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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21화 (21/264)

21화

애리얼은 핏기 없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툭 던져진 남자의 말을 이해하는 데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상황이 당황스러운 걸 넘어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도주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가고 싶은 눈치길래.”

“…….”

환히 열린 문은 그녀의 탈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팔을 거두고 좌석에 기댔다. 애리얼의 얼굴을 감상하며, 그녀의 선택을 기다린다. 가도 되는데, 가면 5초 안에 잡을 거라는 말을 하고서.

애리얼은 망부석처럼 자리에 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나가 보라고 놓아줘도 섣불리 나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주도 가능성이 있어야 하는 거지, 달리는 차를 앞질러 가로막는 남자에게서 어떻게 도망친다는 말인가.

가만히 앉아만 있으니 남자의 표정이 변했다. 그가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크게 떴다.

“안 가?”

“제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어요. 결과가 정해져 있다면 굳이 시도해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눈치 좋네.”

남자는 흥미가 죽은 듯, 혹은 아쉬운 듯 시큰둥해졌다.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일련의 행동에서 무료함이 엿보였다.

“출발해.”

그가 가볍게 명령을 던지자 차가 출발했다.

덜렁거리는 문짝으로 찬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덜그럭대며 움직이는 차 문이 위협적이었다.

묻지도 않고 문짝부터 부순 남자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오롯이 애리얼뿐이었다.

바람이 칼처럼 옆얼굴을 스쳤다. 애리얼은 펄럭이는 옷자락을 누르고 불안한 자세로 좌석에 앉아 버텼다. 흐트러진 외부 상황에 강한 스트레스를 받아 그녀의 정신이 혼탁해졌다.

‘피곤하다……. 자고 싶어…….’

목적지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전에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 같았다. 힘 빠진 애리얼의 상체가 모로 기울었다.

잡아 주는 손이 없었다면 그녀는 차 밖으로 굴러떨어졌을지도 몰랐다.

타이밍 좋게 남자의 팔이 애리얼의 어깨를 감싸 당겼다. 그녀가 축 늘어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왜 이렇게 약골이야.”

그의 눈이 한심한 것을 보듯 했다. 그래도 그의 팔은 애리얼이 떨어지지 않게 잡아 줬다. 부드러운 손길은 전혀 아니었다. 물건을 다루는 것보다는 조금 상냥한 정도다.

‘호감도가 바닥이구나.’

현실을 파악한 애리얼은 조금 착잡하게 해명했다.

“강물에 수영을 좀 해서…….”

“고작 그걸로 체력이 떨어져?”

“집 안에서만 지내다 보니, 기초 체력이 많이 부족한가 봐요.”

“너, 진짜 하찮네.”

남자가 웃음기 없이 말했다. 그의 손이 애리얼을 잡아 제 옆으로 당겨 왔다.

문에서부터 몸이 멀어졌다. 그와의 거리는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애리얼은 어쩌다 그와 좌석을 나눠 앉게 되었다. 어깨와 옆구리로 단단한 근육질의 신체가 닿았다. 이상하게 꽤 안정되는 감촉이었다.

여전히 문틈으로 몰아치는 바깥바람 소리가 세차지만, 밖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진 않았다.

“감사합니다. 혹시 폐가 안 된다면 잠시만 이대로…….”

“자라. 피곤해 죽을 거 같은 얼굴 하지 말고.”

남자의 저음이 듣기 좋게 울렸다. 그 즉시 애리얼의 시야가 침잠했다. 암시라도 쓴 것처럼 곧장 눈이 감겼다.

차가 멈추고 백작저로 입성할 때까지 그녀의 의식은 계속 흐렸다.

누군가에게 안겨 옮겨지는 감각만 드문드문 인식될 뿐, 머리는 깨어나질 못했다. 피곤하고 졸린 이상으로 몸이 무거웠다.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눈에다 안대를 댄 것같이, 정신에다 억지로 졸음을 대어 놓은 것 같았다.

“…… 가씨.”

들리는 소리가 어렴풋한 기억처럼 아스라했다.

