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두 대의 차량이 정문을 빠져나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드디어 이른 아침의 배웅이 끝났다.
애리얼은 다시 잠을 자겠다는 핑계를 대며 방으로 돌아와 혼자가 되었다.
그렇게 졸리지는 않으나, 왠지 일어나 있는 게 귀찮았다.
애리얼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이불 속에 들어가 휴대폰을 켰다. 밝아진 화면에는 아직 아무 알림도 와 있지 않았다.
“편입까지는 한 달 조금 안 되게 남았나?”
아직은 나름대로 여유가 있었다.
애리얼은 이불 밖으로 손을 빼서 침대 옆의 서랍을 열었다. 따로 정리해 둔 편입 서류를 주르르 꺼내 눈앞으로 끌고 왔다.
이미 여러 번 보았던 내용을 재차 훑던 애리얼의 눈이 마지막 장에서 멈췄다.
스카이라의 서명과 황실의 도장.
애리얼은 자연스럽게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고 말았다.
아련하게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다가,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차가워지던 목소리를. 그녀의 태도를 보고서 굳어 버린 표정을…….
애리얼은 곱씹었다.
스카이라는 어떤 결심을 했으나, 상대가 거절할 것 같아지자 말을 거뒀다. 화가 나고, 실망한 상태로.
그랬음에도 그는 용건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4월 10일. 아카데미.”
스카이라가 다시 보자던 날짜와 장소를 애리얼은 조용히 되뇌었다. 다음을 기약한다는 건, 나중에라도 그 용건을 꺼내겠다는 소리였다.
“뭘 말하려던 거였을까?”
애리얼은 화면에다 스카이라의 프로필 창을 띄워 보았다. 해답이라도 찾아보려는 양 주시했다.
아까의 일이 있었음에도 그의 호감도는 용케 하트 두 개를 유지하고 있다.
데본시아와 있는 걸 들켰을 때는 휙 하고 떨어져 버렸던 호감도인데, 신기했다. 두 개부터는 감정의 깊이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그래서일까. 애리얼은 그의 프로필 속 달라진 호감도 설명이 묘하게 보였다.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많아집니다.)』
‘말을 거는 일이 많아진다…….’
왜인지 불길하게 느껴지는 문장이었다. 이미 앞서 있는 스카이라의 호감도가 홀로 치솟을 전조 같았다.
황립 아카데미는 황성과 가깝다. 백작저와는 거리가 있어 애리얼로선 기숙 생활을 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타 캐릭터와의 만남에 용이하겠으나, 스카이라의 루트에 빠져 버릴 확률도 높았다.
‘대화가 잦아지면 만나는 빈도가 높아질 테고, 피하는 것도 능사는 아니고……. 만약 스카이라가 대놓고 날 호출해 버리면?’
답이 없다.
무려 황족의 부름이니, 백작가 여식에 불과한 애리얼로선 피할 길 없이 곧장 가야 했다.
‘만나는 건 어쩔 수 없어.’
스카이라와의 조우는 앞으로의 진행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다. 만나더라도 거리감을 잘 조절하는 게 중요했다.
신중하게. 예의는 차리면서 그의 호감도가 마구 오르지는 않도록.
생각만 했는데도 애리얼은 또 골이 아파왔다.
그녀은 켜켜이 쌓인 걱정을 길게 한숨으로 내뱉었다.
피할 수 없는데, 즐길 수도 없다.
“난도가 너무 높아……. 갑갑해.”
빨리 기억을 찾아서 돌아가고 싶다. 애리얼은 베갯잇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
3일 후, 황성 북관. 회의장.
까마득한 상석에 앉은 황제가 한 층 아래에 앉은 황태자를 보았다.
“그런 하찮은 안건을 들고 총조회를 소집한 것이냐, 태자.”
