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22화 (22/264)

22화

렉시우스의 목소리엔 웃음기가 없었다. 살벌한 저음이 위협을 취하자 솜털이 곤두섰다.

그럼에도 애리얼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부동의 자세로 버텼다. 그의 눈이 차원이 다르게 사나워지는데도 그녀는 모른 체했다.

이곳은 백작저다. 아무리 대공자여도 멋대로 굴지는 않을 것이다.

“언령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뭐?”

“제가 잠든 것이 언령이라는 힘 때문이라면서요.”

“…….”

“또다시 무력하게 불가항력으로 기절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언령에 관해 설명해 주셨으면……. 부탁드립니다!”

애리얼은 사뭇 진지한 태도였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잠재우는 언령이라는 힘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의지를 다진 모습이었다.

렉시우스는 다부진 표정으로 입을 다문 애리얼을 희한하다는 듯 보다가, 일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웃는 소리는 호탕하기만 해서 되레 애리얼을 당황케 했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그녀를 내버려 두고 홀로 박장대소했다. 고개를 젖히고 적발을 쓸어 올리며 호쾌하게 웃음소리를 내다가, 이후에는 이마를 짚었던 손을 미끄러트려 눈을 가리고 큭큭 숨을 죽여 웃어 댔다.

영문을 모르는 애리얼은 제가 무슨 실수를 했나 싶어 창피해질 지경이었다.

그로부터 몇 초가 더 지난 후에야 그는 서서히 웃기를 멈췄다. 느리게 호흡을 고른 그가 웃느라 눈물이 고인 눈가를 대충 훔쳐 냈다.

“아……. 오랜만에 웃겨 죽는 줄 알았네.”

그의 입에서 드디어 웃음소리가 아닌 말이 나왔다. 한바탕 웃고 나서 나른해진 어조였다. 애리얼을 바라보는 눈빛이며 표정도 많이 느슨해져 있었다.

“언령이란 건 말 그대로 언어적 명령이야. 다만 강제적 효과가 조금 있지. 지휘관이나 상관이 자기 부하들을 복종시키기 쉽게 해 주는 거야. 명령에 즉각 반응하도록 만들고, 필요하다면 행동을 어느 정도 강제하기도 해. 순간적인 돌발 행동을 멈출 수도 있고. 부대의 통제를 도와주는 용도야.”

의외로 남자의 잔잔한 목소리는 알아듣기 쉬운 단어를 골라 가며 설명했다.

“대신 그만큼 한계가 명확해서 대상의 거부감이 심하면 잘 안 들어. 단순한 명령만 가능하고, 사용자가 미숙하면 효과도 거의 없고, 남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기절시키는 일은 당연히 못 하지. 상대에게 고통을 주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전혀 아니야. 다만 피곤한 상대한테 쉬라는 명령 정도는 할 수 있고, 꽤 잘 듣는 편이지. 지친 사람은 쉬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거부감이 옅거든. 아까의 너처럼.”

간단히 설명을 끝낸 렉시우스가 미소 띤 얼굴로 애리얼을 바라보았다. 놀리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니, 확실하게 놀리는 얼굴이다.

“그…… 그렇군요.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애리얼은 급격하게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피했다.

결국 렉시우스의 말에 따르면 언령은 한계가 명확하고, 그녀의 걱정처럼 남을 해할 수 있는 능력도 아니라는 거였다. 통제력을 갖춘 조금 강력한 명령일 뿐.

그러니, 애리얼의 걱정은 완전히 허무맹랑한 것이었다는 소리였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서, 필요도 없는 각오를 쓸데없이 진지하게 다진 꼴이다. 강제성도 약한 능력에 대항하겠답시고 눈을 부릅뜨고서, 목소리를 높여서, 기절하고 싶지 않다고…….

무슨 투사처럼 대단한 저항이라도 하듯이.

‘……창피해!’

애리얼은 입술을 말아 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뺨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그럴수록 렉시우스의 눈빛은 집요해졌다. 그의 안면이 짓궂은 웃음으로 물들어 갔다.

