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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27화 (27/264)

27화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애리얼은 팽개쳐 두었던 책을 펴 들고 다급히 얼굴을 가렸다. 방어진을 친 것처럼 책 아래에 숨어 슬금슬금 문 쪽을 훔쳐보았다.

레이신이 시종 하나를 끼고서 열람실 내부로 들어왔다. 긴 머리칼은 저번과 달리 땋지 않고 대충 한 갈래로 묶어 놓았다. 그는 외투 없이 블라우스를 입었고, 단추도 두어 개 풀어 놓았다. 다소 격식을 내려놓은 편한 차림새였다.

‘뭐 하러 온 걸까?’

애리얼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레이신을 주시했다. 그는 앉을 자리를 찾는 것 같았다. 시종이 들고 있는 책의 권수가 꽤 많았다.

‘공부하러 온 건가? 아니면…….’

애리얼이 이런저런 추측을 하는데, 그가 휙 얼굴을 돌렸다. 금색 눈이 공간을 쓱 훑으며 움직이다가 애리얼이 앉은 자리에서 딱 멈췄다.

금빛의 반듯한 눈썹이 슬며시 찌푸려졌다. 그의 눈은 정확하게 애리얼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너 뭐 하냐’ 혹은 ‘그것도 위장이라고 했냐’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반가운 기색은 전혀 아니었다.

애리얼은 노려보는 시선마저 반가울 만큼 레이신과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시선도 오래가지 못했다. 레이신은 그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앉을 자리를 찾아 눈을 돌렸다. 일종의 무시였다.

이윽고 적당한 자리를 발견한 레이신이 움직였다. 그가 창가의 햇빛이 비스듬히 스치는 그늘 자리에 앉았다. 시종이 책을 내려놓고 그에게 한 권씩 펼쳐 건넸다.

애리얼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레이신을 조용히 관찰했다.

그가 뭔가를 적으며 살짝씩 고개를 기울였다. 금빛 머리칼이 너른 어깨에 내려앉았다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그의 경계가 느슨히 풀린 듯 보이는 장면이었다.

애리얼에겐 좋은 기회였다.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고 앞으로도 잘 없을 것 같은 공략 대상이 지척에 있다.

‘말을 걸자. 어떻게든 대화를…….’

마음은 먹었으나 망설여졌다.

다가가서 말을 걸고 어떻게든 호감도를 올려야 하는데…… 마땅한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법에 대해 물어볼까? 마침 도서관이고, 대귀족이라 마법을 잘 알 것도 같고.’

그나마 쥐어 짜낸 대화 구실은 그것뿐이었다. 그거라도 해야 했다. 애리얼은 내용이 부실했던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신은 계속 책을 바꿔 가며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눈치챘을 것이 뻔했지만, 눈길은 조금도 주지 않고 있었다. 애리얼이 자신의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주 바쁜 건 아니지만 방해해선 안 될 것 같은 속도로, 레이신은 노트의 페이지를 채워 나갔다.

애리얼은 그가 적는 것이 뭔지 궁금했지만 훔쳐보지는 않았다.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에게 확실한 여유가 생길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사각사각. 필기하는 소리가 나른하게 울렸다.

***

레이신의 손끝에서 휘갈겨진 필기체는 결코 정갈하다고 볼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악필에 가까운 글씨였다. 단지 빠르고 편하게 쓰기 위해서 손을 놀린 결과였다.

가끔 지나가는 타인의 시선이 그를 스쳤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제 할 일에만 집중했다.

별일은 아니었다. 전쟁 중인 남부에 관해 궁금한 것이 있어 사례 몇 가지를 수집하려 도서관에 왔을 뿐. 뜻밖의 인물을 마주했으나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숨는 행동이 너무 허접해서 조금 거슬렸던 게 다였다.

이어진 사념이 잠시 앞자리의 공녀에게 미쳤으나, 금방 지워졌다. 금색 눈은 줄곧 책을 향했다.

책상에 드리우는 햇빛의 색깔이 진해질 즈음에는 레이신이 필기를 끝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역사서 열댓 권이 펼쳐진 채로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그가 만년필을 내려놓자 시종이 책을 치웠다. 말끔해진 책상 너머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아직도 안 가고 있었나.’

