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그래 봐야 약혼식조차 없이 자리만 유지하는 정치 계약의 상대일 뿐이면서. 고작 껍데기뿐인…… 그저 호칭뿐인 황태자비이면서!’
잘 참는 듯하던 시에나의 속이 결국 분노에 물들고 말았다. 반발심이 불에 기름을 부은 듯이 일어났다.
시에나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이를 꽉 깨물어야 했다.
아나스타샤 샤펠은 정확히 따지자면 황태자와 혼인의 계약을 맺은 임시 약혼녀에 불과했다. 황태자의 총애를 받기는커녕 그의 마음에 들기는 했는지 의문이 생기는 존재였다.
그래도 그녀는 황성에서, 또 사교계에서 황태자비라 불렸다.
‘어차피 거의 기정사실화된 사항이니 상관없다 이거겠지. 샤펠의 위세를 생각하면 호칭을 당겨쓰는 정도야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이제는 아예 샤펠 공작가까지 증오하며, 시에나는 속을 불태웠다.
제발 누군가 저 여자를 무너트려 줬으면 싶었다. 저 높은 오만함이 납작해져 버렸으면. 제발 아무라도 좋으니까.
‘잠깐만. 그러고 보니까, 한 명…….’
아나스타샤에게 저주를 퍼붓던 시에나는 문득 숨을 참았다. 몹시 흥미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이 여자는 고작 백작가 여식 때문에 황태자가 어떤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있는지 알까?’
시에나는 애리얼 허클리에 대해 알게 된 황태자비가 어떻게 굴 것인지, 아주 궁금해졌다.
황태자는 극비에 적성 검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제국법까지도 어기며 결과를 함구시켰다.
이 여자는 황태자의 은밀한 행동 둘 중 어느 것도 몰랐다. 아무리 비의 자리를 차지해도 아나스타샤는 시에나 자신만큼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시에나는 조금이지만 기분이 나아졌다. 황태자비라 불리는 이 여자가 백작가 여식으로 인해 뭉개질 것이 기대되었다. 비웃고픈 마음이 은근한 미소로 나타났다.
“시에나.”
고상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시에나의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묘한 망상에 빠져들 뻔했던 시에나는 냉수 같은 황태자의 부름에 곧장 정신을 차렸다.
“전하, 명령하신 임무를 수행해 왔습니다.”
“그럼 이십 분 후 집무실에서 보고해.”
“예, 알겠습니…….”
“전하, 소녀와 이십 분만 있어 주시는 건가요?”
난입한 목소리에 시에나는 미간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아나스타샤가 애처로운 눈망울을 하며 데본시아의 팔에 매달렸다.
“저는 오늘 전하와 만날 것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십 분은 너무 짧아요.”
“이십 분이 아니고 십 분이야.”
데본시아가 아나스타샤의 칭얼거림을 부드럽게 끊어 냈다. 분명 웃는 얼굴인데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의 심기를 눈치챈 아나스타샤가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그녀는 어린애같이 굴지만 최소한의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아나스타샤의 바로 그런 점이, 시에나는 가장 가증스러웠다.
거슬리게 굴다가도 선을 지켜서 황태자의 곁에 붙어 있는 그녀가. 그 높다란 가문의 입지가. 샤펠의 위상이.
“물러가 있으렴, 시에나.”
황태자가 명하자 시에나는 걸음을 물리고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시녀의 입장이란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직속이라도, 얼마만큼을 신임을 받더라도, 아나스타샤처럼 떼를 쓰거나 애정을 조를 수 없다.
시녀는 아랫것이고 심복일 뿐이었다.
시에나를 보는 아나스타샤의 보랏빛 눈이 방긋 웃었다. 제 우월함을 한없이 잘 알고 있는 눈이었다. 황태자가 한낱 시녀의 편이 되어 주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짓는 웃음이다.
시에나는 자신을 흔한 일벌 보듯이 하는 아나스타샤에게 패배감을 느끼며 물러났다. 쫓겨나는 것처럼 집무실로 향했다.
