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애리얼은 갑작스러운 스카이라의 난입에 적잖이 당황했다.
잠깐 지나자 그의 난입이 저를 향한 걱정임을 눈치챘다. 무척 고마웠다. 애리얼은 엉망인 모습을 하고 뛰어온 그가 조금이라도 쉴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스카이라는 애리얼이 보이는 친절을 거부했다. 다가오지 말라며 밀어내고, 눈도 마주쳐 주지 않았다. 애써 가져온 수건이며 물과 옷도 전부 받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사용인을 통해 넘겨줬다.
애리얼은 조금이라도 그에게 말을 걸어 보고자 했으나 접근조차 못 했다.
얼굴을 보면 큰일이라도 나는지. 스카이라는 스치지도 않고 멀리서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도 시간이 늦었으니 하루 묵고 가시라는 백작의 제안을, 스카이라는 거절하지 않았다. 다만 식사 시의 합석은 거부했다. 그는 제공된 객실과 응접실만을 오갔고, 애리얼을 제외한 인물하고만 대화했다.
일부러 피한다는 걸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애리얼은 불안해서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의외로 스카이라의 호감도는 그대로였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문득 떠오른 추측이었다.
스카이라는 성격상 생색내거나 솔직하게 표현하는 걸 어려워했다. 오늘 직접적으로 걱정을 내비친 일을 그는 견딜 수 없는 건지도 몰랐다.
‘이럴 땐 괜히 찾아가 들쑤시지 않는 게 상책이겠지?’
애리얼은 하릴없이 화면을 두드리다가 프로필 창을 껐다. 공략 대상의 위치가 표시된 백작저의 조감도만 남아 화면을 가득 채웠다.
지도에 표시된 스카이라의 초상화는 계속 응접실에 머무는 중이었다.
응접실에는 그 외에도 렉시우스의 초상화가 떠 있었다. 카논의 말에 따르면 백작도 거기에 있는 모양이었다.
“대체 뭘 하는 중인지…….”
그냥 정답게 사담을 나누는 건가. 혹은 뭔가 모종의 논의를 하나…….
그녀로선 알 길이 없었다.
애리얼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껐다. 그러고는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이대로 스카이라가 자신을 계속 배척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그의 호감도 수치는 캐릭터들 사이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으니, 당장 쫓아다닐 필요는 없었다. 다만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기껏 오른 그의 호감도가 떨어지지는 않을지, 걱정이었다.
“얘를 어째야 좋을까.”
괜스레 두통이 이는 것 같았다. 애리얼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인간관계에 정답이란 건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애리얼은 정답이 필요했다.
“어디서 떨어져 주지 않으려나……. 특별 엔딩으로 갈 수 있는 완벽한 공략집 같은 거.”
지이이잉-
도움을 바란 기가 막힌 타이밍에 휴대폰이 울렸다.
애리얼은 손끝으로 헐겁게 들었던 휴대폰을 꽉 쥐고서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도움말]
화면을 켜자 반가운 문구가 떠 있었다. 부디 내용도 반갑고 도움 되는 내용이길 바라며 애리얼이 알림을 터치했다.
『기본 도움말이 추가되었습니다.』
『▽기본 도움말
……
*한 캐릭터의 호감도가 ♥♥♥♥ 이상이 되면 해당 캐릭터의 개별 루트에 진입합니다.
*개별 루트에 진입하면 타 캐릭터의 호감도를 올리기 어려워집니다.』
익히 보던 도움말 아래, 새로이 추가된 두 개의 문장.
화면을 읽은 애리얼은 경악한 듯 입을 벌렸다.
새롭게 얻은 정보는 그녀가 원하던 방향이 아니었다. 이건 도움말이라기보단 주의 사항에 가까웠다. 앞으로의 공략을 더 머리 아프게 만들 페널티다.
기껏 도움을 얻나 싶어 휴대폰을 켰던 애리얼은 도로 심란해지기만 했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스카이라는 지금 하트가 두 개.’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렉시우스는 하트가 한 개. 레이신은 아예 없고, 데본시아는 오류 상태라 확인 불가.’
애리얼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각기 공략 대상의 상태를 헤아렸다.
