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바깥 시야가 단절된 장소로 들어가자니 살짝 긴장이 됐다. 은밀한 장소로 향하는 밀항자가 된 기분이었다.
철문 안으로 진입하자 곧장 길이 꺾였다. 담의 안쪽으로 들어오니, 이제는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좁은 길 양쪽으로 에메랄드그린이 겹겹이 조성되어 있었다. 좌우가 꽉 막힌 듯한 압박감에 시야가 답답할 정도였다. 차가 한 번 더 꺾고 나서야 트인 전경이 펼쳐졌다.
황성의 정원 못지않게 잘 관리한 잔디밭이 드넓었다. 중간중간 조경수로 심긴 분꽃나무가 눈 뭉치처럼 하얀 꽃을 매달고 있었다.
“……예쁘다.”
애리얼은 무심코 소리 내 감탄했다.
미로 같은 길을 뚫고 들어온 자리의 인적 없는 정원이 마치 요정의 숲처럼 보였다.
정원의 중심에는 이정표처럼 물보라가 이는 원형 분수가 있었다. 그 너머로 하얀 외벽에 연청색 지붕을 얹은 커다란 건물이 나타났다.
미끄러지듯 달리던 차는 건물 입구로 향하는 계단 앞에 정차했다.
앞서 기다리던 시녀가 다가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기다렸습니다, 허클리 백작 공녀님. 제1 기숙사 동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시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예를 표했다. 이어 공손한 손짓을 곁들이며 안내했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시녀가 앞장서자 애리얼은 그 뒤를 따라갔다.
건물이 좋다 싶더니, 내부는 더 좋았다.
연하늘빛 벽면에 하얀 설화석고 장식이 어우러져 미술 작품처럼 세밀한 조형을 해 놓았다. 중간중간 장식으로 걸어 둔 명화의 프레임도 전부 설화석고 조각이었다.
기숙사는 하늘에 띄운 유백색의 궁전같았다.
디디는 것이 미안할 만큼 우아한 복도를 한 번 꺾어서 쭉 직진하자 새하얀 문앞에 도달했다.
“그럼 편안하고 쾌적한 생활 되시길 바라며,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문 앞에서 시녀는 짧게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부연 설명은 딱히 없었다.
애리얼도 별 궁금증 없이 문을 열었다.
촘촘히 짜인 나무 바닥에 백색 가구들이 놓여 어우러진 방.
그 중앙에, 그녀에게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말끔한 외관에 고용주를 닮은 무표정한 인상.
미리 와 있던 카논이 애리얼을 보고 인사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아가씨.”
“넌 어디서든 침착하구나.”
“칭찬으로 알게요. 감사합니다.”
카논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시설이 아주 훌륭하다는 감탄도 추가로 덧붙였다.
애리얼도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인실까지 딸린 1인용 특실은 2층에 위치하여 햇살이 잘 들었다. 솔직히 백작저에 있는 그녀의 방보다도 좋았다.
‘이런 대우를 받아도 되나 싶은데. 중간에 나가라고 하진 않겠지?’
솔직히 내쫓지 말아 달라고 애원할 정도의 시설이었다.
애리얼은 화려한 객실을 한 번 쓱 둘러보고는 테이블로 향했다. 하얀 테이블엔 지도와 시간표를 비롯한 아카데미 안내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애리얼은 대충 훑어보고서 카논에게 물었다.
“혹시 전달 사항 같은 거 있었어?”
“네. 있습니다.”
카논은 자초지종과 함께 기숙사 시녀가 생략한 기숙사 시설에 대한 설명까지 전부 늘어놓았다.
애리얼은 카논의 존재가 너무나 고마워졌다.
아카데미에 다니는 귀족은 사용인을 한 명 데려올 수 있었다. 애리얼은 당연히 제 직속 하녀인 카논을 지목했고, 급료를 더 받게 된 카논은 흔쾌히 따랐다.
따로 데려온 사용인은 미리 기숙사에 들어가 주인을 위한 준비를 해 놓아야 했다.
연락을 받은 것은 일 주 전이었고, 애리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시설에서 특별 대우를 누리게 될 것은 알지 못했다.
“보통은 편입생이라도 이렇게 대우해 주진 않는다고 해요.”
“그렇구나. 감사…… 해야겠네.”
애리얼에겐 부담스러운 이야기였다.
아카데미는 까다로운 입학시험을 통과하면 평민이라도 들어올 수 있었다. 입학은 그랬다.
그 뒤부턴 계급에 따라 하나부터 열까지 받는 취급이 달랐다.
제1 기숙사 동이 최고 계급이 쓰는 장소이고, 그 아래로 제2 기숙사 동, 제3 기숙사 동, 마지막으로 평민이 쓰는 제4 기숙사 동까지 세밀히 나뉘어 있었다. 당연히 사용하는 시설도 계급별로 전부 차별화되어 있다.