***
황태자의 집무실 앞.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발소리에 시에나는 일찌감치 고개를 숙였다.
황태자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복도로 들어섰다. 시에나가 집무실에 도착하고 정확히 12분이 지난 후였다.
그의 등장에 통로를 지키던 사용인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창문을 넘어 드는 햇살에 그의 찬연한 금발이 새하얗게 빛났다. 시녀들은 그를 남몰래 훔쳐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진귀한 경험인 외관이 있다는 걸, 황태자로써 배우고 있었다.
“시에나.”
대여섯의 시녀 중에서도 그녀를 호명하는 그의 목소리가 무척 나긋했다. 시에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숨기며 솟아오르려는 입꼬리를 내리눌렀다.
“예, 전하.”
시에나는 공손히 부름에 응하며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앞서는 그의 뒤를 따랐다.
황태자는 예상했던 시각보다 8분이나 일찍 나타났다. 아나스타샤 샤펠, 그 여자가 황태자에게서 매몰차게 떼어 내졌을 생각을 하니 시에나는 실로 고소했다.
하지만 감정을 나타내서는 안 되는 일.
시에나는 무표정을 가장하고서 눈앞에 집중했다. 황태자가 집무실 책상에 앉자마자 그녀는 곧장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애리얼 허클리 백작 공녀의 검사 결과입니다.”
“수고했어.”
그녀의 노고를 가볍게 칭찬한 데본시아가 봉인된 봉투를 뜯었다. 공녀의 친모인 허클리 백작도 모르는 검사 결과였다.
애리얼의 마력의 분류를 약식으로라도 아는 건 그와 측근 몇뿐이었다. 범상치 않은 조짐에 재검을 요구했고, 오늘 나온 상세한 결과 역시 함구될 것이다.
은근한 소유욕을 드러내며 내용물을 꺼낸 데본시아는 결과지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트렸다. 피식거리는 게 아니라 꽤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우아하고 고상한 웃음소리였다.
시에나가 놀란 눈을 했으나 데본시아는 구태여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다.
“호랑이 새끼가 나왔네.”
데본시아가 미소 띤 얼굴로 검사지를 툭 떨어트렸다.
종이가 팔랑거리며 책상 위로 곱게 내려앉았다. 스탠드 빛에 검사 내용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의 웃음을 자아냈던 결과물이다.
「마력 적성 검사 결과
-애리얼 허클리, 백작 공녀
마력 순도: 높음
마력량: 측정 불가(한도를 측정해 내지 못함)
마력 계열: 특정 계열로 정의할 수 없음
지속력: 측정 불가(한도를 측정해 내지 못함)
회복력: 측정 불가(한도를 측정해 내지 못함)
모든 부분을 종합한 결과, 대상의 마력이 무한한 것으로 판명. 마력의 적성 및 한계를 <신성 마법>으로 정의함.」
결과지를 눈에 담은 시에나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말도 안 돼!’
당연하게 예상되었던 일반 마법이 아니다. 혹시나 했던 특수 마법도 아니다.
나올 리 없으리라 여겨 상정도 안 했던…….
“저, 전하! 이건……!”
쾅!
그가 손바닥을 펴고 책상을 내리쳤다. 커다란 손이 결과지를 덮으며 큰 소음을 만들었다.
별안간 울린 충돌음에 깜짝 놀란 시에나의 입이 벌어졌다.
황태자는 그녀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명령했다.
“조용.”
잔잔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왜인지 두려움을 부르는 묵직함이 있었다.
시에나는 놀란 얼굴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데본시아의 안면은 여전히 싱글거리는 미소를 담고 있었다. 그가 퍽 흥미롭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와 같이, 제국 유일의 신성 마법사…….”
그가 잠시 말끝을 흐리다가 정정했다.
“아, 이제 유일하지 않구나. 둘이니까.”
데본시아는 끝까지 웃으며 결과지를 덮었다.
이 결과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애리얼 본인에게조차도.