눈을 내리깔고 엄중하게 물었다. 제국 최고 권력자가 보이는 분위기는 불꽃처럼 타오르기보다는 얼음장처럼 냉기가 흐르는 쪽이었다. 구태여 묘사하자면 피 칠갑 된 살얼음판이라고 할 수 있을까.
황태자는 황제의 분위기에 주눅 들지 않았다. 그에 익숙하며, 또 그를 닮아 자랐기 때문이었다. 주눅드는 일 없이 능숙하게 언변을 뽐냈다.
“예. 호칭이란 것은 폐하의 말씀대로 하찮고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나 가볍기 때문에 중요하기도 합니다.”
“어떤 부분에서 그렇지?”
“귀족에서 평민 그리고 노예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전반에 걸쳐 모든 계층에서 사용되는 것이 호칭입니다. 가벼운 것이나 바꾸면 사회 전반으로 효과가 나게 마련입니다.”
“하여, 추가하자?”
“예.”
황태자의 대답에 아래층의 신하, 귀족들이 수런거렸다. 귀찮은 일이라 받아들인 것이었다.
새 예법이 추가되면 사용인들의 교육도 추가로 진행해야 했다. 번거로운 일인 것치고 그리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반발이 많을 거였다. 게으르고 나태한 삶을 영위하고 싶은 귀족들은 큰 이득 없이 귀찮은 것을 딱 질색했다.
황태자의 안색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띠고 조회를 지속했다.
“현재는 무소불위의 권력자이신 황제 폐하를 ‘폐하’라 유일하게 높여 부르고 있습니다. 그 아래 저와 대공이 ‘전하’라는 높임을 받고 있고, 황자와 대공자를 포함해 왕국의 왕들이 ‘저하’라 높임받습니다. 그 이하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은 약간의 차등을 두나 높임은 없습니다. 귀족 자제의 호칭도 공자(公子) 혹은 공녀(公女)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충분한 것이 아니더냐.”
“저는 감히 불충분하다 아룁니다.”
“무엇이? 누구를 더 높여 주란 말이냐.”
“제국 산하 왕국의 왕들은 ‘저하’라는 높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제국의 공작가 솔렘, 무하, 샤펠, 이 셋보다 우월하다 할 수 있습니까.”
물음이 아니었다. 단언이었다.
황태자는 제 주장의 타당성을 설명했다.
“제국법에는 그 존귀함을 감히 침해할 수 없는 두 가지 대상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황실의 피와 개국 공신의 피.”
제국법을 논할 때 가장 첫 장에 쓰이는 말이었다. 그 중대함을 알기에 장내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 가운데 황태자의 목소리만 또렷했다.
“왕국의 왕들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개국 공신의 후손인 솔렘, 무하, 샤펠에게도 특수한 호칭을 두어 대우해야 하지 않겠냐는 겁니다.”
“무엇으로.”
“존칭에는 존칭으로. 제국 유일의 세 공작가에 ‘서하(瑞下)’라는 높임말을 붙여 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황제는 푸른 눈을 빛내며 태자를 보았다.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추궁하는 눈이었다. 그리하여 황태자는 멈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높임말은 일상에서 널리 통용되는 것이고, 따라서 하층민들에게도 확연히 각인되는 제도가 될 것입니다. 당장 사용되는 호칭은 계급을 잡아 주긴 하나, 하층민들의 입장에선 호칭만 다를 뿐 결국 모두 같은 ‘님’입니다. 그러니 높임말을 달리해서 질서를 잡는 겁니다. 뒤엎을 수 없는 계층의 각인을 일상에 심어 두고, 그로 인해 지속적인 세뇌 효과를 보도록. 모든 것에 두는 차등의 시발점은 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차등을 두는 모든 계급에 명문화된 다른 높임말을 붙이도록 추진하고 싶습니다. 우선은 세 공작가에 ‘서하’의 존칭을 사용하는 것부터.”
황태자의 건의는 귀족들도 일부 호응할 만한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 깔린 저의를 안다면 감히 찬성할 수 없는 안건이었다.
