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뭐 어려운 일이라고. 스카이라는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어렵사리 승낙했다. 그런 주제에 그는 아량을 베푼다는 듯 굴었다.
고위 계급의 저런 어법은 그녀에게도 이제 익숙했다.
어쨌든 승낙은 승낙이니까, 애리얼은 그가 어떻게 웃을지 궁금했다. 그녀가 스카이라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드디어 그 귀한 미소 좀 볼 수 있으려나 싶었다.
기대와 달리, 그는 굳은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음에.”
그 말을 남기고, 스카이라는 바람 소리가 일 만큼 쌩하니 사라졌다.
“다음에 언제…….”
잇지 못한 대화가 홀로 부유했다.
옆이 순식간에 비어 버렸다. 멀뚱히 남겨진 애리얼은 사태 파악 후 소파에서 일어났다.
‘힘들면 그냥 거절하지.’
약간이지만 기대감이 있었기에, 아쉬움도 남았다. 하지만 금방 갈무리되는 감정이었다.
스카이라의 저런 일방적인 통보와 자리 비움은 거의 만날 때마다 있던 일이라, 그녀는 별로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렉시우스와의 약속이 더 중요한 일로 다가왔다.
‘……내일 아홉 시.’
***
스카이라는 방으로 오자마자 거울 앞에 섰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반사된 제 모습을 삐딱하게 감상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예민한 눈초리를 하고 있다. 이런 얼굴로 애리얼을 마주했었다니.
그는 입술을 깨물다가 조금씩 표정을 바꾸어 보았다. 찌푸린 미간을 펴고 힘을 풀었다. 무표정이 되자 인상이 어째 더 차갑게 보였다. 겁주는 것도 아니고, 이래선 안 된다.
스카이라는 꽉 다문 입을 슬슬 휘어 보았다. 어색하게 치켜올려진 입꼬리가 경련했다.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한 미소. 억지로 시켜서 가장한 것 같았다. 그마저도 그는 오래 유지하지 못해서 절로 인상이 써졌다.
“아…… 진짜!”
그는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 올리다 제 머리칼을 마구 헝클었다. 마음대로 되지 않아 짜증이 났다.
애초에 왜 이걸 연습하고 있는가. 웃어 달라는 거 비웃음이든 뭐든 대충 웃고 치우면 그만인 것을.
신경질적으로 거울을 툭 차고는 근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 성질을 못 이겨 헝큰 금발이 부스스 흘러내렸다.
“아주 그냥 해 달라는 거 전부 해 주게 생겼어.”
스카이라는 멍한 얼굴로 한탄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제가 뱉은 말이 아주 싫지도 않았다. 만약 그 애가 바라는 게 있다면 들어주고 싶었다. 그 구실로 계속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내일도 죽치고 기다려?’
그러려면 약간의 조치가 필요했다.
그는 탁자의 호출 벨을 눌러 보좌관을 불러냈다. 문밖에서 대기하던 보좌관이 세 번 노크 후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저하.”
“이번 주 일정이 어떻게 되지.”
“아카데미 수업을 제외하면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금요일 만찬과 조회 두 번뿐입니다.”
“별거 없네. 다 비워.”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필릭, 연유를 모른다고 못 할 일이 아닐 텐데.”
“죄송합니다.”
상관의 심기 불편함을 빠르게 알아챈 필릭이 그 즉시 고개를 숙였다.
스카이라는 딱딱한 표정으로 제 보좌관을 주시했다. 그가 묵례를 끝내자 슬쩍 눈짓했다. 거기 있는 시간표를 챙겨 가라는 의미였다. 필릭은 테이블에 놓인 시간표와 서류 몇 가지를 챙겨 물러났다.
***
수요일.
날이 밝자마자 일어난 애리얼은 일찌감치 준비를 마쳤다. 렉시우스가 오기 전에 미리 도서관에 가 있을 생각이었다.
카논은 아침부터 바쁜 애리얼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일찍 갈 필요가 있을까요?”
“혹시라도 대공자께서 일찍 오실 수도 있으니까.”
“그러진 않으실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먼저 가서 책도 읽고 하면 나쁘지 않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준비해 온 티를 내면 좋을 것 같아. 겸사겸사 생활 방식도 부지런하게 바꿔 보고.”
“뭐, 아가씨께서 그러시다면야. 앞으로 매일 이 시간에 깨워 드릴까요?”
