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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35화 (35/264)

35화

둘은 어색하게 걸음을 옮겼다.

스카이라는 휙휙 앞서던 평소와 다르게 속이 터질 만큼 느린 걸음을 걸었다.

이런 속도로 걷다간 해가 질 때까지도 호수를 돌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런들 어쩌겠는가. 감히 그를 앞서갈 수도 없는 애리얼은 잠자코 발을 맞춰야 했다.

이대로 대화까지 부재하면 끔찍한 어색함에 그녀는 숨 막혀 죽을지도 몰랐다.

아무거나 가벼운 거라도 그와 말을 나눠야 했다.

“저하께선 그간 어떻게 지내셨어요?”

“별일 없었어.”

“크게 편찮으신 일 없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너는 뭐 하고 살았는데.”

“대부분은 그냥 집 안에서만 지냈어요. 독서를 조금 하고……. 아카데미에 오는데 아는 게 너무 없으면 진도를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아서, 책을 보고 공부를 조금 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

스카이라는 잘 듣고 있다는 듯 짧게 추임새를 넣었다.

실제로도 그는 그녀의 말에 하나하나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만 말투는 상당히 딱딱했다. 버릇이었다. 모르는 이가 보면 화가 난 것이라 느꼈으리라.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는 정말 듣기 싫은 경우엔 입을 닫으라고 직설했다.

애리얼은 스카이라의 버릇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심기가 또 틀어졌다고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잘 굴러가는 듯하던 둘의 대화가 뚝 끊겼다.

애리얼과 스카이라는 그대로 조용히 호수 길을 걷기만 했다. 끔찍한 어색함이 다시 둘의 사이를 채웠다.

‘이제, 그만 돌아가도 되지 않을까.’

애리얼은 뒤로 돌아보았다.

천막은 저 멀리 뒤쪽에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더 멀리까지 가기는 싫었다.

애리얼이 주춤거리자, 스카이라도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를 향하는 그의 얼굴이 웬일인지 의미심장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그녀에게 심통을 부리듯 물었다.

“그보다 너, 아까 내 이름 부르려고 했지.”

“……예?”

“스. 입 모양이 그거던데.”

그는 제 이름의 첫머리를 발음하며 아까의 애리얼을 따라 했다.

“아. 그, 그건…….”

애리얼은 말을 더듬거리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체 어떻게 본 거야? 눈도 좋다.’

애리얼은 그의 시력에 감탄하는 한편으로, 이름을 부르려던 불경죄를 어떻게 무마하고 둘러대야 좋을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저하, 아까는 제가…….”

“부르고 싶어?”

“네?”

“부르고 싶냐고. 내 이름.”

애리얼이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진중했다. 아카데미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봤던 때처럼, 중요한 용건을 묻는 것 같은 눈. 바다같이 깊은 눈동자가 그녀에게 의중을 물어 왔다.

애리얼에게 또다시 난제가 던져졌다.

‘감히, 황족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해도 되는 걸까. 애초에 내가 쟤 이름을 부르고 싶은 적이 있었나?’

실수로라도 부를까 겁난 적은 있었고, 그게 다였다. 아까는 무심결에 이름을 부를 뻔했지만 그를 반드시 이름으로 지칭하고 싶다거나 하진 않았다. 애초에 황족을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너무 주목도가 컸다. 아무리 본인이 허락했다고 해도 잡음이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제가 어찌, 감히…….”

“애리얼.”

스카이라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마주한 시선 사이로 분위기가 차츰 묘하게 변해 갔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네가 원하면…….”

뚜둑,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가 울렸다.

둘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소리의 진원지를 향했다.

“스카이라.”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와 닮아 있는 얼굴. 동시에 확연하게 다른 눈동자를 가진 인물이 매끄러운 웃음을 지은 채 다가왔다.

“데본시아.”