“…… 아가씨 ……”

왜 불러, 카논. 대답하고 싶지만,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전신이 짓눌렸다. 형체가 없는 어두운 무언가에 갇혀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갑갑함.

‘아, 싫어.’

허우적대며 벗어나려 하자 조금씩 조금씩 어둠이 걷혔다.

“아가씨!”

“……응!”

번쩍 눈이 뜨이며 애리얼은 드디어 막혀 있던 목소리를 터트렸다. 한참 만에 터져 나온 대답은 오랜 잠수 끝에 숨을 들이쉰 것처럼 새되고 다급했다.

옆자리의 인물이 머리맡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카논이었다.

걱정 어린 카논의 눈을 보며, 애리얼은 침대 시트를 쓸어 보았다. 차 안에서 어느새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방에 누웠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애리얼이 혼몽한 기억을 더듬으며 상체를 일으키자 카논이 어깨에 숄을 둘러 주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내가…… 잠들었었어?”

“네. 대공자 저하의 품에 안겨 들어오시는데, 미동 하나 없으실 정도로 잘 주무시던데요.”

“내가…… 그랬다고?”

“대공자 저하는 아가씨가 갑자기 잠드셨다고 했어요. 그러니 아가씨께선 현 상황이 좀 혼란스러우실지도 모르겠네요.”

카논이 따뜻한 물을 따라서 건넸다.

애리얼은 투명한 컵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유리컵은 따스했다. 그녀는 그 온기에 기대어 마음을 가라앉혔다.

애리얼은 끊겨 버린 기억을 천천히 되짚었다.

문짝이 떨어질 것 같은 차 안에서 버티다 떨어질 뻔한 걸, 대공자가 잡아 주었다. 그렇게 나란히 맞붙어 앉은 자세로 조금 가다가 잠이 들었다.

정확히 그 뒤부터는 기억이 불명확했다.

뺨으로 스친 공기가 두어 번 바뀐 것은 기억한다. 차에서 밖으로, 그리고 밖에서 저택 안으로.

그게 다였다. 더 기억해 보려 해도 그녀는 기억이 없다.

잠들어서 그렇다기에는 이상하게 꺼림칙했다. 수면 자체가 그녀의 자의가 아닌 것처럼 다가왔다.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기보다 기절과 같이 불가항력적인 일로 잠든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몸이 안 좋았었나?’

곱씹어 봐도 그만큼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기절할 정도로는 전혀…….

“몸은 괜찮으세요?”

카논이 걱정스레 눈길을 보냈다. 애리얼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그럼 옷 갈아입는 걸 도와드릴게요. 아래층에서 대공자께서 기다리세요.”

“……응. 금방 준비할게.”

그가 기어코 저택 안까지 들어온 모양인가 보다. 애리얼은 한숨이 나려는 걸 꾹 참고서 이불을 걷었다.

애리얼의 몸에는 잠옷이 걸쳐져 있었다. 원래 입고 있던 옷과 소지품은 옆 테이블에 고이 놓여 있었다.

애리얼은 기운 없이 테이블을 훑었다. 그러다 발견한 희고 네모난 물체에 눈이 번쩍 뜨였다.

드레스 주머니에 넣어 두었을 터인 휴대폰이 테이블에 올라와 있었다.

애리얼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사용인에게 들키는 건 상관없었다. 이미 휴대폰의 존재를 아는 이들도 있다. 장식품이나 부적 정도로 둘러댄 상태라 관심을 표하는 사람은 적었다.

하지만 높은 귀족들이라면 상황이 달랐다. 마도구에 익숙한 그들은 저 물건을 기이하게 여길 확률이 높았다.

휴대폰을 대공자에게 들키는 건 위험하다.

“카논, 휴대…… 내 부적이 언제부터 저기 있었어?”

“아가씨가 늘 소지하시는 하얀 것, 말씀이신가요?”

“응. 테이블에 둔 저거.”

휴대폰을 가리키자 카논이 슬쩍 확인했다.

“아까 아가씨의 옷을 갈아입히면서 제가 따로 정리해 두었습니다.”

