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이른 아침의 도서관. 흑단 나무 책상 앞에 세 사람이 마주 앉았다.
렉시우스가 심히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애리얼을 응시했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얜 뭐냐?”
“선배의 가르침을 받고 싶대요.”
“학년 평가 1등 먹은 놈이?”
렉시우스가 실소하며 스카이라를 흘겨보았다. 온갖 심화 과정을 다 배워 통달한 인간이 제 가르침을 받겠다고.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하도 어이가 없어 렉시우스는 자꾸 비식비식 웃음이 샜다.
스카이라는 귀를 벌겋게 물들이며 딴청을 피웠다.
애리얼이 그를 신기해하며 보았다.
“저하, 1등이셨군요.”
“아니…… 그, 그런 거 아니야.”
애리얼의 물음 아닌 물음에 스카이라는 더듬거리며 부정했다. 성적을 부인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이 댔던 어처구니없는 핑계를 부인하는 건지. 붉게 달아오른 낯을 그가 고개 돌려 감췄다.
애리얼은 스카이라를 좀 더 추궁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벌집을 들쑤시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스카이라는 겨우겨우 표정을 정리하고 시선을 맞추었다.
“……시간표는, 뭐로 채워서 냈는데?”
“마력학, 마공학에 마력전, 마공전, 그리고 교양이 하나. 나머지는 다 비웠어요.”
애리얼은 순순히 시간표를 알려 줬다. 그에 스카이라는 만족하긴커녕 오히려 의문이 더 늘어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게, 기초가 부족하다던 애리얼이 듣기엔 너무 어려운 과목뿐이었으니.
스카이라가 막 의문을 제기하려는데, 렉시우스가 선수를 쳤다.
“교양은 뭐 하러 듣는데?”
“그냥 하나쯤은 넣어 두고 싶었어요. 기왕 좋은 아카데미에 온 김에 뭐라도 더 들으면 좋잖아요.”
“근데 넌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갑자기 또 주제가 튀었다.
렉시우스의 개인적인 질문에 스카이라의 시선이 애리얼에게로 꽂혔다. 무슨 소리냐, 소리 없이 따져 묻는 눈빛이 맹렬했다.
애리얼이 난감해하는 얼굴로 렉시우스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고 또 한마디를 더 얹었다.
“내 이름도 잘만 부르더니.”
“그건…… 완전히 사적인 자리에서만 한시적으로 허락되는 호칭과 말투라고 생각해서요.”
“지금이 공적인 자리였나?”
“그렇지는 않지만…….”
애리얼이 명백하게 스카이라를 의식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어제처럼 반말해 봐. 렉스 선배, 하면서.”
“아뇨. 지금 그럴 수는…….”
“뭐 어때. 내가 허락했는데. 이름이라도 불러 봐.”
렉시우스의 눈은 그녀의 곤경을 아주 잘 읽어 내고 있었다. 짓궂게도 일부러 저러는 거였다. 느슨히 풀린 그의 입꼬리가 위로 휘어져 있었다.
“…….”
애리얼은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선배의 이름이 목구멍에서부터 켕겨 올라오지 않았다.
누구를 도발하는지 아는 이상, 그녀는 렉시우스의 요구에 어제처럼 순순히 응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엔 옆자리의 눈치가 보였다. 스카이라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몇 번 봤다고 그새 이름을 부르는 사이란 말이지…….”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음산했다.
애리얼은 괜히 제 발이 저린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고개를 돌릴 용기는 나지 않아 곁눈질로 스카이라를 살폈다. 금발 아래 예쁘장한 얼굴에는 음영이 짙었다. 그의 구겨진 표정이 렉시우스를 향해 적나라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정작 적대감의 대상이 된 렉시우스는 능청스러웠다. 살벌한 스카이라의 눈을 마주하고서도 그는 여유가 넘치는 걸로도 모자라 싱긋 웃기까지 했다.
“친한 사이니까 이름도 부르고 하는 거지.”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는데.”
“글쎄. 얘가 아카데미에 와서부터 제대로 봤으니까 며칠 안 됐지. 한 일주일 정도?”
길지 않은 기간을 고지받은 스카이라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대공자라는 인간이 고작 일주일 만에 이름을 허락한다고.”
“나랑 애리얼은 꽤 각별한 사이라서.”
“몇 번 더 보면 아주 입도 맞추겠다?”
“못 할 거 없지.”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냐는 양 태평스러운 어조.
렉시우스의 저런 소리가 그저 장난임을 아는 애리얼은 침착했으나, 스카이라는 아니었다. 농담인 걸 아는데도 가볍게 넘기지 못했다. 말을 들은 즉시 스카이라의 안면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가 내비치는 분위기는 이제 질투 같은 귀여운 소리로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렉시우스마저 의중을 물어 올 정도였다.
“뭘 그렇게 화내는 거야.”
“화 안 냈어.”
“그럼 인상 좀 펴라. 아주 잡아먹겠네.”
“…….”
“너도 어지간히 질투한다.”
