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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23화 (23/264)

23화

마법이란 것은 아주 편리하여, 많은 일에 유용하다. 그 유용함은 많은 사람을 마법에 의존하게 했다.

그렇기에 마법은 가끔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고는 했다.

이를테면 귀족들. 혹은 황족들.

고순도 마력을 지닌 그들은 급할 때 도구나 기계를 사용하기보다 마법을 우선했다. 도구나 기계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일 경우에도 말이다.

보통 이성이 흐려져 감정이 앞섰을 때 그런 판단을 내렸다.

지금의 스카이라가 그런 경우였다.

애리얼이 탄 차가 박살 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색이 되어 뛰쳐나갔다. 앞뒤 사실 확인도 없이 무작정 급했다.

하던 일조차 팽개치고 황성을 나설 때, 그는 차량을 이용하는 대신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조사원을 보낼 생각조차 않고 직접 현장까지 간 것이었다. 그것도 하루에 여러 번 쓸 수 없는 고위 마법을 써서.

심지어 그와는 상극인 계열의 마법이라 마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두 번은 못 쓸 마법이었다.

하지만 사고가 마비된 그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발견한 건 황성으로 돌아오던 중 엔진이 망가져 멈춘 듯한 차량과 얼떨떨해하는 운전사뿐.

애리얼을 발견하지 못한 그는 두려움에 빠졌다. 혹시나 그녀가 다쳤을까 봐 속이 탔다.

그때의 스카이라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망가진 차를 탈 수도 없고, 순간 이동을 한 번 더 하기도 어려우니, 그는 뛰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디로 갔어.”

“예? 백작 공녀님 말씀…….”

“그래! 어디로 갔냐고!”

“백작저로 가셨…….”

운전사를 닦달한 스카이라는 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백작저까지 뛰어갔다.

그리하여 스카이라는 5km가 넘는 거리를 전력 질주 했다.

평소였다면 멈춰서 황성에 새로 연락을 넣었을 것이다. 멀쩡한 차량을 보내라든지, 백작저에 전화를 넣으라든지. 애초에 원래의 그라면 한 번밖에 못 할 순간 이동으로 현장에 오지도 않았을 거였다. 조사원이나 보내고 치웠을 게 분명했다. 이번에도 그래야 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뇌는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그는 달리는 내내 차의 나가 떨어진 문짝이나 부서진 창문 등을 떠올렸다. 그 충격을 직접 경험했을 애리얼을 생각하면 심장이 옥죄었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운전사의 말도 그에겐 들리지 않았다.

스카이라는 제 두 눈으로 그녀의 무사함을 확인하지 않으면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덕택에 황족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이며 헝클어진 머리칼은 물론,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다급하게 뛰어다니는 모습까지.

하지만 당장의 그에게 체면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백작의 인사도 무시했고, 저택에 들어와선 대공자의 말도 무시했다.

아예 다른 존재 자체를 배척하고 있었다.

스카이라는 여타 주변의 모든 것들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나 피 맛이 날 정도로 아픈 기도는 별거 아니었다. 산소가 부족해 어지러운 머리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애리얼의 안위뿐이었다. 이 순간에는 그랬다.

오로지 그녀만 선명하게 느껴졌다.

파란 눈이 파티 드레스를 걸친 소녀를 담고서 일렁였다.

괜찮은 것 같다. 괜찮아 보인다. 다친 게 아니구나. 같은 생각을 수없이 반복하고 반복하면서도 스카이라의 가슴속은 쉬이 진정하질 못했다.

한편으로는 이런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은데, 제어할 수가 없었다.

타인의 눈에도 지금의 그는 이상했다.

“야, 스카이라. 너 왜 그래?”

렉시우스가 그를 불렀으나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눈을 한 군데 고정하고서 숨만 가쁘게 몰아쉬었다.

애리얼은 격렬한 감정을 쏟아 내는 그의 눈빛에 움찔 떨었다.

“저하?”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어딘가 혼이 빠진 것처럼 정지해 있던 그도 입을 열었다.

“안 다쳤지?”

한참을 쉰 후에 나온 말은 그거였다. 두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확신이 서지 않아 물었다.

그녀는 얼른 고개부터 끄덕였다. 그러곤 대답까지도 금세 내놓았다.

“네. 저는 괜찮아요.”

짧은 답변에 스카이라는 길게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저 말을 기다려 왔다. 애가 타서 건조하던 속에 안도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주변을 무시하며 폭주하던 정신머리가 겨우 돌아왔다.

