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정적인 도서관의 전경이 사라지고 눈앞으로 맑은 호수가 나타났다.
푸른 숲의 향기, 청량한 습기가 훅 끼쳐 들었다.
애리얼은 어리둥절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양버들이 늘어진 조용한 물가.
아카데미에 온 첫날 봤던 그 호숫가다.
“선배, 여기는 왜 왔어?”
그녀가 물어도 렉시우스는 별 설명이 없었다. 그는 팔로 끌어안다시피 당겨 왔던 애리얼을 놓아주고는 근처 벤치로 걸어갔다. 털썩 주저앉고선 그녀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서 좀 쉬자.”
시원스럽게 웃는 그의 모습에 애리얼은 걸음을 옮겨 갔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그가 제 허벅지를 툭툭 쳤다.
“빌려줄게. 누워.”
“그래도 돼?”
“그래도 되니까 말하지.”
그가 너그럽게 권유했다. 애리얼은 조금 망설이다가 몸을 기울여 그의 한쪽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실제로 아주 피로한 상태라서 그녀는 거절하기보단 누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고마워, 선배.”
옆얼굴에 닿는 허벅지의 단단한 감촉을 느끼며 애리얼이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사양이 없는 그녀의 모습에 렉시우스가 낮고 짧게 웃었다.
“고맙긴.”
스르륵, 그의 손끝이 이마에 내려앉은 그녀의 머리칼을 쓸고 갔다. 기분 좋은 바람처럼 부드러운 손길이다. 애리얼은 온몸이 절로 노곤해져 잠이 몰려왔다.
‘이 상태로 잠들면 민폐겠지?’
그녀는 모로 누운 채 대화를 시도했다.
“근데…… 마법은 적성별로 배우고 익히는 거라던데. 나도 내 적성에 맞게 배워야 하는 거 아니야?”
“적성에 맞는 교육은 기본적인 지식을 다 익히고 나서 하는 거야. 그리고.”
그가 턱 손을 얹어 애리얼의 눈을 가렸다.
“쉬러 왔으면 그런 생각 그만해.”
“……응.”
애리얼은 렉시우스의 묵직하고 다정한 음성에 기대어 완전히 눈을 감았다.
“선배…… 정말 고마워. 선배 덕분에 열심히 할 수 있었어.”
잠들기 전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애리얼은 진심을 담아 그에게 감사를 남겼다. 귀찮았을 텐데, 이렇게 일일이 지도해 주고 시간을 내 준 그가 달라 보였다. 지난 일주일간 공략 대상 중 가장 최악으로 꼽을 만했던 그의 첫인상은 씻은 듯이 가셨다.
“이 은혜는 꼭 갚을…….”
“자라.”
렉시우스는 그녀의 감사를 귀찮다는 듯 일축했다. 일면으론 굉장히 무정해 보이는 대답이었다. 애리얼은 그것마저 저를 향한 일종의 배려라고 여겼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쉬라는 거겠지.
무심히 던진 그의 짧은 명령에 신경이 느슨해졌다. 그렇게 그녀는 완전히 잠에 빠졌다.
애리얼이 완전히 잠들자, 그는 그녀의 눈을 가리던 손을 거뒀다. 곤히 잠든 얼굴이 순진하고 무방비했다.
무감한 얼굴이던 그가 짓궂은 장난을 떠올린 아이처럼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은혜라니, 뭘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인지…….”
홀연히 바뀐 표정은 비웃음에 가깝게 사특했다.
***
약간의 어수선한 소음. 코를 간질이는 달콤한 향기.
애리얼은 주변의 변화에 이끌리듯이 깨어났다. 눈을 깜박거리자 전에 없던 사물이 인식되었다.
하얀 야외 테이블, 그 위에 올려진 과일샌드위치와 갓 구운 듯한 크루아상, 청포도.
“후배님, 일어났어?”
다정한 듯 장난기 넘치는 말투에 애리얼은 모로 누워 있던 고개를 돌려 위를 보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렉시우스의 얼굴이 상큼한 웃음을 날렸다.
“밥 먹을 시간이야.”
다부진 팔이 누워 있던 애리얼의 몸을 휙 일으켰다. 당기는 힘에 그녀의 시야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얼떨떨하게 전방을 주시하는데, 그의 손이 헝클어진 뒷머리를 쓱 쓸어 주었다.
“선배…… 나 얼마나 잤어?”
“두 시간.”
