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애리얼은 적당히 매무새를 다듬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기숙사 1층에는 스카이라가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한 발짝씩 디디며 발소리를 줄였다. 휴대폰에 뜬 그의 초상화는 중앙 휴게실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도서관에 가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그것 때문에 애리얼은 일부러 중앙 휴게실을 지나치지 않는 복도 끝의 계단을 이용했다.
2층에는 도서관으로 곧장 통하는 공중 통로가 있었지만, 애리얼의 방과는 완전히 반대쪽이었다. 이용하려면 중앙 계단을 지나쳐야 해서, 계단을 지키는 호위나 보좌관 혹은 시녀에게 들킬 위험이 너무 컸다.
그리고 들키면, 곧장 스카이라에게 불려 갈 것 같다. 확신은 아니고 예감일 뿐이지만.
잘못하면 렉시우스를 독대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그럼 안 되지. 지금은 호감도의 균형 발전이 필요하다고.’
애리얼은 언제든 휴대폰을 소매에 숨길 수 있도록 쥐고서 재빠르게 1층 복도를 통과했다. 측문은 다행히도 열려 있었다. 그대로 문을 밀고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스카이라는 아직 휴게실에 멈춰 있다.
잔디밭으로 들어선 애리얼은 휴, 숨을 내쉬었다. 머리 위로 오전의 밝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도서관이 보였다.
기숙사 건물처럼 하얀 외벽을 지닌 도서관은 그 이름답게 매우 조용했다. 호위도 둘 정도밖에는 없었다.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사용인이 적고 고요했다.
렉시우스는 도서관 1층의 가장 안쪽 열람실에 있었다. 정확한 위치를 확인한 뒤 애리얼은 걸음을 옮겼다.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흰 벽, 우아한 세공이 가미된 기둥 사이를 지나자 도서관이 아니라 잘 관리된 신전에 온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된 것이 도서관인데도 어지간한 귀족 저택보다 훌륭할 수 있는지.
“백작저보다도 좋은 거 같네.”
감탄하며 죽 걸어 들어가자 그녀의 앞에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책장이 사방을 둘러 빼곡하게 채운 공간. 그 중간쯤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의자 뒤에 겉옷을 걸어 두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는 근육이 단단히 잡힌 팔을 세우고 손등에 턱을 괴었다.
애리얼은 슬그머니 다가가 렉시우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분명 이쪽을 눈치챘을 것이 뻔한 그는 능청스럽게 눈을 깔고만 있었다. 약간의 해독이 필요한 고대 문자로 된 책을 펼쳐 놓고 그의 금안이 느리게 움직였다.
애리얼은 이와 비슷한 만남을 가졌던 레이신이 떠올랐다.
‘그때는 결과가 안 좋았었지.’
이번엔 어떨까. 말을 걸어도 괜찮을 것인지…….
애리얼의 눈이 조용히 그를 관찰했다.
렉시우스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다. 금테를 두른 투명한 유리알이 번들거렸다.
정말이지 끔찍하게 안 어울렸다. 날 선 인상에 억지로 고리타분함을 칠해 놓은 양 안경과 얼굴이 따로 놀았다.
‘안 썼으면 좋겠는데. 시력이 많이 나쁜가?’
애리얼은 한량 같은 얼굴에 얹어진 촌스러운 둥근 테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애리얼을 훑었다가 다시 책으로 향했다. 킥 웃는 소리가 들렸다.
왜인지 장난기가 묻어나는 웃음소리가 듣기에 익숙했다. 애리얼은 한 달도 전의 백작저에서 그에게 마구 놀려진 순간이 떠올랐다. 괜히 부끄럽다.
“대공자 저하.”
“…….”
“렉스 선배.”
“오냐.”
그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졸린 듯 느슨해져 반쯤 감긴 눈, 미미하게 올라간 입꼬리. 형편없는 안경마저도 괜찮아 보이게 만드는 대단한 외모였다.
‘아, 그래도 안경은 별로다.’
애리얼은 자꾸만 안경테로 향하는 시선을 돌리며 넌지시 물었다.
“책을 볼 때는 안경을 쓰시나요?”
“아니. 그냥 썼는데.”
“…….”
“안 어울리나 보네.”
“네.”
그는 키득거리며 웃더니 안경을 벗어서 책상에 내려놓았다. 테에 가려졌던 날카로운 눈매가 훤칠하게 드러났다.
“뭐 하러 왔어.”
“선배 보러 왔어요.”
“알아. 용건이 뭐냐고.”
“……시간표 짜는 게 영 어려워서요. 대강 채우긴 했는데, 혹시 선배가 한번 점검해 주실 수 있으세요?”