혹사당한 그의 몸과 심장이 때늦은 고통을 호소했다. 5킬로를 쉬지도 않고 달린 여파는 참담했다. 늑골이라도 부서진 것같이 아팠다. 어떻게 이 고통을 참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스카이라가 문틀에 기대어 고개를 떨궜다. 그는 기침까지 섞어 가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괜찮으세요?”

애리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스카이라는 거친 호흡이 조금 잦아든 후에야 답했다.

“괜찮아.”

애리얼은 더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스카이라는 마력까지 활성화하며 회복에 집중했다. 미칠 듯이 뛰던 심장이 점차 멀쩡해졌다. 부서질 것 같던 신체의 통증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렇게 일단락이 되니 그는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령, 백작저 응접실에 죽치고 앉아 있는 빨간 머리라든지.

스카이라는 안면 있는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기분이 잡쳐졌다. 끔찍하게 더러워진 기분이 그의 안면까지 드리웠다. 인상을 쓰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넌 왜 여깄어. 남부에 있던 거 아냐?”

“빨리도 묻는다.”

마찬가지로 얼굴을 찌푸린 렉시우스가 퉁명스레 받아쳤다. 그가 양아치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소파 끝에 걸터앉아 거만하게 다리까지 꼰 자세는 도저히 귀족이라 볼 수 없었다.

스카이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그러고도 귀족이야?”

“그러는 너는 뭐 나은 줄 알아? 나한테 뭐라기 전에 네 꼴부터 확인해 봐라.”

렉시우스의 노란 눈이 기분 나쁜 티를 한껏 내며 스카이라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제야 스카이라는 제 외관을 인식했다. 그는 급하게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보지만, 땀에 젖어 쉽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옷도 엉망이다.

갑작스럽게 창피함이 몰려왔다.

스카이라는 응접실에 들어서려던 걸음을 물렸다.

지금껏 품위나 위엄은 버려두고 제멋대로 질주한 것이 파노라마처럼 그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어쩌자고 그랬을까. 체면도 없이.

‘황족으로서 이런…… 이따위 꼴을 보이다니!’

수치심에 얼굴이 끓어올라 폭발할 것 같았다. 렉시우스는 집어치우고 다른 쪽의 시선 때문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걱정스러워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애리얼 때문에.

그녀의 시선이 창피함에 박차를 가했다.

아까까지는 그토록 애타게 찾았는데, 지금은 조금도 보고 싶지 않았다. 스카이라는 그녀의 눈에서 벗어나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그러나 애리얼은 스카이라의 바람과 반대로 움직였다.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저하, 우선 앉으세요. 하녀를 불러서 닦으실 수건부터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애리얼이 그에게 들어오라는 듯 친절하게 손을 뻗었다.

스카이라는 저를 향한 손을 보고서 고개를 들었다.

응접실 문을 사이에 두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스카이라는 금세 얼굴을 돌려 버렸다. 부끄러워하며 애리얼을 억지로 피하는 그의 두 눈이 결국 바닥으로 향했다.

“오지 마.”

그가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단호히 명했다.

애리얼은 반사적으로 놀라 멈추었다.

“……네? 하지만 저하께선 지금…….”

“됐어. 내 옆에 오지 말고, 그냥 거기 있어.”

“그럼 최소한 수건이라도 드릴…….”

“됐다니까!”

스카이라는 결국 목소리를 높여 소리를 질렀다.

냉정하고 위압적으로 굴려 했는데, 동요하는 감정이 드러나고 말았다. 잘난 모습만 비쳐도 모자랄 판에 이런 추한 꼴을 보여 창피했다.

더는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수건은 내가 알아서 가져오라고 시킬 테니까, 제발 가만히 있어.”

스카이라가 나지막하게 조곤조곤 부탁했다. 몹시 생소한 모습이었다. 황족으로서도, 그 개인으로서도.

애리얼은 놀란 눈을 하다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서 물러났다.

지금은 그에게서 멀어지는 게 그를 존중해 주는 일이라 보았다.

“네. 알겠습니다.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그녀가 상당히 거리를 두었을 때, 스카이라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당장은 자리를 피하자.

그가 그렇게 마음먹고 떠나려는 순간, 뻔뻔하게 소파를 차지하고 있는 렉시우스가 보였다.