“그만큼이나 잤어?”
“어. 잘 자더라.”
키득거리며 웃는 그의 모습에 문득 쑥스러워진 애리얼이 제 앞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나 이상한 얼굴 안 했어?”
“새삼. 원래도 이상하게 생겼잖아.”
“그랬어? 선배는 내 얼굴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맞아, 좋아해.”
그는 방금과 달리 조금 진지한 어투를 취해 말했다. 언뜻 들으면 넌지시 하는 고백이라 착각할 만큼 그는 묘하게 태도를 바꿨다.
애리얼은 기시감을 느꼈으나 태연하게 굴었다.
“그래도 내 얼굴은 좋아해 주는구나.”
“왜 얼굴만이라고 생각해?”
“내가 얼굴만 물었으니까? 목적어 없이 좋아한다고 해도 얼굴을 말하는 줄은 알지.”
“다른 의미라면 어쩔래.”
그가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지으며 애리얼을 떠봤다. 그래도 그녀의 반응은 아까와 같았다. 애리얼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다른 의미라면…… 좋다는 건, 거짓말이 되잖아.”
“왜 거짓말인데? 내가 너한테 진짜로 마음이 있으면 어쩌려고.”
“거짓말.”
그녀의 반응은 일관적이었다.
렉시우스는 거듭 미끼를 던져도 별 반응 없는 애리얼에게 도리어 이끌린 듯 흥미를 보였다. 그녀가 계속 거짓말이라 간파해 내는 이유를 추궁하듯이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음……. 정확하게 설명하긴 어려운데, 선배가 날 꾀어내려고 하는 것 같을 때는 묘하게 분위기가 다르거든. 전에 백작저에 왔을 때도 그랬잖아. 갑자기 이상하게 진중하고 진심인 것같이 보이는 거.”
“그러니까 진심으로 느껴야 하지 않아? 넌 왜 반대로 가냐.”
“모르겠어. 왠지 그냥 그렇게 느껴졌어.”
그리 답변하자, 그의 얼굴에서 연기하는 티가 확 사라졌다. 약간 허를 찔린 듯 그대로의 감정을 내보이는 민얼굴. 애리얼과 시선을 마주하던 렉시우스는 문득 빈자리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우우우웅-
치마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갑작스러운 울림에 놀란 나머지 애리얼의 표정이 잠시 흐트러졌다. 다행히 렉시우스의 눈이 다른 곳을 향한 후였다.
‘호감도가 오른 건가? ……뭔데 올랐지?’
그렇게 개고생하며 수업을 따라갈 때는 꿈쩍도 하지 않더니, 갑자기 상승한 호감도가 당황스러웠다.
애리얼은 재빨리 그를 살폈다.
렉시우스는 사념에 열렬히 골몰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이 이리저리 빈 곳만 골라 움직였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애리얼을 향했다.
그는 샌드위치를 집어 건넸다.
“잘 관찰했네. 칭찬해 줄게, 자.”
애리얼은 상처럼 다가온 샌드위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받아 들었다.
“고마워.”
렉시우스는 대꾸하지 않았다.
애리얼도 더 대화하려 노력하진 않았다. 호숫가를 보며 그에게서 건네받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옆자리의 그는 포도를 씹어 먹었다.
조용한 식사였다.
***
렉시우스는 그녀를 도서관 앞까지 데려다주고는 떠났다. 식사 때는 무심할 정도로 고요했으나 헤어질 때는 다정하게 손을 흔들어 줬다.
애리얼은 멀어져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배웅하고는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두 시간이나 잔 덕분에 머리가 꽤 맑았다. 못다 뺀 진도를 혼자서라도 이어 가야 했다.
다만, 시작하기 전에 먼저 확인할 것이 있다.
애리얼은 책상에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호감도가 올랐습니다.』
『렉시우스 크레시앙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걸기도 합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1관』
‘한 개 반!’
제일 호감도가 높은 스카이라와 고작 반 개 차이다. 그간 렉시우스와 함께하며 했던 고생이 아주 의미가 없진 않았구나. 애리얼은 뿌듯함을 느끼며 화면을 바라보다가 펜을 쥐었다.
그러나 금방 손을 놓았다.
오늘은 진도를 별로 빼지 못한 탓에 복습할 것이 많이 없었다. 예습도 여의치 않았다.
한 시간도 못 하고 그녀는 책을 덮었다.
