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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33화 (33/264)

33화

애리얼의 뇌리에 순간적으로 지나간 대화가 떠올랐다.

‘아까, 비전하라고…… 했었나?’

분명 보좌관은 아나스타샤를 샤펠 공녀 서하라고 불렀었다. 그러자 그녀가 화내며 호칭을 정정하려 했다. 사정을 모르는 애리얼이 부를 때는 웃으며 넘어갔으나, 황태자의 보좌관이 자신을 그렇게 칭하니 노여워했다.

황태자와 정식으로 혼약을 약속한 관계가 아니라면 나오기 어려운 반응이다.

‘아나스타샤 샤펠은 황태자의 결혼 예정자…… 약혼녀인 건가? 아직 정식으로 혼인한 사이는 아닌 거고…….’

다만 데본시아는 아나스타샤를 너무 무덤덤하게 대했다. 그 때문에 애리얼은 그들의 관계가 특별하다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심지어 황태자비라는 호칭을 거둔 것도 그였다.

‘그러면…… 약혼녀가 아닌가?’

그렇다기엔 데본시아가 황태자비를 자칭하는 아나스타샤를 딱히 제재하지 않았던 거로 보였다. 방금도 아나스타샤는 황태자의 보좌관에게 자신을 황태자비라 칭하라며 당당히 굴지 않았던가.

적어도 결혼에 관한 어떤 약속이 오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그녀의 눈에 애리얼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지금까지는 모종의 약속을 토대로 황태자비 행세를 하고 다닌 듯한데, 하필이면 애리얼과 만난 날 그 호칭을 빼앗겼으니…… 애리얼을 절대 좋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애리얼은 난감해졌다. 정혼 상대가 있는 인물의 호감도를 올려야 한다니.

그녀가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꽉 쥐었다.

‘대체 왜, 약혼한 사람을 공략 대상에?’

게임에 물어도 대답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기야 제대로 따지고 보면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황태자는 첩이나 정부를 여럿 둘 수 있으니까. 데본시아는 약혼녀를 두고서도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도 그것과 애리얼의 도의적 양심은 별개였다. 아나스타샤의 기분 역시 별개인 일이었다.

애리얼은 이제 약혼녀 혹은 약혼과 관련된 약속을 한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데본시아에게 접근해야 한다. 심지어 그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차라리 친구로서 호감도를 올리면? 아니면 수하로서도 나쁘지 않고…….’

호감도라는 게 한 방향만 있는 것은 아니니, 애리얼은 그나마 거부감이 덜한 방향을 찾아 헤맸다.

“안 타고 뭐 해, 애리얼.”

복잡한 관계를 눈치채고 주춤거리는 애리얼을 향해 데본시아가 부드럽게 명령했다.

말투는 상냥해도 분명한 명령이다.

고작 백작가 여식이 거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애리얼은 뻣뻣한 자세로 황태자의 눈짓을 따라 차에 올랐다. 샤펠 공녀의 옆 좌석, 문 쪽 자리.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앉으니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 즉시 차가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출발했다.

얼기설기한 녹음의 그림자 자리를 지났다. 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스몄다.

데본시아가 나른한 얼굴로 고개를 젖혔다. 불어오는 미풍에 금발이 살랑거렸다.

“가끔은 느긋하게 산책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의 조용한 혼잣말이 귀를 스쳐 지났다.

애리얼은 슬그머니 눈을 돌려 황태자를 살폈다. 가만히 고개 숙인 아나스타샤의 너머로 등받이에 기댄 데본시아의 옆얼굴이 보였다. 섬세한 속눈썹을 매단 눈꺼풀이 느리게 깜박거렸다.

데본시아는 차 타는 일을 산책이라 불렀다. 황족에게 있어 차를 이용하는 건 걷는 것과 비슷한 감각인 듯했다. 차량에 드는 까마득한 비용 때문에 대부분의 귀족이 여전히 마차를 애용한다는 걸 생각하면, 참 대단한 격차였다.

애리얼만 해도 황자 추천 편입이라는 희대의 기회 덕에 1년에 한 번꼴로 움직인다는 백작저의 차를 겨우 탈 수 있었는데 말이다.

‘새삼…… 격차가 상상을 초월하네. 계급에 권력, 재력까지도. 하나부터 열까지 차이가 나.’

그런데 어쩌다 저런 인물들과 엮이는 처지가 되었을까. 애리얼은 미약하게나마 한탄했다. 타인이 보기엔 호사로도 보이겠지만, 당사자로선 불운이라 느껴졌다.

