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일주일의 적응 기간이 끝나고, 월요일. 처음으로 강의에 들어가는 날.
오늘부터 다시 한 달, 새롭게 적응 기간이 주어진다. 여러 가지 수업을 경험한 뒤 자신에게 맞는 최적의 시간표를 짜는 기간이었다.
대부분의 신입생은 이 동안 다양한 강의에 들어갔다. 최대한 여러 가지를 듣고 필요한 강의를 골라냈다. 그다음 추려 낸 강의를 조합해 적성뿐만 아니라 시간과 동선까지 고려한 최적의 시간표를 짰다. 그렇게 만들어 낸 시간표는 적응 기간이 끝나기 일 주 전에 반드시 제출해야 했다.
아카데미의 크기와 강의 수를 생각하면, 아무리 한 달의 적응기를 준다 해도 상당히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다.
신입생의 대부분은 시간표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애리얼은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월요일
오전 10시 - 마력학(아카데미 3관, 제1 교육실)
오후 3시 - 마공학(아카데미 10관, 제5 교육실)」
애리얼은 렉시우스가 친히 짜 준 시간표를 확인한 뒤 가볍게 가방을 챙겨 나왔다.
제1 기숙사에서 아카데미 3관까지는 거리가 상당했다. 타 기숙사는 시간마다 운행하는 셔틀을 타고 이동했으나, 애리얼에게는 개인 차량이 제공되었다.
‘이것도 특별 귀빈으로서의 최상급 대우겠지.’
부드러운 가죽 시트에 앉은 애리얼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에 부담을 느꼈다. 그녀가 받는 대우는 왕족에게도 제공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특혜로 이루어져 있었다. 익숙해질 듯 익숙해지지 않는 취급이었다.
달리는 차는 걸어서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십여 분 만에 이동했다.
붉은색 벽돌 건물이 군집을 이룬 아카데미의 교사(校舍) 동. 거기에서도 가장 중심에 있는 건물인 공용 도서관. 그 바로 옆에 가로로 위치한 건물이 3관이었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바로 보이는 가장 큰 강의실이 3관의 제1 교육실이다.
애리얼은 최대한 주목을 덜 받길 바라며 차에서 내렸다.
교사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단상 앞에 섰던 시간이 짧았던 덕인지 애리얼을 알아보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내심 다행이라 여겼다.
애리얼은 벽면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재촉하며 강의실로 들어갔다.
반원 형태의 내부, 계단식으로 형성된 책상 앞에 학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족히 300명 이상은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인데도 불구하고 자리는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애리얼은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빈자리를 물색했다. 가장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교탁이 있는 자리부터 한 칸씩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유난히 이질적인 인물이 그녀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교탁에서 일곱 번째 줄, 가운데 자리.
온통 검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흰 교복. 백일점.
선명한 금발을 가진 그는 다섯은 앉을 수 있는 책상을 홀로 차지하고 있었다. 어제도 봤던 스카이라였다.
시선을 느낀 그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광채마저 느껴질 정도로 푸른 눈이 정확하게 애리얼을 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손짓을 보냈다. 까딱까딱, 이리 오라는 듯이.
빈자리를 찾지 못한 애리얼은 그가 부르는 대로 층계를 내려갔다. 그가 제 옆자리를 흘깃 보았다. 와 앉으라는 의미였다.
스카이라의 행동에 강의실이 웅성거렸다.
애리얼은 자신에게 몰리는 시선을 애써 모르는 체하며 그의 옆에 앉았다.
“안녕, 애리얼.”
“스…….”
애리얼은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 주변을 인식하고 말투를 고쳤다.
“저하께서도 이 강의를 들으시나요?”
“눈치 보지 말고 반말해. 괜찮으니까.”
스카이라는 질문보다 애리얼의 존댓말에 먼저 반응했다. 구태여 그걸 지적까지 해 줬다. 대화를 몰래 엿듣던 주변 학생들이 기겁을 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감히 황족에게 반말이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애리얼은 황급히 목소리를 줄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상관없어. 그냥 해.”
그는 고집스럽게 요구했다.
애리얼은 난감해졌다. 아무리 한자리서 수업받는 아카데미라 해도 황족에 대한 반말의 사용은 위계가 무너지는 일이었다. 렉시우스도 공적인 자리에서의 반말은 그녀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스카이라의 요구는 이례적이다 못해 위험한 것이었다.
‘……이래도 되나?’
