있었어.”
씩 웃으며 하는 남자의 말은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애리얼은 그가 내뱉은 문장에서 이상한 구절을 잡아내 되뇌었다.
‘따라…… 잡아?’
그렇다면 남자가 달리는 차를 다리로 따라잡았다는 소리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차를 앞지르고 그 위로 뛰어들었다.
‘……사람 맞아?’
애리얼은 경악스러웠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그녀는 당혹감에 눈을 깜박였다. 줄곧 그의 눈만 바라보다가 뒤늦게 인상을 파악했다.
진한 적발. 그에 어울리는 날카로운 인상. 흉흉하게 잘 벼린 칼 같았다. 잘생겼다고 칭할 만하나, 그의 외관은 감탄하기 전에 숨통을 한번 틀어막는다. 남자는 고압적인 분위기로 사람의 기를 죽였다.
“이름이 뭐지.”
남자가 물었다. 애리얼은 붙잡힌 턱을 겨우 움직여 대답했다.
“허클리 백작가의 장녀…… 애리얼 허클리입니다.”
“애리얼.”
남자가 그녀의 이름을 발음하고는 즐거워했다. 그의 안면에 띄워진 미소가 짙어졌다.
“왕자님이라고 불러 봐라.”
뜬금없는 요구였다.
“……왕자님?”
“썩 나쁘지 않네.”
입만 웃던 남자가 이제는 눈까지 웃었다.
우우우웅-
애리얼이 옷 속에 몰래 숨겨 온 휴대폰이 진동했다. 그의 호감도가 오른 모양이었다.
이걸로 애리얼은 공략 대상을 전부 알았다.
‘별로…… 안 기쁜데.’
만족감이나 성취감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마지막 인물까지 만만한 인간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가 보다.
그런 가운데 남자는 멋대로 만족하곤 애리얼의 턱을 놓았다.
“타.”
차에 타라는 소린가 싶었다.
‘용건은 끝난 건가?’
애리얼은 해방되었다는 생각에 냉큼 차 문을 열고 올랐다. 돌발 상황은 이쯤에서 끝내고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그러나 반대쪽 차 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의 해방감은 조각났다.
남자는 뻔뻔한 낯으로 당당히 차에 올랐다. 그가 애리얼의 옆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기다란 다리를 꼬고 몸을 젖혔다.
“출발해.”
그는 운전사에게 명령까지 했다.
어디로 출발하란 소린가. 애리얼은 그가 자기 집으로 가려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운전사는 말도 없이 차를 몰았다. 찌그러져 움직이긴 할까 싶은 차는 의외로 잘만 갔다. 차가 속도를 높이며 황성 내 부지를 빠져나갔다.
애리얼은 다급해졌다. 대공저가 어디인진 모르겠으나, 이대로 가면 집에는 못 가게 생겼다. 그 전에 그가 자신을 백작저 근처에 떨궈 주고 갔으면 좋겠다. 애리얼은 좀 걸어도 상관없었다.
“대공자 저하.”
“그건 또 언제 듣고 대공자래.”
남자는 눈도 돌리지 않고 고개를 젖힌 그대로 대답했다. 아까부터 대단히도 뻔뻔하다.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글쎄. 이름으로 부르게 해줄까?”
“그래도 되나요?”
“건방지긴.”
그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끝내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정의해 주지 않았다.
애리얼은 그를 부르기를 포기하고 용건만 꺼냈다.
“저는 백작저로 가야 해서…… 중간에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근처라도 괜찮습니다.”
“중간에 내리긴 뭘 내려. 누가 백작저로 안 간대?”
“……네?”
“가고 있잖아, 지금.”
남자가 확답했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공저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대공저를 왜 가. 거기로 가면 너, 집에 갈 방법 있냐?”
“아니요…….”
“근데 왜 대공저를 간대. 거기 가고 싶어?”
“아니…… 아닙니다.”
“그럼 걱정 말고 있어. 백작저로 갈 거니까.”