“줘 봐.”
애리얼은 임시로 채워 온 시간표를 내밀었다. 그가 말없이 가져가 훑더니 피식 웃었다.
“어지간히 쉬운 거만 조금 듣네. 놀려고 왔어?”
“아뇨……. 제가 지식이 없어서……. 강의를 많이 들어 봐야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요. 뭐가 도움 되는 강의인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너, 언령도 모르는 수준이었지.”
“……네. 정말 기초 지식도 없는 수준이라서…….”
그때의 일을 언급하니 애리얼은 괜히 또 부끄러워서 눈을 내리깔았다.
렉시우스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펜을 주워 들었다. 그가 상의도 없이 대충 끄적거리며 시간표를 멋대로 수정했다.
“저기, 선배. 저한테 말씀은 해 주시고…….”
“자, 됐다.”
그가 마음대로 완성한 시간표를 내밀었다. 적혀 있던 강의를 죽죽 그어 지우고 새로 채운 강의가 네 개는 됐다. <마력학>, <마력전>, <마공학>, <마공전>.
“선배, 이거 심화 과목이 아닌가요? 거기에 두 개는 실습 같은데, 제 수준으론 이거 못 할 거 같아요. 특히 실습은…….”
“기초 이론만 들으면 아무것도 안 돼.”
그가 딱 잘라 일축했다.
“마력은 쓰라고 있는 건데 듣기만 해서 뭐 하게.”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실습과 병행하면 실력이 빠르게 늘긴 할 테니까.
하지만 애리얼은 이곳에 공부하고 마력을 연마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실질적인 목표는 어디까지나 공략과 호감도. 궁극적으로는 특별 엔딩이다.
그런데 이런 수업을 들으면 피치 못하게 공부를 해야 하고,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제가 따라갈 수 있을까요?”
“기본적인 건 내가 가르쳐 줄게.”
“정말요?”
“어. 월수금토일, 아홉 시까지 여기로 와.”
그렇다면 힘들어 보이는 과목도 못 들을 것까진 없었다. 렉시우스와의 주기적인 만남이 보장된다면 오히려 기껍다. 애리얼은 드디어 그의 공략에 제대로 길이 생긴 기분이었다.
‘이걸로 만날 구실은 생겼어. 앞으로 성실한 모습을 보여 주면 호감도가 약간은 오르겠지?’
이 정도면 공부도 웃으며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선배. 열심히 할게요.”
“그래. 오늘은 화요일이니까 가고, 내일 와라.”
“네. 알겠습니다. 내일 뵈어요.”
애리얼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막 자리를 뜨려는데, 렉시우스가 빠트린 것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너, 존댓말 그거 때려치워라.”
“……그래도 되나요?”
“어. 말 길어지니까 하지 마.”
“응. 알겠어, 선배.”
그녀가 곧장 말을 놓으니 놀랐는지 렉시우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의 표정 변화에 애리얼은 잠시 멈칫거렸다.
‘너무 건방졌나?’
허락해 준다니 대뜸 받아들이긴 했지만, 지나치게 스스럼없었던 것 같았다. 아무래도 크게 격식 차리지 않고 그냥 선배라 부르다 보니 그가 편해져 버렸나 보다.
사실 반말을 주고받기엔 그와 애리얼의 신분 격차가 꽤 컸다.
“죄송합니다. 그냥 존댓말로 할…….”
“됐어. 그냥 건방지게 굴어. 나쁘지 않네.”
약간 얼빠져 있던 렉시우스는 금세 싱긋 웃으며 여유를 찾았다.
애리얼은 가만히 마주 웃으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도 건방지다고는 생각하는구나.’
저런 점까지 의외로 친근하게 다가왔다. 좀 더 친하게 굴어도 괜찮을까.
애리얼은 망설이다가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선배, 내일 봐.”
조용한 성격에 비해 꽤 용기 낸 인사였다. 그러나 렉시우스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귀찮게 뭐 하냐는 표정이다.
무안해진 애리얼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부끄러워졌다. 경직된 웃음이 방어 기제처럼 지어졌다.
그 모습에 렉시우스가 갑작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단조롭던 표정을 해사하게 바꾼 그가 애리얼을 따라 하듯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잘 가.”
뒤늦게 그녀의 인사에 호응하는 게, 왜인지 놀리는 것처럼 장난스러웠다.
애리얼은 괜스레 더 부끄러워져서 허둥거렸다.
“선배도 잘 있어. 내일 봐!”
애리얼은 어색하게 밝은 인사를 남기고, 급한 일이 생긴 사람처럼 후다닥 자리를 비웠다.