“응. 그래 줘.”
애리얼은 카논에게 가볍게 부탁하고는 가방을 메고서 방문을 나섰다.
아직 바깥이 어슴푸레한 시간, 새벽과 아침 사이. 푸른 빛이 내려앉은 복도는 조용했다.
자주 느끼지 못했던 이른 시각 특유의 고요함.
나쁘진 않았지만, 허둥지둥하던 기상을 생각하면 애리얼은 한숨부터 났다.
본의 아니게 게으른 생활을 영위하던 탓에 그녀는 일어나는 것부터가 고생이었다. 이젠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니 벌써 조금 피곤했다.
‘그러고 보니 준비하느라 휴대폰도 못 봤네.’
애리얼은 발을 떼기 전 복도에서 휴대폰을 켰다. 렉시우스의 위치를 대강 파악할 요량이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1 기숙사 동 - 1층 중앙 휴게실』
애리얼은 자신이 잘못 본 건가 싶어서 소매로 액정을 닦아 냈다.
그러나 여전히 똑같은 화면. 스카이라의 초상화가 어제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자리에 떠 있었다.
‘얘가 왜……?’
그것도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도대체 몇 시에 나온 거야?’
애리얼은 기함하며 급히 숨을 죽였다. 2층의 연결 통로는 오늘도 이용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어제 썼던 길을 그대로 따라 조용히 기숙사를 나갔다.
놀란 그녀의 심장은 도서관에 들어서서야 잠잠해졌다.
‘어제도 그렇고, 대체 왜 거기 있는 거지?’
누군가를 기다린다기엔 어제의 그는 애리얼과 만난 후 자리를 떠나 버렸다. 딱히 뭔가를 하고 있지도 않았었다. 그는 그냥 넓은 통로가 훤히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치 감시하는 것처럼.
“설마…… 날 기다리나?”
무심코 말하면서도 놀라,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다소 당혹스러운 가능성이 떠오른 나머지 애리얼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니지, 아니겠지…….’
되뇌며 애리얼은 불안을 일으키는 추측을 흘려 버렸다. 우연이겠지, 생각하며, 그를 향한 부담을 밀어 뒀다.
지금은 스카이라가 아니라 렉시우스에게 집중해야 했다.
애리얼은 도서관의 복도를 걸어 들어갔다. 열람실에는 금방 도달했다.
약속한 아홉 시까지는 아직 멀었다. 두 시간은 훨씬 넘게 남았다.
애리얼은 독서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책장 사이를 서성였다. 간단하고 쉬운 기초 마법 서적을 읽고 싶었으나, 대부분 응용이 필요한 전문 서적들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애리얼은 개중에 제일 쉬워 보이는 걸 뽑아 들고 흑단 책상 앞에 앉았다. 내용을 읽어 보려 했으나 그녀의 지식수준으론 한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려웠다.
이해되지 않는 걸 애써 해석해 머리에 잡아넣으려 애쓰자 오히려 두통만 일어났다.
더 읽어 봐야 도움도 안 될 듯해 그녀는 책을 놓았다.
‘렉시우스는 언제 오려나…….’
애리얼은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창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높다란 창 밖으로 도달하기 전에 멈췄다. 출입구에 장신의 인영이 보였다.
지금껏 읽히지도 않는 책을 들여다보며 기다렸던 인물.
렉시우스가 오른손으로 제 뒷덜미를 주무르며 열람실로 걸어 들어왔다. 어제와 비슷한, 방만하게 풀어 헤친 차림새. 그의 왼손에는 책이 두 권 들려 있었다.
“선배.”
“일찍도 나와 있다.”
그가 무신경하게 대꾸하며 애리얼의 맞은편에 앉았다. 미리 와 있었다고 기특해하는 눈치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그냥 잠이나 더 자다 시간 맞춰 나올걸.’
애리얼은 약간의 후회를 감추며 그를 마주했다. 씻고 금방 온 건지 붉은 머리칼이 살짝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애리얼이 그를 살피는 동안 그의 눈은 무심하게 펼쳐진 책을 훑었다. 그녀가 억지로 머리에 집어넣으려 용을 쓴 책이었다. <기초 마법학의 해석>. 책의 내용과 제목을 확인한 그의 황금색 눈이 가늘게 접혔다.
“언령도 모른다는 애가 책은 또 더럽게 어려운 책을 읽어.”
