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34화 (34/264)

34화

애리얼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황족이 찾고 있다는데, 내가 팔자 좋게 여기 있어도 되나? 나도 찾으러 나가야 하나?’

스카이라가 자신을 무슨 용건으로 찾는지와는 별개로, 찾으러 갔다는 상황 자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교복 주머니에 숨긴 휴대폰을 꺼내 보고 싶은 순간이었다. 애리얼은 무심코 주머니로 가려는 손을 저지하며 주먹을 쥐었다. 어정쩡하게 입구를 지키고 선 채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손님을 너무 세워 뒀네.”

어느샌가 자리를 잡고 앉은 데본시아가 멀거니 선 애리얼에게 손짓을 했다. 애리얼이 주춤하며 눈동자를 굴리자 그가 웃어 보였다.

“편한 데 앉아.”

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스카이라도 곧 올 거야.”

애리얼이 뭘 고민하는지 안다는 듯, 그녀를 손쉽게 붙잡는 말이었다.

이쪽으로 곧 스카이라가 나타날 거라면 그녀가 굳이 찾아 나설 이유가 없었다. 자리를 피할 변명이 사라졌다.

하는 수 없이 애리얼은 이곳에 머물렀다. 그녀는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가장자리의 소파에 앉았다.

데본시아와 렉시우스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둘 다 자리를 놓고 뭐라 한마디 하려다 그만뒀다. 서로 말이 겹칠 걸 아는 눈치였다.

둘은 애리얼에게서 시선을 거두다 눈이 맞자 능청스럽게 웃었다.

“남부의 일은 고마워.”

데본시아가 물 흐르듯이 주제를 돌리며 대화를 이끌었다.

렉시우스도 능숙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딱히 너 좋으라고 한 일 아닌데.”

“나도 알아. 네가 쉬운 셈법도 하지 못하는 수준이라는 거. 그러니까 뭐가 이득인지도 모르고. 내가 이해해야지.”

“아주 고마워 죽겠네. 적국 수괴의 눈깔이라도 파 와서 귀하신 황태자님 아침으로 진상했어야 했는데, 내가 눈치가 없었다. 그치?”

둘 다 주고받는 말본새가 곱지 않았다. 친우라도 되는 듯 허물없더니, 마냥 좋은 사이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 뒤로도 둘은 이것저것 말을 나누었다. 중요하게 들리는 주제도 있었고, 시답잖게 지나가는 시비도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동안 시녀들은 테이블에 식사를 차렸다. 설탕에 절인 과일과 달걀, 농어, 흰 빵 위주로 된 요리들이 네 종류의 커틀러리와 함께 놓였다. 조식이라기엔 무겁고 오찬보다는 가벼운 구성이었다.

정오가 가까워지는 시각에 차려진 요리들은 먹음직해 보였으나, 천막의 누구도 별 관심이 없었다.

데본시아와 렉시우스는 여전히 견제 비슷한 친애의 말을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고, 레이신은 단 한 마디도 없이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아나스타샤도 장식품처럼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딱히 친목을 다지는 것도 아니고 뭐 하러 모였는지 의문이었다.

애리얼은 제 앞에 놓인 접시를 가만히 응시하며 시간을 죽였다. 자리가 부담스러워서 크게 식욕이 생기지 않았다.

애리얼은 모인 이들에게 말이라도 붙여 보고 싶었지만, 데본시아와 렉시우스는 자기들만 아는 얘기를 하고 있으니 그녀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심지어 정치적 사안이 이야기의 주를 이뤘다. 함부로 대화에 난입했다간 황태자 보좌관의 눈총을 받기에 딱 좋았다.

‘원하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흔치 않은 자리이자 기회인데. 뭐라도…….’

애리얼은 혹시나 해서 다른 둘을 살펴보았으나 그쪽 상황도 여의찮았다. 레이신은 말 걸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듯 소파에 기댄 채 아예 눈을 감았다. 아나스타샤는 오롯이 데본시아만 주시한 채 앉아 있었다.

분위기상 둘 다 대화를 나눌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와의 대화를 반기지도 않을 것이다.

‘데본시아랑 렉시우스의 대화가 끝나면…… 최소한 내용이 가벼워지기라도 하면, 그때 기회를 봐서 말을 붙여 보자.’

애리얼은 기회를 노리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불행히도 둘의 대화는 보좌관을 낀 채 심도 있는 주제로 한없이 깊어져만 갔다.

애리얼은 하릴없이 기다리는 처지였다.

그녀는 따분해하며 하늘거리는 캐노피 너머로 무심코 눈을 돌렸다.