그렇다는 건 카논만 휴대폰을 확인했다는 뜻이었다.

‘다행이다.’

애리얼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카논에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그냥 제 일을 한 것뿐인데요.”

“새삼 고마워서.”

진심을 담아 건넨 말에 카논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금 웃어 보였다.

“저는 옷을 챙겨 올 테니, 잠시 기다려 주세요.”

카논은 조용히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질문이 있을 법도 한데 그녀는 묻지 않았다.

애리얼은 그녀의 배려가 고마웠다.

카논은 눈치가 빠르고 배려에 능숙한 데다 일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자신의 직속 하녀를 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어머니께 말해서 카논의 급료를 올려 달라고 요청해야겠다.’

주인 아가씨로서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래도 그게 최고가 아니겠는가. 애리얼은 흐뭇한 생각을 하다가 휴대폰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아래층에는 공략 대상인 대공자가 있었다.

아까 확인하지 못한 그의 프로필을 지금이라도 봐야 했다. 다른 건 제쳐 두고 애리얼은 휴대폰부터 집어 들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직위: 대공자(황제의 형제인 크레시앙 대공의 장남)

*나이: 18세

*특이한 폭력성에 주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말을 걸면 받아 줄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위치: 허클리 백작저 본관 - 1층 응접실』

역시나 대공자도 황실과 관련된 핏줄이었다. 애리얼은 예상대로라고 쾌재를 불러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이어 『특이한 폭력성에 주의』, 라는 불안한 문구를 읽은 그녀가 손톱을 깨물었다.

‘특이한 폭력성? 보닛이든 문이든 다 때려 부수던 그 포악함을 뜻하는 건가?’

애리얼은 저택의 가장 좋은 응접실에 떡하니 자리한 그의 초상화가 불안하게 보였다.

집 안에 지뢰가 심겨 있는 것 같았다.

똑똑똑.

노크 소리에 애리얼은 휴대폰에서 눈을 뗐다.

“아가씨, 들어가겠습니다.”

“응. 들어와.”

심란한 차에 카논이 돌아왔다.

카논은 제 주인을 공들여 치장했다. 검은색 파티 드레스를 입히고, 흑비단 같은 머리칼을 리본으로 묶어 올렸다.

완성된 애리얼의 모습은 황성 연회에 가도 될 정도로 우아했다. 그래 봐야 당장은 집이니 무슨 쓸모가 있나 싶지만.

애리얼은 제 외관을 확인한 후 차분하게 아래층으로 향했다.

마침 응접실을 나서는 백작과 마주쳤다.

“어머니.”

“애리얼. 대공자 저하께서 기다리신다. 몸가짐을 바르게 하렴.”

“네. 알겠습니다.”

짧게 형식적인 대화를 마쳤다. 늘 그렇듯 백작은 살갑지 않으나, 필요 이상으로 차갑지도 않았다.

애리얼은 한 번 심호흡을 하곤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응접실에 들어가자 곧바로 대공자가 보였다. 그는 문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상석에 앉아 있었다. 애리얼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지루해 마지않던 표정을 바꾸었다.

“내 언령을 깨고 일어났어? 푹 쉬라고 두 시간은 갈 정도로 센 걸 걸었는데.”

“언령? 그게 뭔가요?”

애리얼이 생소한 것에 관해 묻자, 그가 웃었다.

“집에서만 살았다더니……. 백작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인가 보네.”

그가 정확한 대답은 넘긴 채 눈짓을 했다. 앉으라는 듯 흘깃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하지만 애리얼은 그의 옆자리를 피했다. 비스듬하게 위치한 다른 소파에 앉았다. 언령이 뭔지 알기 전까지는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다. 또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행동을 무표정하게 관찰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런다고 내가 네 옆에 못 가는 거 아닌데.”

그가 장난 같은 말투를 취하며 삐딱하게 얼굴을 기울였다. 비웃듯이 비틀려 올라간 입꼬리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가소로워하는 눈길로. 그녀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그냥 옆에 오지?”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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