“이거 어려운 거였어?”
“어렵지. 기초가 되는 마법학을 철저히 분해해서 해석하는 건데.”
“분해하고 해석하는 거면…… 마법에 대한 이해를 쉬워지게 돕는 책 아니야?”
“그럴 리가 있냐. 이 책의 내용은 마법이 어디서 어떻게 기원이 되고, 어떻게 발전했으며, 어떻게 상호 작용 하는지, 가설로 내세워진 이론 중 하나를 학문적인 시선으로 해석한 거야. 머리만 아프고, 마법을 쓰는 거랑은 개뿔도 관련 없는 내용이라고.”
“……몰랐어. 제목대로 기초가 되는 마법학을 해석해 주는 내용인 줄 알았거든.”
“그런 건 여기 없어. 기본적으로 교육이 철저히 된 고위 계급만 오는 곳이니까.”
그는 현 상황을 잔인할 정도로 객관적이게 일축하고는 펼쳐진 책을 치웠다. 대신에 가져온 책 두 권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마력 사용 - 초급 ->, <기초 마법과 그 종류>.
“이게 내 수준에 맞는 책이야?”
“열 살도 안 된 애들이나 보는 거지만, 뭐, 그렇지.”
“…….”
“왜? 열받아?”
“아니! 가져와 줘서 고마워, 선배.”
애리얼이 손사래를 쳤다. 제 처지에 새삼 화날 게 뭐가 있겠는가. 열 살배기 수준에도 못 미치는 자신의 지식수준이 암담하게 다가왔던 것뿐이었다.
렉시우스는 그녀의 반응이 싱겁다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가져온 책을 펼쳐 애리얼의 앞으로 밀었다.
“자, 공부하자.”
***
렉시우스의 가르침은 이해가 쉽고, 명확했다. 그는 외우고 익혀야 할 것들을 딱딱 짚어 주었다.
그렇다고 그의 진도를 따라가기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의 수업은 한 번에 소화해 내야 하는 양이 많았고, 예습이나 복습도 아주 철저히 해 오게 시켰다. 지식을 빨리 습득할 수 있는 만큼 떨어지는 숙제도 방대했다.
성실함을 보여 줘서 호감도를 딸 계획이었던 애리얼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수업 시간은 평균적으로 두 시간 정도였고, 애리얼은 수업이 끝난 후에도 도서관에 박혀 여섯 시간은 추가로 학습을 해야 했다. 그녀는 취침 전에도 두 시간은 더 복습을 강행했다.
종합하면 애리얼은 하루 총 열 시간 정도를 마력과 마법의 기본 지식을 익히는 데 사용했다.
물론 이건 기본적인 이론 학습에만 해당했다.
실습을 위한 마력의 활성화와 기본 마법 연마에는 또 따로 시간을 내야 했다. 이른바 실전용 연습이었다. 기본 두세 시간, 막힐 때는 거의 다섯 시간 이상을 잡아먹었다.
애리얼은 렉시우스 때문에 온갖 고생을 사서 하는 꼴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의 호감도는 조금도 오르지 않아 야속했다.
심지어 스카이라까지 그녀를 힘들게 했다. 매일 중앙 휴게실을 지키고 앉은 그 때문에 애리얼은 늘 뒷문으로 돌아가야 했다.
자연히 수면 시간이 부족해졌고, 잘 쉬지도 못했다.
결국 토요일 수업에서 애리얼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렉시우스의 검지가 애리얼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그녀는 고꾸라지는 머리를 들고서 힘겹게 눈을 떴다.
“잠 못 잤어?”
“……응……. 마력량을 일정하게 조절해서 방출하는 데 자꾸 실패해서…… 성공할 때까지 하다 보니, 새벽 세 시였어.”
“그런데 오늘도 일곱 시 전에 나왔고?”
“……응…….”
그녀의 늘어지는 대답을 참을성 있게 듣고 있던 렉시우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그만하자.”
“냉수로 세수하면 괜찮아져. 갔다 올게.”
애리얼이 눈가를 문지르며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렉시우스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그 꼴이어선 효율이 안 나.”
“그래도 어쩔 수 없는걸. 이제 이틀 후면 수업에 들어가야 하는……!”
렉시우스의 팔이 갑작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감아 왔다. 놀란 애리얼의 말끝이 높게 튀었다.
시야가 급격하게 전환되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