‘비슷한 지위에 무난한 성격의 공략 대상을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쪽이 훨씬 더 다가가기 쉬웠을 거였다. 여러모로 불편할 일도 적었을 것이고, 매번 고개 숙이며 조마조마할 일도 없었을 거다.

지위 높은 이들과 엮이니 줄줄이 높은 계급의 인물들과 밀접하게 되는 것도 피곤했다. 이를테면 옆자리의 샤펠 공녀 서하.

‘아까 표정이 많이 안 좋던데…….’

애리얼은 아나스타샤를 살짝 확인하려고 얼굴을 들었다가 급하게 시선을 원위치했다.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아나스타샤의 무표정하게 그늘진 얼굴엔 시커먼 음울과 분노가 들어차 있었다.

실제로 아나스타샤는 거의 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 약혼 상대인 데본시아에게 제대로 무시당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보다 현격히 지위가 낮은 백작가 여식에게 밀린 탓에 자존심이 무너졌다.

아나스타샤는 화가 나고 억울해서 이가 갈렸다.

사실 황태자의 저런 행동은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매번 같이 있는 여자가 달랐고, 또 그들의 이름을 정답게 불러 주는 일도 많았다. 자신의 말을 자르고 다른 여자의 이름을 말하는 건 이제 익숙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 여자들은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늘 그의 곁에 남는 건 자신이었다. 그녀가 황태자비의 호칭을 빼앗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왜 오늘은?’

아나스타샤는 저에게서 황태자비의 호칭을 앗아 간 게 다름 아닌 황태자라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머리를 얻어맞은 듯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물기 어린 보라색 눈동자가 옆자리의 애리얼을 서늘하게 훑었다. 흑발 사이로 보이는 고요한 얼굴이 소름 끼칠 만큼 아름다웠다.

그것이 아나스타샤를 더 불안하고 화나게 만들었다.

평생 화려하고 좋은 것만 손에 쥐고 보아 온 그녀가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애.

황태자의 눈에도 그렇게 비쳤을 거라 생각하니 아나스타샤는 배알이 뒤틀렸다.

황태자비의 호칭을 금지당한 것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질투하진 않았을 것을.

‘저 예쁘장한 얼굴을 그어 버리고 싶어.’

끔찍한 욕망이 속에서 불쑥 튀어 올랐다. 아나스타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식은땀을 흘렸다. 제 음험한 상상을 실현하려다 깨달았다.

감히, 전하께서 현재 아끼시는 인물을 해하려 했다. 그분께서 다 즐기시기도 전에.

‘안 돼, 이러면 안 돼……. 버려질 거야……. 전하께서 즐기다 버리신 한낱 여식들처럼, 전하께 처분당할 거야!’

가만히 무릎에 모아 둔 아나스타샤의 손이 떨려 왔다. 그녀는 황태자의 곁을 스쳐 간 흔한 여자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 샤펠의 이름을 달고 그럴 수는 없었다.

‘전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는 여자까지도 보듬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면 안 돼. 황태자비로서 그 정도 아량을 보이지 않으면 안 돼……. 안 된다고!’

아나스타샤는 추악한 본심을 꾸역꾸역 누르며 최대한 황태자가 거슬려 하지 않을 모습을 유지하고자 안달했다. 가히 병적인 수준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서 중얼중얼. 소리는 거의 나지 않게 그녀가 입술만 연신 벙긋거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뚝, 움직임이 멈췄다. 우울하던 아나스타샤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그녀는 단 몇 초 안에 표정을 깔끔히 갈무리했다. 고장 난 회로를 고치듯이 공녀의 얼굴에 평상심이 돌아왔다.

아나스타샤가 숙였던 상체와 목을 꼿꼿하게 세우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심상치 않은 기척에 애리얼은 무심코 그녀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차분하던 두 눈은 아나스타샤의 변화를 목격하고는 경직되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어둡던 그녀의 낯빛이 잠깐 사이에 밝아져 있다. 오싹했다.

‘뭐지? 아까랑은 아예 다른 사람 같아.’

아나스타샤는 어딘가 망가진 사람처럼 보였다.

분명 날씨는 따스한데 애리얼은 오한이 들었다. 부드럽게 스치는 봄바람에도 목덜미가 시렸다.

주변으로 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정원이 펼쳐져 있으나, 그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애리얼은 운치 있는 풍경을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나아가는 속도가 너무 더디게만 느껴졌다.

데본시아는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댄 아까의 자세 그대로였다. 지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애매하게 풀린 무표정. 그 옆에 기이하게 밝아진 아나스타샤가 이질적으로 자리했다.

