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32화 (32/264)

32화

“조회에서 예법에 관련한 율령이 새로 제정되었다. 아카데미는 그 우선 시행 장소로, 해당 율령을 미리 발표해 적용하겠다.”

여타 다른 연설 없이 곧장 본론이었다. 전교생이 바짝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본 아카데미에서는 앞으로 제국의 공작가 솔렘, 무하, 샤펠의 공작과 그 핏줄에게 ‘서하’라는 높임말을 붙인다. 세 공작가의 아래 계급, 즉 이곳에 모인 전교생은 예외 없이 존칭을 써서 불러야 한다.”

율령을 말하고서 황태자는 몇 초간 말을 멈췄다. 천천히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그의 눈이 움직였다. 침묵을 오래 끌진 않았다.

“아주 쉽고 간단한 일이니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알아서 잘해 주고, 예법에 조금 더 신경 쓰도록.”

황태자는 간단하고 빠르게 전달을 마쳤다.

“존명.”

전교생이 일제히 대답했다.

전달이 끝나도 이곳에 모인 학생들은 엄숙한 경청의 자세를 유지했다. 그래도 그들 사이에 도는 긴장감은 살짝 내려갔다. 곧 있으면 자세를 풀고 강당에서 해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끝나지 않고 던져진 황태자의 말 한마디에 장내의 긴장감이 다시 치솟았다.

“편입생이 셋 있어. 원래는 입학식 때 따로 소개한다지?”

황태자는 공식 석상임에도 잠시 친근한 어투를 취했다.

그 음성이 애리얼에게는 너무도 익숙해서 두려웠다. 그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편입생을 언급한 순간부터 그녀는 등줄기가 오싹했다.

“모처럼 전교생이 모였으니 그들을 소개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학우들은 환영의 태도로 맞아 주길.”

좋지 않은 예감이 물씬 퍼졌다. 애리얼은 옆자리의 공녀가 흠칫 떠는 게 느껴졌다.

고작 셋뿐인 편입생. 그리고 그걸 굳이 친근한 말투로 불러낸 황태자. 듣는 이로 하여금, 편입생이 황태자와 연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결국엔 옆자리의 소녀도 애리얼과의 거리감을 느끼고 만 거였다.

‘이제 친구는 될 수 없겠지…….’

애리얼은 입맛이 썼다.

“편입생은 올라와서 단상 앞에 서라. 셋 모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내리쳤다. 황태자의 명이니 거역할 수 없었다.

애리얼은 벽 쪽으로 벗어나며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굳어 있었다. 특히나 옆자리의 여학생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밝게 대화를 이끌던 활달한 기색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씁쓸했다.

‘이럴까 봐 교복도 검은색을 골라 입은 거였는데.’

다른 학생들과 섞이기는커녕 전교생의 앞에서 특례를 보여야 하는 상황이 애리얼에게 닥쳤다.

단상으로 향하는 애리얼의 걸음이 무거웠다. 특권층임을 보이듯 암녹색 바닥을 넘어 백색 타일을 밟았다. 위에는 황태자가 있어 그녀는 줄곧 바닥을 보며 걸었다. 조금도 즐겁지 않았다.

애리얼은 무거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런 애리얼의 옆으로 누군가 걸어 나갔다.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귀를 울렸다. 애리얼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계단 옆에서 난입한 인물은 단상을 향해 직진했다. 갈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단상 앞에 섰다. 몸에는 하얀 교복을 걸쳤다.

애리얼은 직감했다. 당당한 걸음걸이의 그녀는 높은 단에 놓인 다섯 개의 자리 중 하나의 주인일 것이다.

애리얼은 그녀의 뒤를 따라 단상 앞에 나란히 섰다.

그녀와 애리얼 모두 고개를 푹 숙이고서 바닥만 바라보았다. 황족을 향한 예를 지키는 행동이었다.

황태자는 아직 말이 없었다.

애리얼은 잠자코 숨소리를 죽인 채 기다렸다. 그가 자신을 조용히 훑는 게 느껴졌다.

황태자뿐만 아니라 뒤에서도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애리얼은 부담스러워서 속이 탔다.

‘소리 소문 없이 지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다.

마지막 편입생이 천천히 계단을 올라왔다. 애리얼의 오른쪽 옆에 섰다. 그 사람은 애리얼과 마찬가지로 까만 치마를 입고 있었다.