황태자는 계급을 더욱 철저히 낙인화하길 바라고 있었다. 귀족을 세분화하고, 확실하게 명문화하여, 틀을 만들고 각각 가두는 것이다.
모든 것에 차별을 두기 위한 시작점. 누구나 입에 담는 언어부터 바꾼다. 누구를 상대하든지 제 계급을 체감할 수 있게.
그리하여 힘을 가진 귀족들이 현재 주어진 호칭과 대우에 취하도록. 가벼운 높임말 하나에 집착하도록.
그렇게 서서히 행위 전반을 통제하려 들겠지. 급이 맞는 인간들끼리 무리를 짓게 하여, 위로 조아리고 아래로는 분풀이하도록.
수평적으로도 수직적으로도 고착화하려는 속셈이었다.
“어떻습니까.”
황태자의 눈은 아래의 신하들을 무시하고 황제만을 향했다. 기형적이리만큼 모든 것이 중앙으로 집권된 제국. 그 정점에 앉은 이의 권력을 알았다.
황제만 허락하면 나머지는 누르고 갈 수 있었다.
제국 유일 정점의 서릿발 같은 눈이 황태자를 날카로이 주시했다. 그의 눈에서 제 아들을 보는 너그러움은 볼 수 없었다. 위협을 느끼고, 제 권력의 경쟁자인지를 판가름하는 싸늘한 시선이었다.
“전부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부는 일리가 있군.”
황제는 그의 말을 일부 수용했다. 아들의 가치관은 그와 합치된다. 다만, 아들의 권력을 누르기 위해 약간만 허락하는 것이었다.
황태자도 제 아비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조용히 숨죽였다.
“따라서 제국의 3대 공작가 솔렘, 무하, 샤펠에 대한 ‘서하’의 사용만 허하고, 나머지는 불허한다.”
“존명.”
황태자를 포함한 회의장의 모두가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의 선언으로 안건이 통과되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황태자가 눈을 내리깔고 추가로 존경을 표했다. 연기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가장이었다.
황제는 제 아들을 지나치게 잘 훈련시켰다는 걸 인정했다. 하마터면 그조차 충성스러운 척하는 황태자의 가장을 못 알아볼 뻔했으니까.
하나가 끝나고, 장내는 조용해졌다. 목적을 달성한 황태자는 여유롭게 입을 다물었다.
이후론 하나같이 의미 없는 말만 난무했다.
별 소득 없이 떠들고, 끝내는 이득 없이 흩어진다.
황태자의 청으로 급하게 소집되었던 귀족 총조회는 하나의 안건만을 통과시키고 끝났다. 귀족 및 신하들이 썰물처럼 빠졌다.
조회가 끝난 장에 홀로 남은 황태자는 여전히 올곧은 자세로 자리를 지켰다.
아래에서 보좌관이 그를 불렀다.
“전하, 황제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는 한 칸 위의 황좌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서 화가 나셨느냐.”
“그것은 저도 잘…….”
“화가 나셨을 거다.”
황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보좌관은 제 상관의 태도에 어리둥절해 있었으나, 그저 고개를 숙이고 따랐다.
황태자는 황제의 호출에 곧장 중앙관의 집무실로 향했다.
황제는 보좌관과 사용인을 모두 물리고서 그를 기다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그는 다짜고짜 본론을 던졌다.
“갑작스러운 제도의 격변을 유도하여 제국에 혼란을 야기하지 마라. 하나를 바꾸는 양 기망하여 사회 전반을 뒤흔들려는 네놈의 의도는 악랄하다 못해 치가 떨린다.”
“과찬이십니다.”
“칭찬이 아니다! 감히 제국법의 첫 장을 들먹여 네 악독한 계략을 성취하려 하다니, 기가 차는군.”
“…….”