애리얼은 둘의 옆에 짐 덩이처럼 조용히 끼어 갔다.

말소리 하나 없는 드라이브였다.

불편한 동행은 십여 분을 이어졌고, 애리얼은 그 잠깐의 시간마저도 억겁같이 느껴졌다.

숨이 막혀 멀미를 느낄 것 같을 때, 차량이 멈췄다. 호수가 보이는 길 앞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좀 더 차고 습한 공기가 밀려왔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시녀가 그들을 안내했다. 황태자가 앞서고, 그 뒤로 아나스타샤와 애리얼이 뒤따랐다.

그때까지도 황태자의 입에서는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질문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애리얼은 가만히 그가 가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애리얼은 조금 멍하게 걸어가다가 고개를 힐긋 돌렸다.

바닥까지 다 보이는 맑은 물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호수 둘레는 그린 듯이 매끈했다. 지나치게 관리가 완벽한 걸 보니 인공 호수인 듯했다.

오솔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자 화려하게 꾸며 놓은 야외석이 보였다. 호숫가 왕버들나무의 무성한 잎이 내려앉은 아래 하얀 천막이 쳐 있었다.

휴식을 위한 장소인 듯한데 학생들은 한 명도 없었다.

황족이 행차한다고 자리를 비우게 시켰거나, 혹은 애초부터 학생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거나.

불투명한 천이 하늘을 막고 그늘을 만들어 냈다. 옆으로는 반투명한 캐노피가 잔디밭으로 늘어져 느린 바람에 하늘거렸다. 호수를 향한 정면만이 온전하게 트여 있었다. 풍경을 보라는 듯 그 안쪽에다 라탄 소재의 소파와 테이블을 놓아두었다.

거기에 익숙한 얼굴들이 얼핏 보였다.

애리얼은 다가올 자리가 전혀 편하지 않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황태자의 옆을 조심히 따라가던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캐노피를 걷었다.

천막 아래로 진입하자 불친절한 음성이 그들을 반겼다.

“늦게도 오네. 강당 같은 데 가지 말라고 했잖아. 별 중요한 일도 아니니까 보좌관만 보내라고.”

렉시우스였다. 그는 입구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긴 소파에 흰 교복 블레이저를 방석인 양 깔고 누워 있는 자세였다.

자주 있는 일인지 데본시아의 반응이 태연했다.

“누굴 좀 데려오느라.”

“네 약혼녀 말하는 거면…….”

렉시우스가 게슴츠레 반쯤 뜬 눈으로 입구 쪽을 돌아다보았다.

가늘던 접혔던 그의 금색 눈이 누군가를 포착하고서 휘둥그레졌다.

“……애리얼?”

“안녕하십니까, 대공자 저하.”

뒤에 슬그머니 빠져 있던 애리얼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렉시우스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가 뭐가 불만인지 미간을 좁혔다. 그는 뭐라 말하려다 내키지 않는지 입을 다물었다.

렉시우스의 옆에서는 1인용 좌석을 차지하고 앉은 레이신이 무표정하게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쪽에 별 관심이 없었다. 만사에 저러지 않을까 싶을 만큼 무심함이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스카이라는?”

데본시아가 천막 아래를 둘러보며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닌 눈치였다. 그의 얼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잠깐 왔다가 다시 나가던데.”

렉시우스가 대충 대답해 줬다. 별로 친절한 어투도 아니었는데 데본시아는 살갑게 싱긋 웃었다.

“무슨 용건으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누굴 찾으러 갔다거나.”

데본시아가 넌지시 던진 추측에 애리얼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겠지……. 설마 날 찾겠어?’

용건이 있다면 애리얼을 호출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황족인 그가 그녀를 몸소 찾을 이유는 없었다. 직접 나선다는 건 도를 넘는 배려였다.

렉시우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의아해하는 얼굴로 반문했다.

“누굴 찾아? 우리 아버지나 폐하를 만나러 갔어?”

“아닐걸.”

“그럼 누구든 앉아서 호출하면 그만이잖아. 뭐 하러 직접 발로 찾아다녀. 귀찮게.”

“그러게. 부르면 될 텐데.”

데본시아가 사근사근하게 웃었다. 반면 그의 말투에는 은근히 비웃는 기색이 엿보여 꺼림칙했다.

누구를 비웃는지도 알 것 같아서, 애리얼은 불편해졌다.

고작 예감이고 추측에 불과했던 것이 확신으로 변해 갔다.

‘설마 진짜로 날 찾으러 간 거야? 스카이라가?’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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