“아나스타샤 샤펠. 애리얼 허클리. 블랑셰 멜로르.”

황태자가 입을 열어 한 명씩 호명했다. 첫 번째로 호명된 샤펠이라는 명칭에 장내 공기가 얼어붙었다.

오늘 발표한 율령의 대상자. 우러러야 할 3대 공작가 중 하나인 샤펠이었다.

아나스타샤가 오만한 낯으로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셋은 특별 추천 편입생이다. 전교생은 고개를 들어 세 편입생을 환영하고, 편입생은 앞으로 함께하게 될 학우들에게 인사하도록.”

황태자가 말을 마치자 샤펠 공녀가 재빠르게 뒤로 돌아 강당을 내려다보았다. 애리얼과 블랑셰는 마지못해 학생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수많은 계단 위에서, 저 아래 계급에 맞춰 열을 지은 학생들을 내려다보았다. 학생들은 얼굴을 들어 그들을 보았다.

위와 아래로 높낮이가 다른 시선이 마주했다.

‘이게 지배자의 시선이구나.’

애리얼이 평했다. 썩 유쾌하지 않았다. 고소 공포증이 일 것 같은 높이였다.

“묵례.”

단상에 선 데본시아가 명령했다. 전교생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편입생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특례를 받은 이들은 인사도 감히 멋대로 할 수 없었다. 누구의 비호를 받았는지, 그 지고함을 몸소 드러내야 했다.

옆에 있는 블랑셰라는 인물의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아나스타샤는 샤펠가를, 애리얼은 스카이라의 서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위계상 고개를 숙여선 안 됐다.

애리얼은 이 고고한 특권이 상당히 불편했다.

“이상.”

용건이 끝난 황태자가 선언했다. 그러고선 가장 먼저 강당을 벗어났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단상 뒤에 이어진 별도의 문을 이용했다. 잠시 뒤 샤펠 공녀도 황태자가 이용한 문으로 빠져나갔다.

애리얼과 블랑셰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전교생 일동 해산!”

황태자의 보좌관이 해산하라 명했다. 그때서야 학생들은 일제히 줄을 맞춰 강당을 나갔다.

강당은 나가는 문도 철저히 계급별로 나뉘어 있었다.

애리얼은 어디도 속하지 못하고 홀로 걸었다.

전교생의 대부분은 편입생 신분의 애리얼과 어울리기를 꺼렸다. 그들은 그녀에게 길을 터 주며 물러났다. 아까 이야기를 나눴던 옆자리의 공녀마저 어색한 미소를 보이다가 도망치듯 멀어졌다.

강당을 나온 애리얼은 외롭게 복도를 걸어 나갔다.

‘이래서야 친구는 당연하고 말 붙일 사람도 없겠는걸…….’

슬픈 예감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친구를 사귀려던 건 아니긴 했지만, 애리얼은 만났을 때 부담스럽지 않은 인물이 있었으면 좋겠다곤 생각했다. 하나같이 성격 드센 공략 대상들과 내내 부대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고 살기에 3년은 꽤 긴 시간이니까.

애리얼은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벽면을 지나다 밖으로 연결되는 문 앞에서 멈췄다. 조용한 공간에서 벗어나기 싫었다.

왠지 또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잠시 숨 돌릴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애리얼 허클리, 맞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산뜻하게 섬뜩했다. 어떻게 양립할 수 있을까 싶은 느낌인데, 그렇게 다가왔다.

“애리얼 허클리 백작 공녀. 샤펠 공녀 서하께서 부르신다.”

정면을 본 채로 굳어 있자 엄한 목소리가 애리얼을 다그쳤다.

“그렇게 말하지 마. 황자 저하께 특례를 받은 편입생인데 고압적으로 굴면 되겠니.”

“죄송합니다, 아가씨.”

“다음부턴 실수하지 말렴.”

그녀는 제 시종에게 핀잔을 주는가 싶더니 금방 눈을 돌렸다.

“애리얼, 이쪽으로 와 볼래?”

애리얼은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그녀는 묵묵하게 돌아서서 샤펠 공녀를 마주했다.

진갈색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부풀린 여자가 가면 같은 미소를 걸쳤다.

샤펠의 공녀는 상냥해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적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애리얼은 그렇게 느꼈다.