레이신은 무심코 눈길을 줬다. 흰 뺨을 가리며 드리워진 그녀의 흑발에서 윤이 났다. 질 좋은 실크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만지면 손가락 사이에 잘 감겨들 것 같았다.

기묘한 감각이 레이신의 손안을 간질였다. 책상 아래의 그의 손끝이 움찔했다.

졸고 있는 여자의 하얀 얼굴. 소복한 속눈썹.

레이신은 지금껏 외면한 상대에게 문득 시선을 빼앗겼다.

애써 안 보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관심이 가지 않았고, 그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랬다. 잠깐 보아도 그뿐. 시선은 금방 돌아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에겐 눈이 길게 머물렀다. 없으면 굳이 생각나지는 않는데 근처에 있으면 곧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지금도 그렇다.

시선을 조금 오래 뒀더니 여자가 움찔거리며 일어났다. 시선을 느낀 것인지, 표정이 약간 굳어 있다. 졸고 있던 눈을 빠르게 훔치고는 고개를 들었다.

특유의 차분함을 자아내는 얼굴이 그를 바라보았다.

“……공자님.”

애리얼이 그를 불렀다. 레이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용건이 없었다. 그녀의 용건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잠자코 기다렸다. 단순한 변덕이었다.

애리얼은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잠깐 대화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의중을 물어 왔다. 레이신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그 사실이 이유 없이 불쾌했다.

불쾌함이 입을 타고 올라왔다.

“아니.”

단칼에 거절하자 여자의 무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거기에서 기이한 만족감이 그의 속에 차올랐다.

동시에 그는 이 이상한 충만감을 위험한 것이라 느꼈다.

레이신은 필기를 끝낸 노트를 시종에게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을 애리얼의 눈이 쫓듯이 따라갔다.

레이신은 그녀의 눈길에서 만족감을 느끼지 않으려 애쓰며 걸었다. 괜히 의식한 탓인지 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날랜 동작으로 복잡하게 얽힌 책걸상 사이를 빠져나갔다. 나가는 문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쿠당탕!

뒤에서 요란하게도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떠나려던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곧이어 와르르 쏟아지는 소음에는 호기심이 일었다.

레이신은 결국 소음의 발생지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몇 미터 뒤의 의자가 옆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 위로 수십 권의 책이 쏟아져 있었다.

공녀는 떨어진 책들을 다급히 주워 모았다. 손등에는 넘어지다 긁혔는지 상처가 길게 나 있었다. 피가 배어 나오는데도 그녀는 모르는 눈치였다.

보아하니 그의 속도를 쫓아오려다 무리해서 넘어진 것이 분명했다. 하필이면 사서가 나중에 정리하려 쌓아 놓은 책을 건드린 탓에 주울 것도 많았다.

레이신은 제 발치까지 밀려온 책 한 권을 주워 들었다. 그는 뒤에 선 시종에겐 눈짓을 보내 먼저 자리를 비우게 했다.

레이신은 어질러진 곳을 향해 다가갔다.

책을 줍느라 여념이 없는 여자는 그가 다가오는 것도 몰랐다. 그녀의 손이 떨어진 책을 급하게 다시 모아 쌓았다.

레이신은 비어 있는 책상 위에 가져온 책 한 권을 탁 소리 나게 놓았다.

바닥을 보던 여자의 얼굴이 그를 향했다. 그녀의 품 안에는 아직도 책 더미가 한 아름 들려 있었다.

여자의 흰 얼굴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넘어진 데에 창피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표정은 늘 일정한 데 반해 미묘한 감정이 구별되게 드러나는 것이 레이신은 신기했다.

그는 책상을 짚고서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그녀와 거리를 좁혔다.

맹하게 벌어진 그녀의 입술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넘어질 때 헝클어진 머리칼은 아직도 정리하지 못해 달아오른 뺨에 어지럽게 붙어 있었다.

흐트러진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레이신이 말했다.

“대화 같은 건, 친한 사람하고 해.”

