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회의를 마치고 온 데본시아는 제 집무실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보석함을 보고 시녀를 불러냈다.
“이거, 누구의 이름으로 온 거지?”
“허클리 백작이 보낸 선물입니다.”
“아, 이번 방문 건으로 가져온 물건인가 보네.”
애리얼의 적성 검사를 주관하고 방문 허락을 내린 것이 그였으니, 당연한 조공이었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보석함을 열어 보았다. 벨벳 시트 위로 훌륭하게 세공된 다이아몬드가 반짝거렸다.
“그래서, 백작가 여식은 지금 어디 있지?”
“전하의 전언을 들은 후 곧장 돌아갔습니다.”
“……돌아가?”
“네. 한 시간 정도 전에 황성을 떠났습니다.”
시녀의 답변에 데본시아가 흔치 않게 인상을 찌푸렸다.
방 안의 시녀들은 움츠러들었다.
“백작 공녀가 누굴 만나고 갔지?”
황태자의 목소리는 평소 같지 않게 무척 음산했다.
물음에 답해야 할 시녀는 떨지 않고 말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네. 보고 들은 바로는 계속 응접실에 있다가 잠깐 산책을 나갔다고 합니다. 산책에서 돌아온 직후 전하의 전언을 듣자마자 떠났습니다. 그동안 공녀가 만난 인물은 없습니다.”
“그렇구나.”
데본시아의 목소리가 한풀 누그러졌다. 그는 의자에 앉아 보석함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괘씸하네.”
색이 다른 두 눈동자가 보석함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나와 관련된 용건으로 방문해 놓고 나를 만나러 오지 않다니.”
데본시아는 서운함을 토로하는 척 시녀를 흘겼다. 시선을 받은 시녀가 움찔 떨더니 머리를 조아렸다.
“허클리 공녀가 황성에서의 도리를 어기지 않도록 잘 안내하겠습니다.”
“응. 잘해 봐.”
살갑게 던져진 황태자의 격려에 시녀는 움츠린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가 격려한다는 것은 실수를 용서치 않겠다는 의미였으니…….
황태자의 간접적인 경고로 집무실은 침묵 속에 가라앉았다.
같은 시각.
마찬가지로 회의를 마친 스카이라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언짢은 표정을 했다. 그의 앞에 죽 세워 놓은 사용인들은 전부 죄인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시녀의 보고를 듣자마자 온갖 짜증을 냈다. 고작 산책하러 나간 공녀 하나 찾지 못한 무능함에. 그리고 그 공녀가 빈손으로 떠나게 둔 냉담함에.
“날 뭐라 생각하겠냔 말이다!”
“저하, 그렇지만 공녀님께서 더 머물지 않겠다 하셨…….”
“그거야 의례상 하는 말일 게 뻔하잖아.”
스카이라는 딱 잘라 단언했다.
곁에서 애리얼을 지켜본 시녀는 하지만 백작 공녀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고, 오히려 도망치는 것 같았다고, 반박하고픈 걸 꾹 참아 냈다.
애초에 백작 공녀는 황자와 관련된 일로 온 것도 아니었다. 굳이 그와 만날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황자는 그녀가 자신과 만났어야 한다는 듯이 굴었다.
오늘 공녀 찾기에 동원된 사용인들은 불가피하게 백작 공녀를 향한 그의 사심을 느끼고 말았다.
일부 집착적인 면모가 가미된 심상치 않은 기세. 그로 인해 보이는 그의 비이성적인 행동들.
황자는 허클리 백작 공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황성 내의 사람이라면 이제 모르는 이가 없으리라.
그래서 그들은 다짐했다. 다음 백작 공녀의 방문 때는 오늘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반드시 황자의 앞으로 데려가기로.
그래야만 이 예민한 황자에게 오늘처럼 시달리는 걸 피할 수 있다.
***
편입까지 앞으로 7일.
아카데미를 준비하는 애리얼의 생활은 상당히 규칙적으로 변했다.
오전 일곱 시에 일어나고, 하루에 다섯 시간 이상 공부와 독서를 했다. 산책은 오전과 오후에 한 시간씩. 취침은 오후 열 시에 이루어졌다.
덕분에 마른 나뭇가지 혹은 종잇장이나 다름없던 애리얼의 체력도 예전에 비해 나아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전에 비해서이지, 그녀의 체력이 아주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애리얼의 몸은 태생적으로 약한 편이었다. 병약한 건 아니지만, 쉽게 지치고 지구력이 매우 떨어졌다. 운동이나 움직이는 쪽은 영 체질이 아니었다.