침착하기만 하던 애가 놀리기 쉬운 상태가 되어 있으니, 어떻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맛있는 먹잇감이 되어 있는데.

그가 상체를 기울여선, 바닥으로 한껏 숙인 애리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까 뭐라 그랬더라? 무력하게 불가항력으로 기절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렉시우스가 그녀의 말투를 따라 하며 가열차게 놀려 댔다. 이미 창피함으로 죽을 것 같은 애리얼에게 치명상으로 먹혀들었다.

“아, 아뇨……. 그건…… 그…… 제가 잘 몰라서…….”

애리얼은 심각하게 부끄러워 말을 더듬거렸다.

“결코 거창한 의미가 아니라…… 그냥 잊어 주시면…….”

애리얼은 계속 변명했다. 그에게서 도망가고 싶어졌다. 이 방을 뛰쳐나가고 싶다. 검정 눈동자가 회피할 길을 찾아 빙글빙글 돌았다.

그래 봐야 렉시우스는 계속 놀려 먹을 생각뿐인데.

“언령이 무슨 만능 세뇌 능력인 줄 알았어?”

애리얼은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만 끄덕였다. 푹 숙인 얼굴이 빨갛다.

귀엽게. 그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곤 아예 애리얼의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그녀를 담은 눈동자가 반달로 접혔다. 이 애가 정말이지 재밌어 죽겠다는 듯.

“얼굴 빨개진 거 봐. 아주 터지겠는데? 그렇게 쪽팔리냐?”

애리얼은 말이 없었다. 여전히 얼굴은 바닥을 향해 푹 숙이고 또 고개만 끄덕.

그랬더니 렉시우스가 금세 소리 내 웃었다.

“제발…… 그만 웃어 주세요…….”

애리얼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빌었다. 그가 계속 놀려 대니 창피함이 가실 줄을 몰랐다.

그녀는 익어 버린 제 얼굴을 숨기기 위해 무릎을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뒷덜미가 드러났다. 연하게 붉어진 투명한 피부, 연약해 보이는 흰 목선.

그 가녀린 체구에 렉시우스의 눈빛이 묘하게 변모했다.

어느새 뻗어진 그의 손이 애리얼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제 손에 꼬아 감았다가 풀어도 보고, 그 사이로 드러나는 분홍빛 뺨을 집요히 응시하기도 했다.

‘얠 스카이라가 데려왔다고.’

데본시아같이 남의 것을 졸렬하게 빼앗는 취미 같은 건 없는데. 이건 꽤 가로채고 싶었다.

‘친절하게 대해 주면 넘어올까.’

렉시우스는 고압적으로 구는 짓을 잠시 그만두었다. 사나운 얼굴을 나름 친절하게 가장했다.

“모르는 건 아카데미 가서 배우면 되지. 백작 말로는 이번에 편입한다며?”

렉시우스는 화제를 전환하며 대화를 끌어냈다. 고개만 끄덕이던 그녀가 조그만 입을 오물거리며 벌렸다.

“……네. 올해 편입생으로 들어가요.”

“그래. 입학하면 렉스 선배한테 많이 가르쳐 달라고 해라.”

“렉스 선배가 누군데요?”

“네 눈앞에 있잖아.”

애리얼은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나긋하게 웃고 있는 대공자의 금빛 눈동자, 호선을 그린 입술이 보였다. 조금 인자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너그러운 인상에 애리얼의 경계심이 허물어졌다. 애리얼은 무심코 그를 불러 버렸다.

“……렉스 선배?”

“응, 우리 후배.”

그가 처음으로 놀리는 기색 없이 싱긋 웃었다.

애리얼은 그 미소가 희한하게도 꺼림칙했다.

그녀를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연기 같았다. 그런데도 일순 진실해 보일 만큼 훤칠한 미소였다.

그래서 더 위험하게 보였다.

애리얼은 말없이 그를 마주했다. 따라 웃으려 했으나 입꼬리가 잘 올라가지 않았다.

그의 긴 손가락에 걸린 자신의 머리카락이 위태해 보였다.

이 사람은…… 대공자는, 그저 한량 같고 양아치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가벼워 보이는 언사와 과격한 행동 아래 치밀함을 숨기고 있었다.