그런 와중에 애리얼이 배정받은 곳은 제1 기숙사 동.
카논의 말에 따르면, 애리얼은 최상급 대우로 모셔야 하는 특별 귀빈으로 분류되어 있다고 한다.
특별 귀빈은 귀족 중에서도 등급이 나뉘는, 제국의 3대 공작가 이상 계급만이 해당했다.
제국이 보이는 지독할 정도의 수직적 계급 구조와 그 격차를 생각하면, 후작가도 아닌 백작가 공녀가 받기에는 무리인 취급이었다.
그러나 그걸 뒤엎는 게 황실의 권력이고, 스카이라의 서명이었다.
오늘로 애리얼은 황실이 얼마나 까마득한 권력을 가졌는지 조금이나마 체감했다. 자신이 받은 황자 추천 편입이 얼마나 까무러칠 보상이었는지도 깨달았다.
애리얼은 들고 온 서류를 꺼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서울 정도의 권력이 담긴 종이 쪼가리.
그녀는 스카이라의 이름이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이름…… 실수로 부르면 내 모가지가 남아나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카논이 사념을 깨고 들어왔다.
“오늘 입학식 때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어서 전교생이 모두 참가한다고 해요. 아가씨도 편입생의 신분으로 참가하셔야 합니다.”
전교생을 모은다니, 애리얼은 왠지 꺼림칙해졌다. 갑자기 머릿속에 데본시아의 얼굴이 떠오르고 말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 위에 군림하는 그가 연상되었다.
‘황태자도 여기서 만나려나?’
공략 대상의 나이대는 전부 비슷비슷했다. 아마 이곳에서 다 마주치게 될 거였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
“교복 입고 열 시까지, 중앙 동 대강당이요. 아가씨는 기사가 따로 모셔다드릴 테니 차를 타고 가시면 된대요. 지금이 아홉 시니까 천천히 준비하죠.”
차분히 전달을 마친 카논은 드레스 룸에서 교복을 꺼내 왔다.
하얀 블라우스. 검은색 리본. 검정 오버올 원피스. 검은색 니 삭스. 학생용 가죽 구두.
귀족가 공녀가 착용해야 할 아카데미 복장의 기본이었다.
그리고 추가로, 애리얼에게는 특별 귀빈용 복장이 하나 더 준비되어 있었다. 전체적인 디자인은 비슷하지만, 색이 달랐다. 흰색 원피스에 베이지색 리본. 원피스의 가슴께에는 금색으로 황실의 문양이 수놓아졌다.
둘 다 정문에서 봤던 리본 없는 밋밋한 교복과는 달랐다. 아마도 그건 평민용 교복인 것 같았다.
“흰 쪽이 귀빈용 복장으로 제1 기숙사를 이용하시는 분들만 착용한다고 해요.”
“계급을 구분하는 용도구나.”
“네. 그래도 착용은 자유라고 합니다.”
“자유…….”
애리얼은 정문에서의 일을 회상했다. 쏟아지던 시선과 긴장감에 얼어붙은 분위기. 계속 반복되면 심각하게 피곤할 듯한 상황이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있어 애리얼은 선택을 망설였다.
“내가 그냥 일반 교복을 착용하면 문제가 될까?”
“어떤 문제 말씀인가요?”
“일반 교복을 입으면 다른 학생들과 비슷해 보일 테니까…… 혹시 나한테 편하게 대하는 애들이 있으면 불경죄가 될까?”
“아뇨. 그렇지는 않고, 일반 귀족 교복을 입으면 그에 마땅한 취급을 감수하는 거로 알고 있어요. 특권을 누릴 수는 있지만, 보통의 귀족처럼 대해도 타인이 처벌받지는 않는대요. 친구를 사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거겠죠.”
생각보다 교육 시설다운 요소가 있다는 소리였다. 애리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큰 부담 없이 검은색 교복을 입을 수 있으니까.
***
대강당에 아카데미의 전교생이 전부 모였다.
그런 만큼 모이는 자리도 계급의 구분이 철저했다.
가장 뒷줄에는 평민. 그중에서도 제국 산하 왕국의 왕국민이 가장 마지막 줄에 선다. 그보다 조금 앞줄에 제국민이 위치했다. 암녹색 바닥을 발판으로 서 있다. 막대한 경쟁력을 뚫고 특별 선출 된 엘리트 출신으로 인원은 왕국민이 200명, 제국민이 300명 정도.
그 앞으로 계단이 두 칸 있고 벨벳으로 구분 선이 쳐졌다.
선 안쪽부터는 귀족의 자리였다. 선 가까이에는 왕국의 귀족, 앞자리에는 제국의 백작가 이하 귀족. 애리얼이 서는 자리였다. 인원은 대략 1,500명 정도.