스카이라가 그를 불렀다. 애리얼을 부를 때와는 전혀 달랐다. 아까까지는 굉장히 상냥한 편이었구나 하고 느낄 정도로 착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데본시아가 꺾어 들었던 수양버들의 가느다란 가지를 툭 던졌다. 여린 순을 매단 가지가 흙밭으로 추락했다.

“말 다 했으면 돌아올래? 네가 자리를 너무 비우니까 애써 마련한 자리가 쓸모를 못 하잖아.”

행동은 도발적인 데 반해 데본시아의 말투는 여상했다.

스카이라는 난입한 황태자를 불청객 보듯 바라보았다. 그는 붙들고 있던 애리얼의 손목을 스르르 놓으며 구긴 인상으로 몸을 틀었다. 정면으로 데본시아를 마주한 그의 눈은 생각보다 잠잠했다.

“지금 갈게.”

그러고는 애리얼에게 눈짓을 보냈다. 따라오라는 신호였다.

스카이라가 성큼성큼 앞서 걷자 애리얼도 재빠르게 뒤따랐다. 데본시아와 둘이 남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리얼은 얼마 못 가 멈춰야 했다. 데본시아의 왼손이 슬그머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를 눈치챈 스카이라가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았다. 아까의 침착은 어디다 내던졌는지 미간이 확 좁혀져 있었다.

그가 항의하기 전에 데본시아의 입이 먼저 열렸다.

“몇 마디만 간단히 할 거야.”

차분하고 진중한 말투였다. 평소답지 않은 어조에 스카이라의 기세가 주춤거렸다. 데본시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부탁하듯 말했다.

“먼저 가 있어 줄래. 말만 끝내고 곧 따라갈게.”

조곤조곤한 음성. 깔보는 기색이 없는 진지한 부탁.

데본시아가 이렇게 나오면 거부할 구실이 없었다. 스카이라는 이를 깨물며 성질을 누그러뜨렸다. 황태자가 잠시 백작 공녀와 말 좀 하겠다는데, 저가 뭐라고 싫다겠는가. 자신이 애리얼과 아주 큰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불쾌하고 씁쓸한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스카이라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돌려 먼저 가 버렸다.

애리얼은 데본시아가 막아선 자리서부터 몇 발짝 뒷걸음질했다.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스카이라가 완전히 멀어져 주변이 잠잠해졌을 때, 데본시아가 한 걸음 다가왔다.

애리얼이 겨우 벌렸던 서로 간의 거리가 다시 좁혀졌다.

데본시아는 여느 때와 다르게 웃지도 않았다.

“애리얼.”

“네.”

“지금까진 내가 봐줬지만, 앞으로는 이렇게 굴지 말렴. 아카데미이긴 해도 황립이라 이름 붙은 곳에서 황태자를 거절하는 짓은 현명하지 못하니까. 그리고.”

그는 말이 더 이어질 것임을 암시하더니 슬며시 목소리를 낮췄다.

“난 너한테 거절당하는 게 꽤 싫거든. 말과 행동은 물론, 기색까지도.”

너그러운 투로 말한 내용은 전혀 너그럽지 못했다.

전후 상황을 생각하면 데본시아의 말은 다소 함축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해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데본시아는 제가 주최한 자리를 허락 없이 벗어나는 것과 자신이 아닌 타인과 대화하는 것까지, 거절의 범위에 넣어 보고 있었다. 그걸 거절하지 말라는 거였다.

황태자답게 군림하기 위해서.

데본시아는 애리얼이 자신에게 가만히 끌려다니길 원했다. 너그럽게 굴지만, 은근하게 칼날을 드리우며. 발목을 죄려는 듯 굴었다.

애리얼은 가만히 묵례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말은 고분고분 순응했으나, 속으로는 그를 향한 두려움과 거부감에 떨었다.

말, 행동, 기색까지 거부하는 티를 내지 말라니. 마치 황태자라는 줄에 연결된 꼭두각시 인형이 아닌가.

‘이렇게 돼 버리면 공략이 너무 불리해지는데.’