흰 교복을 입은 인물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바다를 얼린 듯한 푸른색의 홍채. 냉랭함이 서려 굳은 이지적인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확연히 드러나는 금발 아래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 폭풍이 다가오는 것 같은 존재감을 뿜어냈다.

“……스…….”

애리얼은 무의식중에 그의 이름을 발음하려다 황급히 멈췄다.

애리얼이 그를 발견한 순간, 그도 애리얼을 발견했다.

서로를 발견한 둘의 눈이 마주친 동시에 놀랐다.

스카이라는 걷는 속도를 높여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찌나 빠른지, 그의 뒤를 따라오던 보좌관은 한참을 늦었다. 엄청난 기세로 캐노피를 헤치고 그가 애리얼의 앞에 섰다.

스카이라의 등장에 대화가 멎었다.

천막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반면 그는 애리얼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너, 왜 여기에 있어.”

추궁하는 음성과 쏘아보는 눈빛이 따가웠다. 그의 기세가 너무 갑작스럽고 공격적이라 애리얼은 어깨를 움츠렸다. 물음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데본시아가 그녀를 대신해 대답했다.

“내가 데려왔어.”

스카이라의 눈이 데본시아에게로 돌아갔다.

“니가?”

“예의를 좀 차려서 말을 뱉어. 너무 공격적인 감이 있네.”

“어쭙잖게 가르칠 생각 말고, 묻는 말에 답부터 해. 니가 왜 얘를 데리고 다니는데.”

“그리 굴면 쉽게 얻을 것도 못 얻을 텐데. 착하게 말하는 법을 배워 오렴.”

“…….”

침묵하는 스카이라의 얼굴이 험악했다. 욕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억지로 다물고 있는 게 보였다.

애리얼에겐 익숙할 지경인 표정이었다.

다른 이들도 이 광경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모두가 놀란 기미 없이 무심한 반응으로 일관했다.

렉시우스는 무려 식사까지 하는 중이었다. 아까까지 무관심하게 방치 중이던 요리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가 얼마나 이쪽의 상황에 관심이 없는지 보여 주는 단편적인 모습이었다.

신경을 세워 주시하는 건 애리얼밖에 없었다. 그녀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끼어들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애리얼은 자리서 일어나 스카이라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그의 손이 당장에 데본시아의 멱살을 붙들 것 같아서였다.

스카이라의 벽안이 간신히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데본시아의 눈이 따라붙었으나, 애리얼은 필사적으로 못 본 척을 하며 스카이라만 끌고 나왔다.

스카이라는 의외로 순순했다. 애리얼이 이끄는 대로 캐노피를 제치고 움직였다.

천막을 벗어난 뒷모습이 멀어졌다. 데본시아는 무표정해진 얼굴로 턱을 괴었다. 삐딱하게 기운 자세가 신랄하게 불만을 표출했다.

아나스타샤가 그제야 슬쩍 입을 열었다.

“불쾌한 행동이네요. 황자께서는 생각이 짧으신 모양이에요. 백작 공녀도 그렇고요.”

“…….”

“전하를 앞에 두고 고개가 너무 빳빳하시던데, 전하께 손이라도 뻗으면 어쩌나 염려했습니다. 저하께선 매번 전하의 냉철을 흉내만 내시니 도무지…….”

“아나스타샤.”

“……네, 전하……?”

“시끄러워.”

사실상 입 다물라는 명령이었다.

데본시아의 싸늘한 반응에 아나스타샤는 목에 칼이라도 들이밀어진 것처럼 얼었다.

***

데본시아는 스카이라를 자극하기만 할 뿐이니, 둘은 떨어트려 놓는 게 상책이었다.

애리얼은 그렇게 판단해서 스카이라를 데리고 나왔다. 어쩌다 보니 피하던 그와 불가피하게 마주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그녀는 자초지종만 간단히 설명하고 헤어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스카이라는 대화를 짧게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천막 근처에서 멈추려던 그녀를 잡아끌었다.

어느새 앞장선 그가 호수를 둘러 걸어갔다. 보좌관까지 물리고서 단둘인 자리를 만들었다.

한 달 만의 만남이었다.

수양버들이 늘어진 자리에 둘만 우두커니 서서 마주 보았다. 주변은 소음 없이 고요했다.

스카이라는 차분한 걸 넘어서 다소 냉정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애리얼의 눈이 서름하게 내리깔렸다.

재회는 유쾌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백작저에서 헤어졌을 때의 상황도 그리 좋지 못했으니, 지금이 더욱 어색하게 느껴졌다.

“저하.”