본인이 괜찮다고 한들 껄끄럽긴 매한가지여서, 애리얼은 안 그래도 낮춘 목소리를 더 줄여 가며 소곤거렸다.
“너도 이거 들어?”
“들으니까 여기 있지.”
“네가 들을 정도면 이 강의 상당히 어렵겠다.”
“그건 아닐걸.”
“……하지만 난 마력에 관해선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수준인걸.”
“그래도 괜찮을 거야. 모르는 게 있으면 내가 가르쳐 줄게.”
“교수님께 묻는 게 아니고?”
“나도 잘 알아. 그러니까 나한테 물어.”
교수보다 자기한테 물으라니, 이상했다. 이 과목을 완전히 꿰고 있기라도 한 듯.
“……잘 알고 가르칠 수준인데 이걸 듣는 거야?”
“…….”
스카이라는 뒤늦게 제 모순을 눈치챈 건지 대꾸를 못 했다. 뺨을 붉히고서 딴청만 피웠다.
‘혹시 일부러 수강한 건가? 나랑 같이 들으려고?’
애리얼은 그런 추측도 들었다. 하트의 개수는 늘어나지 않았지만, 드러날 정도가 아닐 뿐 호감도는 조금씩 진전 중인 걸 수도 있었다.
그렇게 떠오른 추측이 애리얼의 안에서 의심으로 변할 즈음, 교탁으로 교수가 와 섰다.
***
마력학은 수월한 수업이 전혀 아니었다.
스카이라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애리얼은 진도를 따라가기 벅차 숨이 막힐 정도였다. 애리얼의 책에는 페이지마다 체크 표시가 가득했고, 그만큼 모르는 게 여럿이었다.
한 시간의 강의가 끝나자 애리얼은 진이 다 빠졌다. 강의 인원이 확정되기 전이라 약식 수업을 하는데도 이랬다. 한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한 달 후에는 강의 시간도 진도도 훨씬 늘 텐데…… 앞으로 따라갈 수 있을까.’
애리얼의 고민이 깊어졌다. 학생들이 강의실을 우르르 빠져나가는데 그녀는 가만히 앉은 채였다.
스카이라가 그녀의 옆을 가만히 지키다 먼저 말을 건넸다.
“많이 어려웠어?”
“응……. 내가 기초가 부족하긴 한가 봐. 머리가 아플 정도야.”
“걱정하지 마.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가르쳐 줄게.”
“그러면 여기, 마력의 독자적 분할…….”
“지금은 말고.”
물으랄 땐 언제고, 스카이라는 질문을 뚝 끊어 버렸다. 애리얼은 당황스러워하며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한발 더 나아가 그녀의 책까지 덮어 버렸다.
“점심 먹고 하자.”
“어……? 그, 그래.”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 책을 챙겨 넣자마자 애리얼은 그에게 손목을 잡혀 끌려갔다. 뭐가 그리 급한지 걸음이 무척 빨랐다. 질문할 새가 없었다.
3관 건물 앞에는 차가 떡하니 대기하고 있었다.
애리얼은 결국 차 안까지 끌려가 그와 나란히 앉게 된 후에야 질문을 할 수 있었다.
“같이 먹자는 소리였어?”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리얼은 어디로 가냐고 더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가벼운 언행에 놀란 건지 앞좌석 운전기사의 등이 눈에 띄게 긴장해 있었다.
황족에게 가벼이 말하는 건 어느 상황에서든 껄끄러운 일이었다.
애리얼은 그와 완전히 둘인 상황을 제외하곤 말을 아끼자고 생각했다. 그러자 대화는 자연히 끊겼다.
차 안에다 계속 눈을 두기도 지루해서 애리얼은 커튼을 걷었다. 바라본 차창 밖으로 묘한 풍경이 지나갔다. 아카데미에선 보이지 않던 조경수들이 그녀의 시야를 한가득 메웠다. 저번에 황성을 방문했을 때나 봤던 진귀한 식물이었다.
차가 아카데미를 빠져나가 황성으로 가고 있는 게 확실했다.
“저하…….”
“왜 또 존댓말이야. 넌 번복이 특기야?”
스카이라가 미간을 팍 찡그리며 말을 잘랐다.
반말이 뭐라고, 애리얼은 자신의 말투에 집착하는 스카이라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은 비교할 렉시우스도 없는데. 도대체 왜 이러냐는 질문이 튀어나오려 했으나, 당장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디 가는 거야?”
“황성 중앙관.”
“거길…… 점심 먹으러 가는 거야?”
“왜, 싫어?”