효율이 나지 않았다. 차라리 하루 정도는 온전히 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애리얼은 늘어놓았던 책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서관을 나서자 환한 낮의 풍경이 펼쳐졌다. 나뭇잎 사이와 그림자의 경계에서 햇빛이 반짝거렸다.
애리얼은 새삼스럽게 신기했다. 최근 일 주 동안은 아예 어둡거나 혹은 노을이 지는 풍경만 주로 보아서, 쨍쨍한 햇살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무 그림자가 진 아래로 터벅터벅 걸었다. 애리얼은 땅바닥만 보다가 문에 다다라서야 정면을 보았다.
이상하게도 기이한 긴장감이 흘렀다.
늘 이용하는 뒷문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애리얼이 물러나려는데 문이 열렸다.
인기척의 주인공과 마주했다.
피하고 피하던 하트 두 개의 선두 주자, 스카이라.
그가 팔짱을 끼고서 벽에 기댄 채 그녀의 앞길을 막고 섰다. 반듯한 눈썹 사이에 실금이 가 있었다. 풍기는 기색으로 보건대 그는 애리얼에게 뭔가 불만이 있는 듯하다.
‘휴대폰을 봤어야 했는데…….’
애리얼은 안일했던 제 행동을 뒤늦게 후회했으나 이미 그와 맞닥뜨린 후였다.
스카이라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그녀를 향했다.
“어디로 내빼고 다니나 했더니, 줄곧 이리로 다닌 거야?”
“저하께서 왜 여기에…….”
“왜. 난 여기로 다니면 안 되나?”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저하와 마주친 바람에 조금 놀라서 그랬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애리얼은 한 발 물러나 머리를 숙였다.
그의 표정이 화난 듯 잔뜩 일그러졌다.
“넌, 항상 나한테 그런 식으로…….”
으르렁거리던 스카이라의 음성이 뒤로 갈수록 흐지부지되었다. 예를 지켜 거리를 두는 애리얼의 행동에 화가 났으나, 그녀의 행동은 옳았다. 황족에게 보여야 할 예로서 타당하여 추궁할 구석이 없다.
스카이라는 벽에 기댄 상체를 일으키며 팔짱을 풀었다. 한 발 물러난 그녀에게 한 발 다가섰다.
“요즘 일찍이 나가서 느지막하게 들어온다며?”
“네? 아……. 네. 제가 기초가 많이 부족해서, 수업에 뒤처지지 않도록 따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뭐야, 그런 거면 내가 가르쳐 줄 수도 있는데.”
스카이라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은근하게 으스댔다. 딴에는 그녀가 당장에 조르고 달려들 줄 아는지.
“말씀은 정말 감사하지만, 이미 공부를 가르쳐 주시는 분이 계셔서…….”
“뭐? 누가?”
스카이라는 그녀가 말하는 도중에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뒤이어 그는 화난 모양새로 두 눈을 치떴다. 영역을 침범당한 동물처럼 예민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애리얼은 조금 망설이다가 자신에게 쏘아지는 맹렬한 눈빛에 이윽고 실토했다.
“대공자께서 제 공부를 봐주시고 계세요.”
“대공자……. 렉시우스한테 배우고 있다는 거야?”
“네. 월수금과 주말에 하루 두 시간 정도, 배우고 있어요.”
“그만큼이나 같이 있었다고?”
“제가 배움이 많이 모자라서 대공자님께서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주셨습니다.”
“…….”
거듭 질문하던 그의 눈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새파란 눈에선 냉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괜히 애리얼만 가슴이 졸아들었다.
‘질투하는 건가?’
이유가 짐작되자 그녀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렉시우스를 언급하지 않는 게 좋았을까. 그러나 숨겨도 금방 들통났을 거다.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었는데.’
스카이라가 언제 자신의 경로를 알아챘는지 모를 일이었다. 날 선 추궁이 날아올 것을 염려해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월수금과 주말에 두 시간씩. 그러면 내일도 보겠네?”
벼르듯이 침묵하다 튀어나온 스카이라의 음성은 의외로 유려하고 차분했다. 애리얼은 약간 얼떨떨하게 있다가 조금 늦게 반응했다.
“네. 내일도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그래. 그러면…….”
그는 말끝을 흐리며 허리를 기울였다. 그녀와 눈높이를 엇비슷하게 맞추며 나지막하게 뒷말을 소곤거렸다.
애리얼은 곤란한 듯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