현재 스카이라를 제외한 대상들의 진행 상황은 참담한 수준이었다. 만약 스카이라의 루트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최악의 상황이 된다. 지금도 얼굴 한번 마주하기 어려운 레이신과는 영영 접점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애리얼의 지향점이 고루고루 하트 세 개를 채우는 평균적 관계라는 걸 생각하면, 개인 루트는 절대 안 될 말이었다.
‘다른 캐릭터들의 호감도가 채워질 때까지 스카이라랑은 약간 거리를 두는 게 나은가?’
다행히 현재의 스카이라는 애리얼을 피하고 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나 지금의 그녀에겐 고마울 따름인 반응이었다.
‘이 기회에 좀 느긋하게 균형을 맞추자.’
애리얼은 한층 차분해진 심정으로 머리를 정리했다.
특별 엔딩의 조건은 전원의 호감도 세 개 이상. 개인 루트로 들어가는 조건은 호감도 네 개 이상.
호감도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완벽히 세 개로 유지하는 극한의 줄타기 공략을 해야 한다.
“어렵다…….”
애리얼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서로 사이도 좋지 않거니와 성격도 한가락씩 하는 인물들 사이에서 간을 보는 짓이라니.
차라리 무작정 호감도를 올리거나, 아니면 무작정 피해서 방관자가 되거나 하고 싶었다.
“좀 단순히 가면 좋을 텐데.”
게임이 녹록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적성 검사…… 분기는 어떻게 된 거지? 잘 넘긴 건가?’
애리얼은 문득 떠오른 의문에 휴대폰을 뒤적거렸다.
‘보상을 준다고 했었는데?’
제발 공략에 유용한 것을 얻길 바라며 그녀는 시스템 창을 띄우고 지우길 반복했다.
그러나 새로 추가된 정보는 더 없었다.
애리얼은 몇 분 더 휴대폰을 쥐고 있다가 시무룩하게 화면을 껐다.
액정이 까맣게 잠겼지만, 애리얼의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들로 소란스러웠다. 부정적인 전망이나 불안에 찬 걱정이 가라앉았다가도 불쑥 나타나 마음을 뒤엎고 들쑤셨다.
불안이 실타래처럼 엉켰다. 불편해서 애리얼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침대 시트가 푹신하고 부드러웠다. 복잡함이 조금씩 가시고, 졸음이 찾아왔다.
애리얼은 그렇게 잠이 들었다.
***
꿈속에서도 시스템 창의 문구들이 떠다녔다. 걱정은 실체를 갖추지 못하고 무의식을 잠식하고 다니다가 가끔 의식의 영역을 침범했다.
애리얼은 가위에 눌릴 것 같았다.
답답해서 시트를 헤치듯이 그러쥐다가 숨을 헉, 토해 내며 일어났다.
옆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주위가 산만하게 느껴졌다.
애리얼은 가만히 누운 채 눈동자를 굴렸다. 멀지 않은 곳에 옷 준비가 한창이 카논이 보였다.
애리얼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그녀와 눈이 맞았다.
“아가씨, 일어나셨으면 침대에 가만있지 마시고 얼른 나오세요. 일 끝나면 다시 누우셔도 되니까.”
카논은 입으로는 달래는 소리를 하며 다소 억센 손길로 애리얼을 일으켰다.
애리얼의 상체가 억지로 기립했다.
잘 자고 있다가 도중에 일어난 애리얼은 정신이 없었다.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닌 거 같은데?’
의문을 느끼며 애리얼은 자꾸만 감기는 눈을 비볐다.
밖은 아직 어슴푸레한데 어쩐 일인지 느껴지는 분위기는 부산스럽다.
“……무슨…… 일? 있어?”
애리얼이 몽롱하게 잠긴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황자 저하와 대공자 저하께서 저택을 떠나십니다. 백작저의 주인 아가씨로서 마중을 나가셔야 해요.”
카논이 빠르게 설명하며 애리얼의 옷을 갈아입혔다.
사용인들은 새벽녘부터 저택을 나서는 황족과 대귀족을 모시느라 분주했다.
애리얼도 늦지 않게 채비를 마쳐서 본관 정문으로 나갔다.