“처음 뵙겠습니다, 샤펠 공녀 서하.”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곧장 율령을 적용하자 여자의 눈이 만족한 듯 샐쭉하니 휘어졌다.

“정말 예쁜 얼굴이네. 황자 저하께서 눈여겨보실 만하구나.”

아나스타샤는 애리얼을 예쁜 인형 정도로 평가했다. 고작 그것만이 장점이라는 듯.

기분이 상할 만한 대우였으나, 애리얼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인형 취급이 크게 기분 나쁘진 않았다. 렉시우스에게도 비슷한…… 아니, 오히려 더 노골적인 취급을 받았었으니까. 새삼스레 불쾌할 것도 없었다.

“뭐어, 그래도 일단 저하는 잠깐 제쳐 두고.”

“…….”

“전하께서 부르셔. 큰 영광이지? 자, 얼른 따라오렴.”

공녀는 애리얼을 스쳐 문으로 나섰다. 시종이 곧장 그녀의 옆을 뒤따르며 양산을 펼쳤다.

애리얼에게는 선택지가 없는 모양이었다. 황태자가 부른다니 거부할 구석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샤펠 공녀의 뒤를 따랐다.

‘이름이…… 아나스타샤 샤펠.’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 명의 이름은 블랑셰 멜로르…… 였던가. 애리얼은 그쪽의 이름도 예쁘다고 생각했다.

일반 학생들과 어울릴 수 없다면 이들과 어울리면 어떨까. 가끔 이야기도 하고 그러면 좋겠다. 애리얼은 그랬으면 하고 희망했다.

하지만 이름도 부를 수 없는 이와 친해지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오늘로 실감한 계급 간의 무지막지한 격차 때문에라도 아나스타샤와는 도무지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애리얼은 느리게 나풀거리는 그녀의 하얀 교복이 까마득하게 보였다.

아나스타샤는 몇 미터 안 걸어 수삼나무 그늘에 멈췄다.

천장이 없는 컨버터블의 앞이었다. 널찍한 뒷좌석의 가장 우측 최상석에는 명화처럼 고상한 자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정면을 보던 그의 옆얼굴이 부드럽게 돌아가 애리얼을 보았다. 색이 다른 두 눈동자는 어두운 그늘에서도 확연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잘 데려왔구나.”

“그럼요. 누구의 명이신데요.”

황태자의 가벼운 칭찬에 아나스타샤가 공손히 손을 모으고서 수줍게 대답했다.

감정을 솔직하게 내비치며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아나스타샤는 퍽 사랑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아나스타샤에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아나스타샤의 너머, 애리얼을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냈다.

애리얼은 정중하게 묵례하며 그의 눈을 피했다. 당장의 상황 때문에라도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거북했다. 애리얼은 아래만 바라보고 나아가 아나스타샤의 뒤에 섰다.

보좌관이 차 문을 열고서 아나스타샤에게 고개를 숙였다.

“모시겠습니다, 공녀 서하.”

순간 보라색 눈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그녀는 우선 차에 오른 다음 보좌관을 향해 가시 같은 시선을 쏘았다.

“내가 분명 비전하라고 부르라고…….”

“내가 명한 거야.”

데본시아가 그녀의 분노를 잘라 버렸다.

노여워하던 아나스타샤가 말을 뚝 멈추었다. 놀란 눈이 맹해 보였다.

“……전하께서요?”

아나스타샤가 확인받듯이 물었으나 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설명이나 해명이 이어지지 않자 아나스타샤는 초조해하는 얼굴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적당한 합리화를 해낸 듯 방긋 웃었다.

“아! 오늘 지시하신 율령의 활성화를 위해서군요! 소녀가 이해가 느렸습니다.”

“정말 그런 이유일 것 같아?”

“네? 전하, 그게 무슨 말씀…….”

“애리얼, 이리 와.”

황태자는 아나스타샤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며 끊어 냈다. 그것도 하필 애리얼을 부르면서.

그의 호명에 애리얼은 바닥만 향하던 얼굴을 들어야 했다. 거부할 수 없는 황태자의 명령이었다. 그녀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거부하면 그때야말로 좋지 않은 곳에 가게 될 거였다.

정면에 보이는 컨버터블,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황태자와 샤펠 공녀가 곧바로 보였다.

아나스타샤의 보랏빛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와 마주하자 애리얼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어 갔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