렉시우스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문 너머로 사라지자, 올라갔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가더니 무표정하게 다물렸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상하던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급격하게 지워졌다.
“쉽네.”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
도서관을 나온 애리얼은 무심코 기숙사의 정문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렉시우스와 제대로 된 접점이 생긴 안도감으로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였다. 긴장이 풀어져, 예민하게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그 안에 누가 있는지도 모른 채, 시종이 열어 준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애리얼의 생각은 계속 렉시우스와의 어색한 듯 친밀했던 작별 인사나 앞으로의 만남 등에 치중되어 있었다.
당당히 중앙 현관을 지난 그녀는 짧은 복도를 통과해 휴게실에 진입했고,
“……!”
스카이라와 정통으로 마주쳤다.
애리얼은 소파에 떡하니 자리한 그를 보고서 굳었다.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뒷걸음질도 쳤다.
스카이라가 뚱한 표정으로 물러나는 애리얼을 노려보았다.
“표정이 왜 그래? 못 볼 거라도 봤어?”
그는 대놓고 퉁명스럽게 굴었다. 그러는 본인 표정도 마냥 좋지는 않은데.
애리얼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의 성격을 알기에,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예상을 못 해서……. 놀라서 그랬어요. 여기서 저하와 만날 줄 몰랐는데, 간밤엔 평안하셨습니까.”
“안 평안했다고 하면. 위로라도 해 줄 거야?”
“……위로가 필요하신가요?”
그는 말없이 입술만 삐죽였다. 꼭 삐친 것같이 심술부리는 얼굴이었다.
애리얼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옆자리로 갔다. 흰 소파에 1m 정도 간격을 두고 그녀가 그와 나란히 앉았다.
스카이라는 약간 긴장한 듯 손끝을 말아 쥐고서 슬그머니 시선을 흘렸다.
“만날 때마다 그렇게 거북한 티 좀 안 내면 어디 덧나나.”
그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분명 애리얼보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정말이지, 고상하신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어린애 같은 면모가 있다. 이걸 어떻게 달래 줘야 할까.
“제가 붙임성이 없어서 표정은 이렇지만, 저하와 만나서 기쁘고 반가워요.”
고심하던 애리얼은 결국 약간의 거짓말을 섞었다.
그에 스카이라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날 봐서 기쁘고 반갑지 않다는 것 정도는 보면 알아.”
“……죄송합니다.”
빠져나갈 길이 없어 사과했더니 그가 자조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대화가 멈추자 휴게실이라 이름 붙은 원형의 공간엔 침묵만이 차올랐다.
흘깃 바라본 그의 얼굴, 가지런한 눈썹이 찌푸려져 있었다. 애리얼더러 표정이 왜 그러냐 타박했지만 정작 인상을 쓰는 건 그였다. 늘 저렇게 까칠한 표정이다.
애리얼은 그가 웃는 얼굴을 본 기억이 없었다. 끽해야 비웃는 정도나 있었으려나.
스카이라를 흘금거리던 애리얼은 아예 그의 쪽으로 몸을 향했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슬쩍 눈길을 던졌을 때 입을 열었다.
“저하께서 웃으시는 건 한 번도 못 본 거 같아요.”
그 말을 건네자, 비스듬히 마주한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웃는 거, 보고 싶어?”
스카이라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다. 벅찬 듯이. 혹은 기대하는 듯이.
애리얼로선 부담스럽기만 한 반응이었다.
‘왜 자꾸 내 의사를 물을까?’
처음만 해도 그는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명령하더니, 아카데미에 와서는 자꾸 눈치를 보듯이 굴었다. 성격이 변한 것도 전혀 아니면서. 하트 두 개짜리 호감도가 이렇게 행동 변화를 불러올 정도인가.
생겨나는 의문은 잠시 접어 두고 애리얼은 눈앞의 그에게 집중했다. 저 반반한 얼굴이 미소를 지으면 어떨 것인지.
‘……상상이 잘 안 가는데.’
지금도 스카이라의 입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무심코 손을 뻗어 입꼬리를 한번 올려 보고 싶을 만큼.
애리얼은 그의 웃는 얼굴을 결국 그려 내지 못했다. 그래서 청했다.
“저하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요.”
그녀의 부탁에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웃어 달라, 했더니 스카이라는 홍조만 띄우며 외려 시선을 떨어트렸다.
파란 눈동자가 파도를 담은 듯 일렁일렁, 너울대는 감정을 흘렸다. 표정은 저래도 기뻐 보였다.
“알았어. 웃는 정도는…… 해 줄게.”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