수사자를 닮은 눈동자가 무방비해 보이는 애리얼을 험악하게 내려다보며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넘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따라오지 마.”

딱딱한 어조로 내리꽂고는 가 버렸다. 우월한 신장을 자랑하는 그의 등 뒤로 한 갈래로 묶은 금발이 휘날렸다. 그가 빠른 속도로 멀어졌다.

어질러진 책 사이엔 애리얼만이 남았다.

노을이 깔리기 시작한 빈 도서관의 풍경이 낙엽 지는 늦가을처럼 을씨년스러웠다.

***

『공략 대상이 멀리 있습니다.』

『레이신 디 솔렘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현재 위치: 솔렘 공작저(거리가 멀어 정확한 추적이 어렵습니다.)』

한 치도 변한 게 없는 레이신의 프로필이 애리얼의 한숨을 자아냈다.

그와 헤어지고 백작저로 돌아온 뒤, 애리얼은 조금 울적해졌다. 소파 등받이에 기대선 축 늘어졌다.

하트는 하나도 채우지 못하고, 오히려 벽만 더 세워 버렸다. 심지어 말 걸지 말라는 위협까지 들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면 호감도가 필요한데…….’

상황은 절박한데, 애리얼은 감히 그를 붙잡지 못했다. 심적으로 그러기가 어려웠다.

솔직히 애리얼에게 레이신은 껄끄럽다 못해 무서운 사람이었다. 착 가라앉은 그의 눈을 마주하면 애리얼은 모골이 송연해지곤 했다.

‘그렇다고 겁먹으면 안 되는데.’

애리얼은 휴대폰을 놓고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의지를 다지려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도 여전히, 다시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 게임도, 공략도, 공략해야 하는 사람들마저도.

다른 방법이 없을까. 애리얼은 차선책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그녀가 돌아갈 방법은 모두의 호감도를 하트 세 개 이상으로 만들어 특별 엔딩을 보는 것뿐.

애리얼은 깊게 들이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에라, 모르겠다.”

위협한다고 피하면, 해결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애리얼은 소파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백작에게 독대를 요청해 어렵사리 부탁을 꺼냈다.

“우호의 의미로 솔렘 공작저에 방문할 수 있도록, 친서를 넣어 주실 수 있으실까요?”

평소 요구가 없던 딸아이의 이례적인 부탁에 백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부탁드립니다.”

맞은편에 앉은 애리얼이 머리를 푹 숙였다.

백작은 그녀를 보다가 지그시 눈을 감고 고민에 빠졌다.

따지고 보면 딸아이의 부탁이 아주 허무맹랑한 부탁은 아니었다.

솔렘 공작가는 결벽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어, 어지간한 귀족가라면 모두 한 번씩은 우호적인 교류를 하고자 했다.

‘하긴 한 번은 갈 때도 됐지.’

백작은 괜찮은 기회라 여겼다.

가주인 자신이 직접 찾아가는 건 다소 노골적인 숙이기로 보이겠으나, 황자 추천의 편입서까지 쥔 딸애를 친분의 매개로 보내는 건 이야기가 달랐다. 딸을 대신 보내면 백작이라는 권력의 명분도 서고, 황자의 신뢰를 받은 수준 높은 대리인이라 솔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터.

그러나 솔렘 공작가에는 걸리는 점이 하나 있었다. 정확히는 그들의 사저 부지에 문제가 있다.

“친서를 넣어 주는 건 가능하다. 단, 솔렘 공작저는 특별하게 초대받은 자만 출입이 가능하다. 초대받지 않고 가려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목숨…… 이요?”

“일종의 시험을 치러야 하거든. 솔렘 공작가에 내려오는 전통이다. 솔렘에서 특별히 선별해 초대한 게 아닌 외부인은 무조건 거쳐야 하는 관례와 같은 거란다. 그 내용은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매년 사망자가 나오고 있다는 건 확실하지. 원성이 자자하지만 지금까지 바뀐 적이 없어. 그러니 갈 거라면 각오는 해야겠지.”

“…….”

“솔직히 나는 널 보내고 싶지 않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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