***
「마력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른 특성을 보인다. 마력마다 특화된 마법 계열도 다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마력 보유자는 마력의 특성을 잘 파악해서 자신에게 맞는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
만일 마력의 특성이나 한계를 무시하고 마법을 사용하면, 그 효과가 잘 발휘되지도 않을뿐더러 마력의 소모만 심해진다.
그래서 행하는 것이 마력 적성 검사.
손끝에서 마력을 뽑아내 적성 검사기에 넣고 순도, 양, 계열, 지속력, 회복력까지 총 다섯 종류를 측정한다. 종합해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판별한다.
검사로 가려낸 인재들은 흔히 네 가지 단계로 나누어 등급을 매긴다.
가장 아래 네 번째 단계는 ‘일반 마법’ 등급. 마력을 지닌 자라면 누구든지 쓸 수 있는 기초적인 마법 응용이 가능한 등급이다. 그리 대단치 않은 위력의 마법을 행하지만 범용성이 넓어 두루두루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소소한 인재다.
세 번째 단계는 ‘특수 방어 마법’ 등급.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난도가 급격히 오르는 단계로, 주로 기사나 용병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한 가지만 파고들어 익힌 인재들이 많아 특화된 분야에서 활동한다.
두 번째 단계는 ‘특수 마법’ 등급. 황족 혹은 극소수의 뛰어난 왕족과 귀족만이 도달하며, 고난도의 마법 활용이 가능한 등급이다. 굉장한 파괴력을 지녔으나, 양날의 검이라 주의해야 한다. 이 등급의 인재는 자존심이 굉장히 높아 다루기 어렵다.
마지막은 신성 마법 등급. 여기까지 마법이 도달하는 자는 유례가 거의 없을 정도로 희귀하다.」
“유례가 거의 없을 정도로 희귀…….”
그 뒤로 더 설명이 없었다.
애리얼은 빈약한 내용에 눈을 게슴츠레 뜨다가 책을 놓았다.
황립 아카데미 밖에서 배울 수 있는 마법 지식이란 고작 이 정도였다.
제국 최대 규모의 중앙 도서관이라 그래도 기대를 걸었는데, 정보의 수준은 처참하기만 했다.
실망스럽기보단 아쉬웠다. 애리얼은 책상에다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편입까지는 고작 이 주일 정도.
그녀는 마법의 기초는커녕 자신의 마법 적성조차 알지 못했다.
‘분명 검사는 받았는데 결과가 안 온단 말이지.’
아카데미 개학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여태 감감무소식이라니.
오죽 답답하면 애리얼은 황태자를 직접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하지만 황성이 어디 쉽게 갈 수 있는 곳인가.
지금까지는 스카이라나 데본시아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지, 아무리 귀족이라도 건국일 정도에나 겨우 초청받아 한번 가는 곳이 황성이었다.
거기로 출근하는 직원이 아닌 이상에야 출입은 불가능했다.
‘황태자는 뭐 하고 있을까?’
대략적인 위치나 확인하자는 마음으로 애리얼은 휴대폰을 꺼냈다. 책상에 이마를 대고서 그 아래로 몰래 화면을 켰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 위치: 제국 수도 중앙 도서관 - 1급 도서 보관소』
애리얼은 자신의 눈이 잘못된 건가 생각했다.
짙게 그을린 피부에 황금빛 장발을 늘어뜨린 수려한 초상화를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기대도 안 한 인물, 그것도 가장 만날 일 없을 거라 봤던 대상이 등장했다. 지금 그녀가 있는 시간대에, 같은 도서관에.
기막힌 우연이었다.
애리얼의 눈이 천천히 움직이는 그의 초상화를 따라갔다. 조금씩 움직이던 그림은 1급 도서 보관소를 빠져나왔다. 초상화가 속도를 높이며 자리를 옮기다 천천히 느려졌다. 그 끝에 도달한 장소는…….
‘도서관 제1 열람실.’
애리얼이 있는 장소였다.
인지하자마자 애리얼은 책상에서 얼굴을 들고 출입구를 응시했다. 거대한 아치형 문이 열리고, 초상화 속의 얼굴이 나타났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