렉시우스는 뭐 하냐는 듯 멀리서 그를 지켜보다가 애리얼에게 눈길을 줬다. 뻔뻔한 낯짝이 유혹하듯이 은근한 웃음기를 담았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스카이라는 창피함을 상회하는 강렬한 불쾌함이 목구멍으로 치솟았다. 상스러운 욕이 입 안을 맴돌았다. 아예 뱉어 버리려다 이를 악물고 응접실로 재차 진입했다.

스카이라는 어리둥절해하는 애리얼을 뒤로하고, 다짜고짜 렉시우스의 멱살을 붙잡았다.

“너도 같이 나가.”

“내가 왜.”

렉시우스는 당연하게도 인상을 팍 쓰며 거부했다.

그러든 말든 스카이라도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여기 있을 이유도 없잖아.”

스카이라가 협박하듯이 살벌하게 말했다. 형형한 눈이 파랗게 빛났다.

그에 호응해, 렉시우스 역시 흉악한 기세를 내뿜으려 했다. 그러나 그 직전 멈췄다. 렉시우스는 돌연 성질을 죽이고, 상대를 관찰했다.

오늘의 스카이라는 이상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기세였다.

짐작 가는 건 조금 있지만, 실질적인 원인은 아닐 것 같았다. 그의 분노와 동요는 렉시우스가 황실 차량을 파손하고 그의 사람에게 집적거려서 나타내는 불쾌함이 아니다.

그보다는 좀 더, 개인적이고 원초적인…… 이해득실과는 관계없이 드는 비이성적 감정.

누군가를 매개로 터져 나온 비효율성의 극치.

렉시우스의 눈이 유력한 매개일 한 인물을 향했다. 문간에 선 가녀린 체구의 소녀.

“너 쟤 좋아하냐?”

무심하게 툭 던진 말에 스카이라의 표정이 멎었다. 뭔가에 대한 충격으로 아무런 감정도 없이 깨끗하게 비워진 얼굴. 그러다가 조금씩, 감정이 차오른다.

가늘게 찌푸려졌던 눈이 크게 확장되고, 맹렬하게 쏘아보던 눈동자는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욕설을 쏟을 것 같던 입술은 세게 깨물렸다. 시허옇던 얼굴이 불에 덴 듯이 벌겋게 익었다.

떠보았던 렉시우스가 오히려 당황스러워질 정도였다. 그는 얼떨떨해져서 스카이라에게 재차 물었다.

“너, 진심으로……?”

스카이라는 황급히 렉시우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본심을 파헤치는 저 입을 닥치게 만들어야 했다.

강제로 말문이 닫혀 버린 렉시우스는 험악해졌다. 곧바로 스카이라의 손목을 틀어쥐고 떼어 내기 위해 힘줄을 세웠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감정이 자아내는 파급은 강했다. 전장을 구른 그조차도 저항이 늦을 만큼 스카이라는 억센 힘을 발휘했다.

“입, 닫아.”

스카이라가 위태롭게 떨리는 눈을 하고 렉시우스를 협박했다. 그는 깨닫고 싶지 않던 걸 깨달아 버려서 혼란스러워진 상태였다.

당연히 렉시우스도 그의 심리를 눈치채고 말았다.

그때부턴 렉시우스의 페이스였다. 그가 풋내기 같은 모습의 스카이라를 보고 막힌 입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예민한 황자님은 귀까지 달아오르고 말았다.

하필이면 이런 놈한테 가장 먼저 들켜 버려선.

“저기, 두 분…… 뭐 하세요?”

멀리 선 애리얼이 넌지시 말을 던졌다. 치고받을 기세인 둘이 신경 쓰여서 요리조리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나마 다가오지 않는 게 스카이라에게는 호재였다.

그것도 오래갈 호재는 아니다.

스카이라는 렉시우스를 오래 제압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남의 입에 의해서 속내가 다 까발려지게 생겼다.

“……애리얼! 가서…… 수건! 수건이랑 물이랑 옷, 가져와!”

스카이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렉시우스를 막기 어려우니, 급한 대로 애리얼이라도 보내야 했다.

애리얼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두 번 반복해서 대답한 애리얼이 후다닥 복도를 빠져나갔다.

그녀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져서 인기척이라곤 쥐뿔도 없을 때, 스카이라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스카이라는 렉시우스를 내버려 두고 피로가 짙은 얼굴로 근처 소파에 풀썩 앉았다. 마른세수를 하듯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길게 쉬었다. 낮게 욕을 중얼거리며.

그 모습을 옆에서 여유 있게 감상한 렉시우스가 놀리듯 물었다.

“첫사랑이냐?”

“……닥쳐.”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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