다시 계단이 두 칸 있고 바닥의 색이 백색으로 바뀐다.
왕국의 왕족과 제국의 후작가 자제들의 자리였다. 대략 100명 조금 안 되는 인원이었다.
그리고 그 위, 계단을 수십 개 사이에 둔 자리에 교단과 함께 하얀 석고 단상이 있었다.
강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단상의 뒤편, 단이 까마득하게 높은 자리에 평상 같은 장소가 있었다. 테두리를 두르고 1인용 소파를 다섯 개 두었다. 소파는 아직 전부 비어 있었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자리가 아닌 별도의 통로로 연결되는 자리였다.
누가 봐도 권력의 최상층을 위한 자리다.
애리얼은 저 다섯 개 자리를 누가 차지할지 헤아려 보았다.
우선은 황족인 데본시아와 스카이라. 다음은 대공가의 자제인 렉시우스가 한 자리를 차지할 테고, 솔렘 공작가인 레이신도 좌석 하나를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 자리가 남는다.
‘솔렘이 아닌 다른 공작가 자제의 자린가?’
자연스럽게 그런 추론이 가능해졌다. 공작가는 셋이라고 들었다. 남은 자리는 솔렘을 제외한 두 공작가의 자제 중 한 명이 차지할 터였다.
‘누굴까?’
애리얼은 현재 제1 기숙사에 머무르고 있으니, 아마 저 빈자리의 주인과도 마주하게 될 것이다.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느끼며 애리얼은 목이 아플 정도로 높은 자리를 응시했다.
그나저나 강당은 정말 너무할 정도로 계급을 각인시키는 구조였다.
암녹색 발판을 딛고 선 애리얼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그래도 흰 교복을 입지 않은 것에 후회는 없었다. 그걸 입고 왔다면 어디 서야 했을지 감도 못 잡았을 거다.
나란히 줄을 맞춰 선 학생들의 끝, 벽면 자리가 이토록 안심됐다.
애리얼이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리자 옆자리에 선 여학생이 그녀를 흘금거렸다.
“복학생이야?”
호기심 어린 질문에 애리얼은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발랄해 보이는 인상의 귀족가 공녀가 눈을 마주하며 방긋 웃었다. 장난기 넘치는 얼굴에 연갈색 곱슬머리가 살랑였다.
경계심이나 어색함을 쉽게 무너뜨리는 표정이었다. 간만에 고압적이지 않은 인물을 만난 애리얼은 거리낌 없이 미소를 지었다.
“복학생이라니……. 전혀 아니야.”
“그럼…… 혹시 선배님?”
“아니. 오늘 처음 왔어.”
“신입생이었어?”
“그 비슷해. 편입생이야.”
“뭐! 편입이라고? 그럼 추천받아서 왔겠네? 누구 추천이야?”
여학생이 눈을 반짝 빛내며 물었다. 그녀는 굉장히 의외인 일을 마주했다는 듯 들떠 있었다.
“아, 추천인은…….”
애리얼은 말끝을 흐렸다.
‘이걸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
말하면 여학생의 태도가 변해 버릴 것 같았다. 정문에서의 사람들처럼.
‘저 애도 얼음장같이 굳어 버릴까…….’
애리얼이 망설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데, 갑자기 강당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해맑게 재잘거리던 옆자리의 공녀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따라 애리얼도 고개를 숙였다. 왠지 따라 해야 탈이 없을 것 같았다.
떨어진 애리얼의 시야로 바닥을 이루는 시커먼 녹색의 대리석이 보였다. 그녀의 위치를 실감하게 해 주는 색깔이었다.
이보다 위에 백색 대리석을 밟은 이들이 있다. 귀족도 다 같은 귀족이 아니라는 듯이 다른 색을 밟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보다도 더 위에 있는 사람이 바로…….
쥐 죽은 듯 고요해진 장 안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울렸다. 엄숙함이 드리웠다.
애리얼은 이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가 누군지 알았다. 전교생을 불러 모으고, 모두가 빠짐없이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인물. 아까도 떠올렸던, 만인 앞에 익숙하게 군림하는 자.
장내를 침묵하게 만든 존재가 단상으로 가 섰다.
그가 말하기에 앞서 그의 보좌관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시겠습니다. 모두 엄중히 예를 갖추십시오.”
송화기에서 전달된 음성이 강당 곳곳으로 넓게 퍼졌다.
학생들은 제국의 차후 지배자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귀족은 고개를 숙였고, 평민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서 꿇어앉았다. 감히 시선을 마주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기에, 숨을 죽이고 경청의 자세를 취해야 했다.
그대로 잠시 뜸을 들인 뒤에,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