“……?”
애리얼은 버퍼링에 걸린 듯 멈췄다.
‘대공저가 아니라 백작저로 간다고. 대공저는 안 간다고. 본인은 대공자인데…… 대공저에 안 가고 백작저에 간다고? 나랑 같이?’
말만 들으면 그가 백작저에 함께 가겠다는 말 같은데…… 그의 말을,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애리얼은 다시 생각했다.
곱씹을수록 한 가지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공략 대상 중에서도 가장 막 나갈 것 같은 이 사람을 백작저로 데려가다니. 말도 안 되니까. 상대할 기력도 없는데.
‘만약 진짜 백작저에 갈 작정이라면 항의해야 하나?’
“저기요…….”
애리얼이 불렀으나 그는 대답이 전혀 없었다.
애리얼은 남자의 옆얼굴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날렵한 콧날과 턱선,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채 다물린 입. 즐거움을 피력하는 중인 그의 옆태가 불통(不通)하게 보였다.
남자는 지금 이 상황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
저 인간은 말을 들어 먹지 않을 것이다. 애리얼의 예상은 정확했고, 남자는 줄곧 그녀의 거부를 무시할 작정이었다.
애리얼이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내부에서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고, 차는 계속 달렸다.
차를 반파시킨 남자는 태평하게 잠이 들어 있었다.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애리얼은 아까와 같은 자세로 여전히 허공만 보는 중인데 말이다.
황성 부지를 빠져나간 차는 당연하게도 백작저로 향했다. 느닷없는 불청객을 태우고서 고장 나지도 않은 차가 야속하게도 쭉쭉 나아갔다.
세 시간을 넘게 달려 백작저의 부지에 도착했을 때, 애리얼의 넋 나간 표정에는 어느덧 해탈과 체념이 자리했다.
‘결국 데려왔어……. 어쩌지?’
애리얼은 저만 몰래 먼저 내리고 도망칠까 싶었다.
“피곤해 보이던데, 끝까지 안 자네? 웃기다.”
자는 줄 알았던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애리얼은 흠칫거리며 그를 돌아봤다.
그의 호박색 눈이 애리얼을 아래서부터 훑고 올라왔다. 번뜩이는 안광이 오싹했다.
“먼저 내려서 도망치면, 나한테 몇 초 안에 잡힐지 생각해 봤어?”
“도망치다니, 저는 그럴 생각은 전혀…… 추호도 없었습니다.”
“아, 그러세요?”
남자는 애리얼의 의도를 빤하게 읽고서 물었다.
애리얼은 속내를 들킨 것보다 그가 취하는 행동이 더 꺼림칙했다. 여전히 늘어지게 젖혀진 그의 느긋한 상체와 추적의 의지가 없는 꼰 다리. 도망가도 상관없다는 저 태도. 너 따위 잡는 데는 별 힘도 안 든다는 여유 넘치는 오만.
‘아니, 오만이 아니고 자신인가.’
“세워.”
남자가 명령했다. 차는 백작가 저택 입구를 향하는 길목에서 멈췄다.
‘뭘 하려는 거지?’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애리얼의 검은 눈동자가 알게 모르게 떨려 왔다.
애리얼의 앞으로 그의 팔이 휙 다가왔다. 경직된 그녀의 앞을 지나친 굵은 팔뚝이 문의 잠금을 억지로 풀었다.
두두둑.
그의 손에 안전핀이 뽑히는 게 아니라 박살 났다. 그가 여기저기 긁혀 쇳가루가 떨어지는 막대를 뽑아서 좌석 밑으로 휙 버렸다. 잠금장치 주변이 다 박살 난 차 문이 스르르 힘없이 벌어졌다.
열린 차 문으로 밖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스몄다.
애리얼의 도망을 일부러 유도하는 것처럼 그는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오히려 애리얼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아예 닫히지도 않게.
애리얼은 혼란하여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히죽 웃었다.
“난 5초 정도 보는데. 넌 어때?”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