애리얼의 머릿속에 그에게 이리저리 휩쓸릴 자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황태자에게 강제로 종속되어 어디도 가지 못하는 신세로 공략에 실패하는 모습.

그녀는 환각처럼 떠도는 상상을 떨쳐 버리려 눈을 꽉 감았다. 별 소용은 없었다.

***

호수를 전경으로 두고 이루어진 식사 및 티타임은 나른하고 지루했다.

다른 이들이야 전부 구면이고 나눌 이야기도 꽤 있겠으나, 애리얼은 황태자가 데려와 억지로 끼인 데 불과했으니. 재미는커녕 눈치나 보는 위치였다.

그녀는 대화에 낄 틈도 없이 조용하게 가장자리 자리만 지키다 나왔다.

지위가 한참 높은 인물들이 먼저 다 빠져나간 후의 마지막 순서였다.

그래도 차는 탈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차는 여태까지 중 가장 편했다.

제1 기숙사 동에 도착하자 시녀가 마중을 나왔다. 애리얼은 그길로 곧장 기숙사 방으로 들어갔다.

개학 후부터 일주일간 신입생 및 편입생은 수업이 없었다. 아카데미에 적응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때 시간표를 짜고, 시설을 익혔다. 시간표를 제출하고 난 뒤에도 한 달가량 적응기를 다시 가졌다. 신입생과 편입생의 인원 반영은 그 후에나 정식으로 이뤄졌다.

입학 시기에는 아카데미의 수업도 평소와 다르게 진행되었다. 첫 주의 강의는 강의의 목적이나 교수 소개 같은 학문 외적인 것들을 다뤘고, 그 후 한 달간은 약식 수업을 진행했다. 제대로 진도를 나가는 건 신입생의 인원이 완전히 반영된 5주 차부터였다.

애리얼은 시간이 없어 못 읽고 나갔던 안내서와 강의 시간표를 독파했다. 생각보다 강의의 종류가 워낙 많고 세세해서 그냥 읽는 데만 해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역사나 수학 같은 일반 과목은 물론 마법에 특화된 과목만 해도 100개가 넘었다. 교양까지 합하면 대충 훑는 것도 벅찼다.

그런 와중에 애리얼은 제 마력 특성을 몰라 골머리를 앓았다.

황립 아카데미는 마력을 다룰 수 있는 고급 인재를 길러 내는 기관이었다. 그만큼 마법에 관해선 세세하게 분류되어 있었다. 마법 과목은 주 2회 이상을 필수로 들어야 했고, 적성 검사에 따라 들을 수 있는 강의가 있고 아닌 강의가 있었다.

제 적성을 모르면 아주 기초적인 마법 강의 외에는 들어 봐야 시간 낭비가 될 수 있었다. 시간표를 짜는 데도 당연히 걸림돌이 된다.

“아카데미에 와서까지 모르면 어쩌자는 거야. 검사 결과는 대체 언제 오는데…….”

애리얼은 힘 빠지게 한탄하며 의자에 축 늘어졌다.

그런 그녀에게로 카논이 다가와 흰색의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오셨을 때 바로 드리려고 했는데, 바빠 보이셔서. 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런 게 왔었어?”

“오늘 정오쯤에 왔습니다.”

“무슨 서류인데?”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이곳 기숙사의 시녀로부터 건네받았는데, 아무런 설명이 없었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라는 의미인가 보네.”

“그런 거겠죠. 제가 봐도 될 내용은 아닌 듯하니 저는 이만 물러가서 잡무를 보겠습니다.”

“어…… 그래.”

그녀가 멀뚱히 있는 사이 카논은 금세 방을 나갔다.

방 안에 홀로 앉은 애리얼은 곧장 봉투를 열어 보았다.

「마력 적성 검사 결과

-애리얼 허클리, 백작 공녀

마력 순도: 보통

마력량: 상

마력 계열: 특정 계열로 정의할 수 없음

지속력: 중

회복력: 중

모든 부분을 종합한 결과, 대상의 적성은 불분명하나 마력량이 뛰어난 것으로 판명. 마력의 적성 및 한계를 <특수 방어 마법>으로 정의함.」

‘드디어!’