데본시아는 비꼬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여기서 말꼬리를 잡았다간 신임을 잃을지도 몰랐다. 대공보다 충성스러울 수는 없으니, 유능함이라도 잘 보여 주며 줄을 타야 했다.
그나마 황제와 핏줄이라도 연결되어 다행이었다. 혈연이란 건, 때로는 몇십 년에 걸친 충성보다 훨씬 더 큰 신뢰를 주니까.
속내를 감춘 데본시아가는 그 우월한 오드 아이를 바닥을 향해 내리깔았다.
반발 없이 조용한 그의 태도에 황제가 누그러졌다.
“되었다. 물러가라.”
황제의 축객령에 데본시아는 짧게 묵례한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집무실 문 앞에서는 구불거리는 고동색 머리칼을 소담하게 빗어 꾸민 여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나스타샤.”
그가 이름을 부르니 한달음에 달려오는 소녀의 걸음이 천진하였다. 프릴로 장식한 보라색 드레스가 나풀거렸다.
데본시아는 무표정보다는 조금 살가운 표정으로 소녀를 맞았다.
코앞으로 다가온 소녀가 치맛자락을 쥐고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조회는 어떠셨는지요.”
“나쁘지 않았어.”
데본시아는 짧게 답해 줬다. 소녀는 의문이 해소되지 않은 눈빛으로 그의 옆을 맴돌았다. 드레스의 빛깔을 닮은 보랏빛 눈이 집요하게 그를 좇았다.
“무리를 하신 것이 아닙니까? 소녀는 전하의 이번 안건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구실. 이번에 아카데미에서 발표할 게 필요했거든.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안건이지 않니. 샤펠의 여식인 네게 존칭이 주어지는 일이니까.”
“그런가요? 전하께서 신경 써 주셔서 소녀는 기쁩니다.”
데본시아는 대화를 이어 가지 않고 만들어 낸 미소로 대충 화답해 주었다. 이 정도에도 소녀는 수줍게 양손을 모으고 뺨을 붉혔다.
그는 적당히 애정을 주는 척 봐 주고는 복도로 고개를 돌렸다. 발소리도 내지 않는 능숙한 그의 심복이 다가오고 있었다. 예의 결과를 가져오고 있을 것이다.
데본시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두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그의 심복, 시녀 시에나가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 비전하.”
“언제나 고생이 많아. 전하는 워낙 바쁜 분이시니, 보좌하는 시에나도 그렇지? 요즘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예전에 집에서 기르던 록시가 생각나. 아, 록시는 암말이야. 작년에 다리가 부러져서 안락사를 시켰어.”
아나스타샤가 고상하게 너스레를 떨며 나섰다. 그녀는 황태자와 관련된 인물이라면 언제나 제 사람 대하듯 오지랖을 폈다. 때로는 황태자의 종을 제 사용인 대하듯이 마구 부리거나, 신경을 긁는 모욕을 던지기도 했다.
지금도 역시.
“시에나를 보면 록시가 생각나서 걱정돼. 그렇게 죽을 것같이 열심히 하다가 다리가 부러지면 어떡해?”
아나스타샤가 노골적인 조롱과 하대를 보냈다.
시에나는 치밀어 오르는 반발심을 삼키며 평상심을 유지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굽어봐 주시는 덕분에 저는 괜찮습니다.”
“저런, 더 열심히 해야지. 전하를 보좌해야 할 종인데, 그런 종을 전하께서 굽어보시게 하다니…….”
“죄송합니다. 비전하의 말씀을 받들어 더 열심히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시에나는 감아 놓은 태엽이 돌아가듯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어서, 이젠 익숙했다. 능숙하게 불쾌함을 참아 내며 공손히 시선을 내렸다.
제국의 예정된 황태자비. 샤펠 공작가의 장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온실의 소녀. 가증스럽게 천진한 여자.
아나스타샤 샤펠.
이름을 외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게 싫은 인간을 향해, 시에나는 머리를 숙였다. 구역질이 났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