그 소릴 듣자 방금까지 차갑게 굳었던 스카이라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그딴 거 아냐!”
그가 책상을 쾅 짚고 일어난다. 이제까지 중 가장 예민한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더 진짜 같은데.”
“아니라고 했잖아!”
재차 소리 지르는 스카이라의 모습에는 이성이 옅어 보였다.
렉시우스는 그저 흥미로 몇 번이고 도발을 감행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스카이라에게 그걸 감내할 인내심이 별로 없다는 거였다. 그는 싸움을 걸면 곧장 호응할 기세였다. 데본시아를 마주했을 때와 비슷했다.
자신의 것을 탐내거나 빼앗으려는 침입자에게 보이는 발작적인 증세.
그 원인을 알기에, 애리얼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았다.
“……스카이라!”
황족의 이름을 거침없이 불렀다. 허락도 없이.
이름의 주인인 스카이라, 맞은편에 앉은 렉시우스도 고개를 돌렸다. 둘 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결국 일을 쳤다.
알아도 절대로 불러선 안 된다고 그녀 스스로 되새기고 되새겼었던 이름이었다. 혹시라도 부르게 된다면 분명 실수일 거고, 벌로 감옥에 갈 줄 알았지.
그런데 지금에 와선 일부러 외치고 있었다. 두 고위 계급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끊어 내기 위해서.
“이제 잡담은 그만하고 공부하자!”
애리얼은 애써 명랑하고 성실한 인물을 연기하며 급하게 책부터 펼쳤다.
둘은 잠자코 그녀를 주목하다가, 필기로 빼곡한 책을 향해 시선을 떨궜다. 덕지덕지 붙은 메모와 수없이 그어진 밑줄. 가상한 노력이 보이는 페이지를 보고는 차분하게 표정을 죽였다.
“오늘은 진도, 천천히 나갈게.”
렉시우스가 한마디 했다.
“어려운 거 있으면 말해.”
스카이라 역시 한마디 했다.
그녀가 어설픈 연기로 내뱉은 공부하자는 소리에 순순히 따랐다. 웬일로 둘 다 상냥했다.
하지만 찰나의 순순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애리얼을 가르치는 중에도 둘은 꽤 자주 충돌했다.
렉시우스가 짧게 짧게 핵심만 가르치면, 스카이라는 지나치게 대충이라고 타박했다. 헷갈릴 수 있는 부분을 짚어 줘야 한다거나, 그렇게 단순히 설명하면 이해가 부족해 응용할 수 없을 거라는 둥. 이미 이 분야에 통달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소리를 스카이라는 세세히도 말했다.
‘기초를 배운 지 오래돼서 까먹었다느니 한 학년 위의 선배가 가르치는 방식을 배우고 싶다느니 했던 거…… 전부 거짓말이었구나.’
애리얼은 옆자리의 스카이라를 대단하게 보았다.
그는 렉시우스의 설명 방식에 아주 열정적으로 딴지를 걸고 있었다. 선배의 가르침을 받고 싶었다더니, 배우고자 하는 자세는 조금도 없었다. 어떤 부분에선 렉시우스보다도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래, 새끼야. 니 말이 다 옳다.”
렉시우스가 질려 버린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지속적인 의견 충돌에 완전히 지쳐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그제야 스카이라가 말을 멈췄다.
가져온 것도 몇 개 없는 렉시우스는 바지 주머니에다 손을 쑤셔 넣고는 걸음을 옮겼다.
애리얼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다 대고 물었다.
“선배, 가?”
렉시우스는 잠시 멈춰서 고개만 휙 돌렸다. 그가 애리얼과 마주 보았다.
“내일부터 너도 강의 들어가잖아. 이 시간에 나오지 마라. 나와도 나 없어.”
“그럼 몇 시에 올까?”
“나중에 천천히 알려 줄게.”
렉시우스는 다시 몸을 돌리고 갈 길을 재촉했다. 거기에 대고 애리얼은 인사를 보냈다.
“응. 선배, 다음에 봐.”
렉시우스는 그녀의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서 대충 손만 흔들어 줬다.
그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졌다.
한 명이 빠졌을 뿐인데 도서관의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애리얼은 펜 끝으로 종이의 귀퉁이를 톡톡 건드렸다. 나가다 만 진도 때문에 책의 페이지는 애매하게 멈춰 있었다. 수업을 재개하지도, 파하지도 못했다.
‘내일부터는 강의도 들어야 하고, 오늘은 그만하는 게…….’
그러나 어정쩡하게 중단된 페이지가 애리얼은 조금 거슬렸다. 하필 어려운 부분이라 독학하자면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그런다고 그녀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래도 혼자 해 볼까? 아니면…….’
애리얼은 흘금 옆자리를 확인했다.
방금까지 열변을 토하던 스카이라는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그녀와 나눌 말은 딱히 없는지, 그는 급격히 과묵해졌다. 그런데도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일부러 이러는 걸까?’