애리얼이 말려드는 혀를 움직여 먼저 말을 꺼냈다. 눈을 피해 완전하게 단둘이 되려는 듯 묘하게 노골적인 자리 선정이나 굳은 분위기는 잠시 제쳐 두기로 했다. 전후 사정에 대한 말만 하고 끝내자.

“제가 이곳에 있는 건, 다름이 아니라 샤펠 공녀 서하께서 데려와 주셨기 때문입니다. 강당에서 마주한 뒤 친히 이곳으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만난 건 그 이후였습니다. 차를 태워 주신다기에 감히 거절할 수 없어서 여기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스카이라가 오해하지 않도록 애리얼은 최선을 다해 사정을 나열했다.

무표정하기만 하던 그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말하는 게 뭐가 이렇게 사무적이야? 적어도 인사는 하지 그래.”

호감도가 높아진 그는 이제 대놓고 친밀한 언사를 요구했다. 애리얼은 얼떨떨하게 인사말을 골라 꺼냈다.

“……근 한 달 만에 뵙습니다. 저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됐어. 그럴 거면 인사하지 마.”

또 뭐가 불만인지, 그는 애써 꺼낸 안부의 물음을 잘라 냈다.

애리얼은 순간 말문이 막힐 것 같았으나, 능청스럽게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럼, 설명은 충분히 되었을까요?”

“어느 정도 예상하기도 했으니까, 뭐…… 그래. 설명은 그 정도로 됐어.”

“아, 네. 다행입니다.”

그걸로 대화가 일단락되었다.

“…….”

“…….”

천막을 나선 주된 용건이 사라지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런 순간이 견디기 어려웠던 애리얼은 다시금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쩌다 보니, 몸에 손대지 말라던 저하의 명을 어기고 말았네요. 제 막무가내인 행동을 너그러이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로…… 막무가내였는지 모르겠는데.”

“저하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아량은 무슨. 그런 명령은 잊어.”

“아닙니다. 제가 무례를 범한걸요. 심지어 지금도, 제가 저하의 귀한 시간을 오래 뺏고 말았네요. 얼른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애리얼은 돌아가겠다는 말로 사실상 대화의 종지부를 찍었다. 더 이상 스카이라의 호감도를 올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일종의 회피이며, 그에게서 도망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저하?”

스카이라는 돌아간다는 대목에서 입을 다물었다. 차갑던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일렁이며 변했다.

그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

궁금증에 묻는다기보다는 원하는 걸 채근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는 애리얼이 꼭 그를 보고 싶어 해야 했다는 듯이 떠보았다. 왜인지 눈빛도 신기하게 애절하다.

‘이걸 뭐라고 해야…….’

당황스러운 건 둘째 치고, 의미를 모르겠다. 도리어 애리얼이 역으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로 인해 혜택을 받은 게 고마운 건 사실이지만, 고작 한 달 떨어져 있었다고 그리워할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편입에 힘써 주신 건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너무 과분한 대우를 해 주셔서…….”

“아니, 그런 소리 듣자는 게 아니잖아. 그게 아니고, 네가…….”

스카이라는 호기롭게 말을 끊는가 싶더니 뒷말을 흐렸다.

애리얼은 끊긴 뒷말이 궁금했다. 뭐라고 하려나.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그의 낯에 홍조가 서렸다.

“그…… 아무것도 아니야. 잊어버려.”

스카이라가 대충 얼버무리며 눈을 돌렸다. 그런 주제에 그는 은근하게 실망한 태도를 내비쳤다.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면서 제 감정을 숨기는 데는 또 취약하다.

그래서 애리얼은 괜히 더 눈치가 보였다. 스카이라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은연중에 자꾸 알게 됐다.

‘저렇게 티를 내면 모를 수가 없는데…….’

그렇다고 그가 보이는 저 기대감을 무턱대고 충족시켜 줄 순 없었다. 애리얼이 바라는 건 공략 대상의 호감도가 균형을 이루는 거였다. 누구도 넘쳐선 안 됐다.

‘……그래도 아직 하트 한 개 반 정도는 여유가 있으니까, 기대에 살짝 부응하는 정도는 괜찮겠지.’

어차피 목표 수치는 하트 세 개. 단순 수치로만 따지면 아직은 그의 호감이 더 필요한 입장이었다. 벌써부터 그를 아주 밀어낼 필요는 없었다.

“……저하, 그러니까…… 호수가…… 호수가 예쁘네요!”

억지로 짜낸 대화 구실에 스카이라의 눈이 슬그머니 그녀를 향했다.

“뭐…… 그렇지.”

어색하게 대꾸한 그의 말투엔 숨기지 못한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애리얼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의 기대에 부응해 주기로 했다.

“저하…… 잠시 함께 산책이라도 하실래요?”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