“내가 가도 되는 곳인지 모르겠어. 부담스러운 곳이기도 하고…… 사실 조금 불편해.”
“…….”
애리얼의 대답을 다 들은 스카이라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 보였다. 그는 과묵한 얼굴로 좌석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다 차가 황성 입구에 다다를 즘에 입을 열었다.
“차 돌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저하.”
“제1 기숙사 동 정원.”
황성 정문에 다다랐던 차가 방향을 틀어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그의 변덕에 애리얼은 눈을 크게 뜨고서 그를 응시했다. 스카이라는 쑥스러운 듯이 시선을 피했다.
“황성은 불편해서 싫다며.”
“아…….”
원래는 황성 중앙관에서 식사 예정이 잡혀 있었을 텐데, 스카이라는 고작 애리얼의 말 한마디에 일정을 바꿨다. 그로서는 애리얼을 굉장히 배려해 준 셈이었다.
“그래도 괜찮아?”
“괜찮으니까 이러지.”
스카이라는 여전히 딴 곳을 보고 있었다. 눈을 맞추기가 영 부끄러운지.
“고마워.”
애리얼이 그렇게 말하니 스카이라는 얼굴까지 붉혔다. 도무지 하트 두 개라곤 볼 수 없는 선명한 호감의 표시.
애리얼은 휴대폰을 확인해 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아카데미로 돌아온 차는 어느새 에메랄드그린으로 이루어진 제1 기숙사의 입구 길을 지났다. 분수가 보이는 정원의 한 군데에 정차했다.
애리얼과 스카이라는 벽돌 길에 내려 잔디밭으로 걸어갔다. 분꽃나무가 만발한 사이 하얀 파라솔 아래 원목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흰 테이블보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식기가 보였다.
애리얼은 완벽하게 구성된 식사 테이블에 감탄했다. 돌발적으로 방향을 틀어 왔는데도 벌써 준비가 되어 있다니, 놀라웠다.
“앉아.”
먼저 앞서간 스카이라가 애리얼에게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
시녀나 보좌관이 있었다면 기절초풍했을 광경이었다. 시종이나 할 일을 황자가 직접 했으니…….
당황한 애리얼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가 다시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고마워.”
감사를 전하곤 의자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그가 앉았다.
“뭐 먹고 싶은 건…….”
“……저하! 저하!”
멀리서 급하게 뛰어온 보좌관 때문에 스카이라의 말이 끊기고 말았다. 그의 표정에 오만 신경질이 다 떠올랐다.
“왜, 필릭.”
“아시잖습니까.”
“아니. 모르겠는데.”
“오늘 황성 일정 말입니다. 폐하와 오찬 약속이 있잖습니까. 저하, 당장 가셔야 합니다.”
보좌관은 스카이라가 원망스럽다는 듯 애걸했다.
그걸 듣는 애리얼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스카이라는 일정에 대해 모르는 체를 하고 있지만, 실제론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가 처음에 가려던 곳이 황성 중앙관이었으니까.
그는 제 일정에 애리얼을 데려가려고 했다. 그녀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서.
‘하마터면 황제와 오찬을 할 뻔했잖아!’
애리얼은 상상만으로도 피가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죽다 살아온 기분이다.
스카이라는 부루퉁하게 보좌관을 훑다가 귀찮아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은 애리얼의 혈색이 말도 못 하게 창백해진 걸 보고는 표정이 변했다. 스카이라의 입술 사이에서, 하아, 한숨이 내쉬어졌다. 그는 떠밀리듯이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은 너 혼자 먹어야겠다. 미안.”
“아뇨! 괜찮습니다. 전 신경 쓰지 마세요.”
애리얼이 말을 뱉은 즉시 스카이라가 얼굴을 사납게 찌푸렸다. 존댓말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가는 걸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아서인지 모르겠다. 둘 다일 확률도 있었다.
“괜찮다니 참 다행이네.”
스카이라는 화가 난 건지 말투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는 쌩하니 몸을 돌려 다시 차로 향했다.
이윽고 스카이라를 태운 차가 정원을 빠져나갔다.
드디어 혼자가 된 애리얼은 주변을 슬쩍 살피고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공략 대상이 근처에 있습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1 기숙사 동 입구』
스카이라의 호감도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기분을 상하게 해도 이제는 좀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다고 오른 것도 아닌데, 왜 자꾸 행동이 과해질까…….”
앞으로 반 개든 한 개든 더 오르면 지금보다 얼마나 더 심해질지, 겁날 지경이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