아까까지 그녀가 바라 마지않던 것이 종이에 표기되어 있었다.

애리얼은 속 시원하게 검사지를 읽어 내렸다.

‘특수 방어 마법이면 일반 마법보다 한 단계 위인가?’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에서는 마력 한계이자 마법 인재를 나누는 등급이 네 개였다. 그중에서 세 번째 등급을 받는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력 보유자가 네 번째인 일반 마법 등급에 머문다는 걸 생각하면 재능이 있다고 봐도 될 정도다.

단지 황자의 이름을 달고 편입해 받는 대우에 비해서는 조금 눈치 보이는 수준의 재능이라 문제지.

‘그러고 보니까 공략 대상들은…… 다들 등급이 높겠지?’

적어도 애리얼 자신이 받은 등급보다는 최소한 같거나 높은 등급일 것 같았다.

“내가 걔네 사이에 끼어 있으면 만개한 꽃사이에 잡초같은 모양이지 않을까…….”

누군가는 저런 재능으로 왜 특별 편입생인지 수군거릴지도 몰랐다. 솔직히 맞는 말이고, 한심하다고 매도해도 별 상관은 없었지만…….

할 일이 많은데 그녀의 머리에는 자꾸만 잡념과 걱정거리가 쌓였다.

‘정신 차리자!’

고개를 휙 흔들어 생각을 흘려보냈다.

애리얼은 제 결과지를 보며 펜을 잡았다. 하나둘 필요한 수업을 체크하고, 시간대가 맞는 강의끼리 묶었다. 기초 수업만으로도 시간표는 빽빽하게 채워졌다.

“……아니, 잠깐만.”

숨 쉴 틈 없이 가득 채워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강의 시간표에 애리얼은 문득 의문을 느꼈다.

‘내가 여기 공략하러 왔지 수업 들으러 온 게 아닌데.’

그녀는 가득 채운 시간표에 죽죽 줄을 그었다.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마법 수업만 남기고 지워 버렸다.

월요일과 수요일에 두 개, 목요일에 한 개, 금요일에는 교양만 하나.

애리얼은 확연하게 널널해진 스케줄을 만들고서 기지개를 켰다.

큰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이었다.

개운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자신의 결과지가 조작되었다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다.

***

다음 날.

수업을 들으러 갈 일 없는 편입생 애리얼은 침대에 누워 빈둥거렸다.

넓은 창 밖으로 푸르른 하늘과 정원이 어우러졌다.

“날씨 엄청 좋네.”

그녀가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중얼거렸다.

원래는 아카데미를 한번 돌아 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기존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 있는 시간이라 교사를 돌아다니기엔 눈치가 보였다. 부지가 하도 넓어 걸어서 보기에는 상당히 어렵다는 점도 한몫했다.

일없이 시트를 문지르며 누워 있으니 애리얼은 절로 졸음이 몰려왔다.

‘팔자 좋게 낮잠이나 자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애리얼의 머리로 공략 대상들이 스쳤다.

빙그르르 엎드려 누운 그녀가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1 기숙사 동 - 1층 중앙 휴게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말을 걸면 받아 줄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1 기숙사 동 - 제1 도서관 1층』

데본시아와 레이신은 멀어서 위치가 제대로 표시되지 않았다. 둘은 아예 아카데미를 벗어나 있었다. 수업을 들으러 간 것도 아닌 모양인데, 대체 아침부터 어딜 간 건지.

‘스카이라랑 렉시우스도 교사에는 안 갔네? 다들 수업이 없나?’

시간이 비는 거라면, 찾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애리얼은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남은 둘이라도 만나서 호감도를 올릴 수 있다면 이렇게 누워 허송세월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중요한 건, 누구를 만나느냐인데.’

애리얼은 화면에 보이는 스카이라와 렉시우스의 위치 창을 번갈아 보았다.

그녀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 만난다면 아무래도…….”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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