오늘도 애리얼은 고작 한 시간뿐인 후원 산책에 지쳐 뻗었다.
“다리 아파.”
그녀가 피로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아카데미서 무리 없이 생활할 체력을 기르는 게 목표였고, 마냥 쉬울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몸이 따르질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되겠지……. 아카데미래 봐야 체력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는 곳인데.”
애리얼은 하루 다섯 시간은 끈덕지게 앉아 있을 수 있고, 두 시간은 충분히 걸을 수 있었다. 이거면 될 거다.
‘어차피 성실하게 공부하러 갈 것도 아니니까.’
백작에겐 미안하지만 애리얼에겐 그랬다.
아카데미는 공략 대상을 빈도 높게 만날 수 있는 공간이고, 공략이 최우선으로 이루어져야 할 곳이었다.
그녀에겐 학문보다 공략이 더 중요했다. 주어진 지위 때문에 목적을 잊어서는 안 됐다.
***
황립 아카데미는 황성에서 서쪽으로 3km 거리에 있었다.
하얀 성벽으로 보호된 아카데미는 척 봐도 규모가 상당했다. 걸어서 다니긴 어려울 것 같은 넓이로 보였다.
애리얼은 차에서 내려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무늬가 없는 깔끔한 검정 원피스에 로퍼. 귀족이라기엔 조금 밋밋한 차림이긴 하나, 아카데미 학생의 대부분은 그런 차림이었다.
애리얼은 차창에 비친 제 모습을 점검하고는 차를 보냈다.
멀지 않은 곳에 번잡한 아카데미의 입구가 보였다.
검은색 교복을 걸친 기존 학생들과 저마다 단정한 옷을 갖춘 신입생들. 애리얼은 그 틈으로 섞여 들었다.
아치를 이루는 정문 아래로 길게 죽 늘어선 경비병들 사이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저마다의 신분을 증명하며 차분하게 입학 서류나 학생증을 내밀고 아카데미로 들어갔다.
애리얼은 긴 행렬 속에서 제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문 앞에서 아카데미 관리원이 명단을 들고 신원을 확인했다. 관리원은 학생의 이름과 출신만 간단히 확인한 뒤 각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배정된 장소가 각기 다른 모양이었다.
“제4 기숙사 동으로.”
앞선 학생이 익숙하게 확인을 받고 발걸음을 옮겼다. 교복을 입은 걸 보아 하니 신입생은 아니었다.
관리원은 다음 차례인 애리얼의 차림새를 눈에 담더니 명단을 바꿨다.
“서류.”
짧게 묻는 말투는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애리얼은 준비한 편입 서류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거침없이 서류를 확인하던 관리인은 웬일인지 대답이 없었다. 그는 겁먹은 것처럼 물러나더니 낯을 휙 바꾸었다. 당혹한 것이 명확한 태도로 애리얼과 서류를 번갈아 본 그가 덜덜 떠는 목소리를 냈다.
“왜…… 왜 이쪽으로 오셨습니……! 아니, 그 전에 알아보지 못한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사죄도 모자라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숙이기까지 했다.
애리얼은 갑작스러운 관리인의 저자세가 당혹스러웠다.
“죄송하지만, 무슨 문제라도…….”
“존대는 절대 하실 필요 없습니다. 부디 하대를 부탁드립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고압적이던 관리인이 애원하듯 하대를 요청했다. 그 탓에 주변의 이목이 전부 애리얼에게로 쏠렸다.
수십 개의 눈이 그녀와 서류를 번갈아 보더니, 관리인처럼 표정을 굳혔다.
‘왜 저러지……. 내 서류에 무슨 문제가 있나?’
애리얼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편입 서류를 확인했다. 황금 독수리가 찍힌 자리에 스카이라의 서명이 떡하니 보였다.
“아…….”
애리얼은 그들이 저리 반응하는 이유를 뒤늦게 알아 챘다.
제국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강한 중앙 집권제에 심각할 정도의 계급 격차를 동반했다. 그 일부 핏줄의 권위가 법으로도 새겨질 정도였다. 이곳에 황족이 나타나면 대부분은 얼굴도 못 들고 납작 엎드려야 했다. 함부로 소리를 내는 것도 허락되지 않을 터였다.
그런 위세를 가진 황자의 서명과 황실의 각인이었다.