굳이 도서관에 따라오겠다고 갖가지 변명을 했던 그 본심을 생각하면 애리얼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질투, 그리고 질투의 원인이 된 저를 향한 그의 호감, 하트 두 개분.
여기서 애리얼이 그에게 도움을 요구해도 그는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리얼은 손가락에 걸쳐 놓았던 펜을 고쳐 잡았다.
“저하,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이 파트까지만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요?”
“그건 괜찮은데…….”
스카이라는 예상대로 거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다소 건방진 요구였던 걸까. 조금 더 저자세를 취하려는 애리얼에게 그가 만류하듯 말을 꺼냈다.
“앞으로 반말해. 이름으로 부르고.”
그에게 거슬렸던 건 부탁보다는 말투였던 모양이다. 제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며 쌀쌀맞게 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참 별일이었다.
“사적인 자리에서요?”
“응.”
“……그럼 편하게 부를게, 스카이라.”
이름을 불린 그가 수줍게 양 볼을 붉혔다. 감정이 너무 뻔히 보인다. 그는 도무지 숨길 줄 몰랐다.
애리얼은 황급히 스카이라에게서 눈을 뗐다. 선명하게 비치는 그의 호감을 눈앞에서 인식하자 애리얼은 부끄러워졌다.
‘저러니까 괜히 의식되잖아!’
하릴없이 책만 바라보며 모르는 체하느라 그녀는 진땀을 뺐다.
“그러니까…… 이 부분, 마력의 분리랑 재융합. 여기부터 이해가 어려워서…….”
“어디.”
“여기…….”
애리얼이 페이지의 한 부분을 손으로 짚자 스카이라가 몸을 기울여 다가왔다. 고개 숙인 옆으로 그의 얼굴이 가깝게 보였다.
파란 눈이 그녀의 손끝이 닿은 자리로 향했다. 그가 차분해진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애리얼은 가만히 그 음성에 집중했다.
명확한 발음, 유려한 말투. 그는 상세하게 하나하나 설명하다가 전체적인 흐름을 잡아 줬다. 진도는 더뎠으나 굉장히 섬세했다. 기초와 연계하여 조금씩 심층적인 내용을 다루어 갔다.
애리얼은 자연스레 질문이 많아졌고, 스카이라는 그녀가 묻는 것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전부 대답해 줬다.
배우고 가르치는 시간이 굉장히 길어졌다.
원했던 부분까지 진도를 마쳤을 즈음에는 등 뒤로 노을이 떨어지고 있었다.
애리얼은 점심도 잊고서 몰두했다. 찌뿌둥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고는 책을 덮었다. 배도 고프고, 눈도 피로했다. 장시간의 공부는 체력을 상당하게 소모했다.
‘스카이라는 더 힘들었겠지.’
애리얼을 가르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말해야 했다. 피로하기도 할 테고, 목도 아플 거다. 마찬가지로 식사를 못 했으니 배가 고프기도 하겠고.
“질문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지? 미안해.”
“딱히…….”
“오늘은 정말 고마워. 내가 뭐로든 꼭 보답할게.”
“별로 안 해 줘도 돼.”
“그래도 내가 해 주고 싶어. 뭐 특별히 좋아하는 거 있어?”
“……그다지.”
잠시 고민한 듯 스카이라는 대답이 조금 느렸다. 말을 꺼내기 전의 짧은 침묵 동안, 그의 눈동자는 슬그머니 애리얼을 훑고 갔다. 애리얼은 알아채지 못했다.
스카이라는 아까보다 더 시큰둥하게 굴었다.
애리얼은 저 태도가 피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다. 기초가 부족한 자신을 가르치다가 진이 빠져 버린 걸지도. 정해진 진도의 끝을 향해 갈수록 그의 말이 느려졌던 게 떠올랐다. 성대를 오래 혹사했으니, 더는 말하기 싫을지도 몰랐다.
애리얼은 이쯤에서 대화를 끝맺기로 했다.
“나중에라도 갖고 싶은 거나 좋아하는 거 있으면 말해 줘.”
“…….”
스카이라는 말이 없었다. 과묵하게 입을 다물고 어딘지 뚱하게 앉아 있었다.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나?’
이럴 땐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상책이었다. 애리얼은 초조하게 스카이라를 살피다 책을 챙겨서 일어났다. 의자를 밀어 넣고서 스카이라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냈다.
“늦었으니까, 먼저 갈게.”
무심하던 스카이라의 얼굴이 조금 구겨졌다. 애리얼은 괜히 더 마음만 급해졌다.
“그럼 난 이만…….”
“갖고 싶은 거.”
그녀가 허둥지둥하는데 그가 딱딱하게 말을 얹었다.
“다음에 말할게.”
“아……. 응. 다음에 봐.”
애리얼은 짧게나마 인사를 남기곤 몸을 돌렸다. 발걸음이 일정한가 싶다가 점점 빨라졌다. 달아나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스카이라의 두 눈이 멀어지는 애리얼을 진득하게 응시했다. 아쉬운 듯 질척하게, 그는 조용히 혼잣말을 꺼냈다.
“……지금 달라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