저택 앞에는 이미 차량이 두 대 도착해 있었다.
사용인들을 뒤로 세워 두고 백작과 함께 나란히 섰다.
문 안쪽에서 두 귀빈이 납셨다. 위엄이 넘치는 자태로 계단을 내려가 백작저의 사람들을 마주했다.
“평안히 주무셨습니까. 간밤에 별일은 없으셨는지요.”
백작이 대표로 나서서 정중하게 안부를 물었다. 둘은 고개만 까닥여 의중을 나타냈다.
스카이라는 밤새 한숨도 못 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혈색은 파리했고, 눈 아래 음영이 짙었다. 밤중에 악몽에라도 시달린 모양인지.
렉시우스의 혈색 좋은 얼굴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도드라졌다.
실제로도 렉시우스의 기분은 꽤 유쾌한 편인 모양이었다. 휘익, 휘파람을 불며 은사자가 박힌 흰 차에 올랐다.
그 후에 심란해 보이는 스카이라가 황실의 검은색 차에 오르려다 멈칫했다. 뭔가 미련이 있는 듯한 몸짓이었다.
애리얼은 괜히 불안해져서 인사하는 척 고개를 숙여 버렸다.
어젯밤 확인했던 도움말과 그의 하트 두 개짜리 호감도가 교차하며 떠올랐다. 자칫하면 그의 독주 체제가 완성될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제발…… 제발 지금은, 그냥 가 주세요!’
속으로 존대까지 하며 바랐다. 그러나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구두 굽 소리가 그녀의 간절함을 뭉개 버렸다.
차에 타려다 말고 방향을 튼 스카이라의 다리가 애리얼의 앞에 와 섰다.
“잠깐 할 말이 있으니까, 따라올래.”
“……네.”
애리얼이 대답하자 그가 앞장섰다. 애리얼은 방법이 없어서 그냥 그를 따라갔다. 둘의 뒤로 사용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따라붙었다.
둘은 조금 오래 걸었다.
본관의 벽면을 돌아 후원과 이어진 길목. 골목길과 같은 좁고 조용한 자리에서 스카이라가 멈췄다.
줄곧 바닥을 보며 걷던 애리얼은 흘긋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파란 눈동자, 섬세한 이목구비와 마주쳤다. 어제는 줄기차게 피해 다니며 꽁꽁 숨기던 얼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이렇게 그녀와 마주했다.
뭐 때문일까. 애리얼은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할 말이 있다던 스카이라는 아직 조용했다.
애리얼은 인기척을 확인하며 잠시 침묵하는 그가 두려웠다. 혹시라도 그가 고백을 꺼낼까 봐, 겁이 났다.
“애리얼…….”
스카이라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드디어 첫마디를 꺼냈다.
애리얼은 긴장한 얼굴로 그의 눈을 피했다. 어제와는 정반대인 모양새였다.
스카이라는 피하는 티가 역력한 그녀를 보고 미간을 구겼다. 그의 오른 손이 애리얼의 뺨을 부드럽게 눌렀다. 돌아가 있던 애리얼의 고개가 그에게로 고정되었다.
애리얼은 억지로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까만 눈을 집요하게 노려보며 스카이라가 입을 열었다.
“……편입은 입학 날짜에 맞춰서 하니까, 4월 10일, 잊지 말고 제대로 갖춰서 참석해.”
그가 말한 건 타인 앞에서 말해도 될 딱딱한 용건이었다. 그에 애리얼은 이상함을 느꼈다. 예상이 어긋났다.
“알겠습니다. 4월 10일, 잘 준비해 가겠습니다.”
대답하며 마주한 스카이라의 눈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게 잠식되어 감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침착을 연기하고 있었다. 속내를 억지로 감추고 냉정을 강제로 끄집어내서.
그가 용건을 바꿨다. 아니, 숨겼다.
“내 이름 달고 편입했다는 거 잊지 마.”
“네. 명심하겠습니다.”
“4월에, 아카데미에서 보자.”
스카이라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선전 포고 같았다.
이제 시작이라는 선전 포고.
옷 속에 숨겨 온 휴대폰이 울리진 않았으나 애리얼은 확신했다.
분기도, 공략도, 4월부터가 시작이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