아무리 귀족이 많은 곳이라 할지라도, 황족의 서명을 받아 본 인물이 몇이나 되겠는가. 심지어 여기에는 평민도 섞여 있었다.
최상위 권력층의 비호는 그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놀람에 이어 경외와 같은 감정에 휩싸인 이들은 삽시간에 말을 잃었다. 주변이 자연스레 조용해졌고, 영문을 모르는 뒷줄의 웅성거리는 소리만 간간이 넘어왔다.
그 중심에 선 애리얼은 본의 아니게 폭풍의 눈이 되었다.
대단한 이를 보듯 긴장이 팽배한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애리얼은 숨이 막혔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서류를 품에 감춘 그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는…….”
존댓말을 꺼내자 주변인들이 삽시간에 사색이 되었다.
애리얼은 자신이 스카이라의 이름을 등에 업었다는 걸 떠올렸다. 그녀가 하대하지 않으면 듣는 이가 오히려 겁에 질릴 것이었다.
“……나는 어디로 가면 되지?”
그녀가 말투를 정정하자 관리인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응대가 늦어 죄송합니다. 금방 기숙사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는 다소 진정되었는지 과하지 않게 정중한 자세를 취했다. 이어 시선을 돌리고 누군가를 급히 부르는 손짓을 했다. 하녀 한 명이 뛰어나왔다.
그가 다가온 하녀에게 뭐라 귓속말했다.
하녀는 관리인에게서 말을 듣자마자 어디론가 부리나케 뛰어갔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관리인이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애리얼은 고개만 끄덕였다. 괜히 질문이라도 꺼냈다간 관리인만 또 질겁할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카데미 안쪽에서 정문으로 차 한 대가 도착했다.
‘아카데미 안에도 차가 다니네?’
애리얼이 신기해하는 중에 관리인은 앞자리의 차창에 대고 당부했다.
“여기 귀빈께서 오셨으니 조심히 모셔라.”
운전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인은 직접 나서서 상석의 문을 열고 애리얼을 불렀다.
“모시겠습니다.”
흐트러짐 없이 깍듯한 자세였다. 애리얼은 그의 태도가 부담스러웠다.
뒷줄은 돌연히 막혀 버린 앞의 사정을 몰라 원성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 고함치는 소리에 금방 조용해졌다.
언뜻 황족의 손님이라느니, 귀빈이라느니…… 그런 단어가 들린 것 같았다. 분명히 그녀를 지칭한 말일 터.
애리얼은 빠른 걸음으로 차에 올랐다. 이 이상 주목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잰걸음에 의사를 눈치챈 운전사가 즉시 출발했다.
잘 닦인 길로 차가 매끄럽게 나아갔다.
정문의 얼어 있는 시선들로부터 훌쩍 멀어졌다. 애리얼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숨이 편하게 쉬어졌다.
창으로 녹음의 그늘이 드리웠다.
애리얼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차 밖을 내다보았다. 양옆으로 나란히 심어진 메타세쿼이아가 훌륭한 경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녀는 높게 자란 나무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젖혔다.
‘정원수로 이런 걸 쓰는구나. 백작저에도 있으면 좋겠다.’
감탄하고 조금은 즐거워하며, 애리얼은 두 눈으로 지나는 풍경을 좇았다.
아카데미는 섬세하게 관리된 정원이 건물과 길 사이마다 조성되어 싱그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넓고, 좋네. 백작저 부지만큼 되려나?’
상당한 규모인지 직진이 꽤 오래 이어졌다. 애리얼은 이곳의 넓이가 제대로 가늠이 가지 않았다.
긴 길이 지루해질 즈음 큰길을 죽 내달린 차가 방향을 한 번 틀었다. 다시 조금 직진하다가 철제 담과 이어진 문 앞에 멈추었다.
운전사가 차창을 내리자 문을 지키던 경비병이 다가왔다.
이곳의 경비병은 정문 쪽의 경비와 달리 황실 기사단의 흰 제복을 입고 있었다. 이 안쪽은 높은 계급을 모시는 장소란 의미였다.
애리얼은 담 너머를 넌지시 살펴보았다. 높게 자란 에메랄드그린이 빽빽하게 조성된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 보안이 철저하다.
‘저 안엔 누가 있을까?’
호기심을 느끼며 눈을 고정했다. 적어도 공략 대상 중 한둘은 저 안에 머물 것 같았다.
곧이어 철문이 열리고, 가려진 부지로 차가 진입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