함부로 믿으면 한순간에 삼켜 버릴 인간.

심각한 기시감이 애리얼의 뇌리를 덮쳤다. 눈앞의 그는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아, 그래. 그 사람이랑 닮았어.’

데본시아.

그의 미소에서 애리얼은 섬찟한 이름을 연상해 냈다.

렉시우스는 황태자와 닮았다. 형제인 스카이라보다, 그가 더 데본시아와 비슷했다.

설령 황태자만큼 음험한 생각을 지니고 행동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꽤 유사했다. 다른 의도를 숨기고서 친해지자며 상냥함을 가장했다.

애리얼은 익숙한 거부감을 느끼고 몸을 물렸다. 아주 약간의 움직임.

잠깐의 회피를 귀신같이 포착한 렉시우스가 어쩐지 삐친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매끈한 호선이던 그의 입술이 삐딱선을 탔다. 검지에 배배 말았던 흑발도 휙 풀어 버렸다.

“싫으면 말고.”

말투마저 확 바뀌어 퉁명스러웠다. 연기를 금세 집어치운 그는 아까보다 훨씬 솔직하게 느껴졌다. 데본시아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이쪽이 확실하게 편해서, 그제야 애리얼은 표정을 풀었다. 옅게 미소를 머금고서 그를 보았다.

“말씀 감사합니다, 선배.”

애리얼이 용기 내어 선배라 불렀더니 그는 잠시 말이 없어졌다. 가만히 애리얼을 응시하고 있다가 느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편이 더 먹히나.”

그는 애리얼에게 다 들으라는 듯 정면으로 마주하고서 입을 움직였다. 잠깐이라도 연기했던 걸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애리얼은 호응해 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만들어 낸 친절보다는 솔직한 쪽이 편했으니까.

무의식적인 대답이었다.

그 즉시 렉시우스의 표정이 변했다. 같잖다는 듯 싸한 웃음을 지어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게 아주 날 홀리려 드네.”

한탄. 혹은 감탄.

“너, 편입하면 꼭 나한테 먼저 와라.”

그가 말했다. 부탁이나 요구가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말이었다. 읊조리듯 고요하면서도 적잖이 위협적이었다.

짙은 황색 눈동자로 매섭게 노려보면서 하는 명령에 애리얼은 혀가 굳었다.

렉시우스는 답을 재촉했다.

“아까처럼 고개 끄덕여야지.”

원하는 답을 종용했다.

물러서기 어려울 듯해 애리얼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이었다.

렉시우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가 미간을 좁히고서 문틈을 노려봤다.

애리얼은 의아해했다.

‘문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갑자기 문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뭔지.

그러길 몇 초. 저 끝에서부터 무언가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때리는 소음. 급한 발소리.

애리얼은 그제야 바깥으로부터 달려오는 소음을 인식했다.

누군가 오고 있었다.

닫혔던 응접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콰앙!

거센 기세로 젖혀진 문이 벽에 닿아 강한 충돌음을 냈다.

누군가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태세를 갖추던 렉시우스의 눈이 돌연 확장되었다.

“……스카이라?”

그가 말한 이름에 애리얼의 시선이 뒤늦게 돌아갔다. 새로이 나타난 인물을 주시하며 까만 눈을 커다랗게 떴다.

초대한 적 없는 아주 의외의 난입자가 헉헉, 거친 호흡을 했다.

“차가, 사고가 났다는 보고가 와서…….”

그가 겨우겨우 숨을 고르며 말을 내뱉었다.

푸른 눈동자는 오직 애리얼만 찾았다. 괜찮은지 확인하는 것처럼.

온통 다급하다.

그가 문틀을 팔로 짚고는 젖은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화려한 금발이 어지럽게 엉켜 붙은 이마에서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뺨을 가로지르고 턱선을 적시며 뚝 떨어졌다.

정장 사이로 비치는 옷 안의 셔츠가 다 젖어 있었다. 꼭 몇백 미터는 질주한 사람 같았다.

“너…… 설마 뛰어서 왔냐?”

렉시우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