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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41화 (41/264)

41화

황성 중앙관에 도착한 스카이라는 응접실을 지키고 있던 렉시우스와 마주쳤다. 그를 발견한 렉시우스가 이죽거리며 다가왔다.

“결국 혼자 오셨네.”

“…….”

“왜? 걔가 황자비 하기 싫대?”

“그것보단 여기 있는 것들이랑 만나기가 싫은 눈치던데?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자더라.”

스카이라는 피식 비웃으며 반박했다. 진실과 능청스럽게 섞은 거짓말이 아주 자연스럽게도 흘러나왔다.

자신만만하던 렉시우스의 기세가 기이하게 한풀 꺾였다. 평소와 다른 그의 반응에 스카이라는 기세 좋게 몇 마디 더 얹었다.

“아, 그리고 걔, 강의실에서도 나한테 반말하더라. 다른 눈도 많은데, 내가 편한 모양이더라고.”

“네가 시켜서 그런 거겠지.”

“웃기고 있네. 무슨 근거야.”

“걔 성격이 다른 시선 무시하고 너한테 반말할 정도로 그렇게 예의 없진 않아.”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

“너보단 잘 알지.”

“니가 뭔데……!”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 대화가 멎었다. 둘의 고개가 한곳으로 돌아갔다.

오만한 자태의 데본시아가 복도로 걸어 나왔다. 따악, 그가 한 번 더 중지를 튕기며 이목을 끌어냈다. 한참 아래 것들을 주목시킬 때 하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순식간에 기분이 더러워진 둘은 미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황자와 대공자의 반항적인 얼굴을 마주한 데본시아가 미미하게 웃었다.

“폐하를 만나는 오찬 자리를 앞두고서 잡담하는 소리가 너무 시끄럽네.”

데본시아의 말이 정당한 지적이기는 한지라 황자와 대공자의 입은 조용히 다물렸다.

아무리 친밀함을 강조하는 자리라 한들 고위 계급이 모이는 오찬이었다. 사담으로 언성을 높이는 짓은 안 될 일이다.

“그리고 스카이라, 방금의 사담에서 황자비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누구지? 후보를 뒀다면 폐하께 말씀드려야 할 것 아니니.”

“그런 거 없어.”

“말하기 싫은가 보네.”

“…….”

“내가 맞혀 볼까?”

“…….”

“아니면 뺏어 볼까.”

냉정을 잘 유지하는가 싶던 스카이라의 눈이 그 한마디에 희번덕 뒤집혔다.

상황이 크게 번질 것 같자 렉시우스가 대뜸 끼어들었다.

“마찬가지로 사담인 듯한데, 이쯤 하셨으면 합니다, 황태자 전하.”

렉시우스는 살갑게 웃으며 존댓말을 썼다. 그러나 정중한 분위기는 별로 없었다. 오히려 데본시아를 비꼬는 느낌만 만연했다.

그에 데본시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유롭게 눈웃음을 흘려 주고는 먼저 오찬장으로 들어섰다.

황태자가 멀어지자 렉시우스는 가식적으로 지었던 미소를 서서히 거뒀다. 그는 한층 무거워진 목소리로 스카이라를 핀잔했다.

“농은 좀 흘려들어.”

“네가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적어도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는 않겠지. 기본이잖아, 스카이라. 왜 이렇게 순진해졌어?”

“그따위로 말하지 마.”

데본시아의 어투를 살짝 따라 한 것만으로도 스카이라는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지나친 적대에 렉시우스는 눈살을 찌푸리려다가 돌연 흥미를 나타냈다.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하게 예민하네. 네 성격,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

“걔한테 얼마나 진심인 거야.”

“조용히 해.”

“뺏길까 봐 초조해?”

“…….”

“안 뺏기게 확실한 낙인을 찍으라던 건 나였지만, 이렇게 곧장 황자비로 만들 생각을 했냐.”

“넘겨짚지 마. 그런 생각 안 했어.”

스카이라는 까칠하게 대화를 끊어 버리며 오찬장으로 향했다.

렉시우스도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스카이라는 부정했지만, 그는 실제로 애리얼을 황자비로 만들 속셈이 있었다. 렉시우스 역시 그가 진심이라는 걸 일찌감치 눈치챘었다. 실상 그 빌미를 준 것도 그였으니까.

백작저에서 서로 마주한 날 밤. 렉시우스는 친히 스카이라가 있는 응접실을 찾아가 손수 방법을 알려 줬다. 뺏기지 않으려면 제대로 낙인을 찍으라고 스카이라를 부추겼다.

“황자비 후보 따위가 아니라 진짜 황자비로 만들면 될 거 아냐.”

“일방적으로 공표해도 한낱 백작가 여식이 거부할 권리는 없어. 오히려 영광이라고 황송해해야 할 입장이지.”

“아니면 백작하고만 말을 주고받아. 그쪽에서는 절대 거부할 일 없을 테니까, 정략혼이라도 하면 그만이잖아.”

온갖 소리를 그는 밤새 줄줄 잘만 뱉었다.

그런데 스카이라는 그가 친절하게 방법을 알려 줘도 좋아하긴커녕 밤새 고뇌만 했었다. 결국 이렇게 방향을 굳힐 거면서 말이다.

‘황자비 애리얼이라…….’

상상했더니 렉시우스는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

비록 황자가 자리를 비워 애리얼 혼자 남았지만, 시녀는 극진하게 점심을 대접했다.

작은 원목 테이블에는 랍스터와 꽃 채소를 곁들인 여섯 가지 코스 요리가 올라왔다. 저녁 만찬에 올라와도 손색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무게감 있는 메뉴였다.

애리얼은 과할 정도의 점심 식사를 마치고 식곤증에 졸다가 오후 수업에 들어갔다.

차를 타고 일찌감치 아카데미 10관 제5 교육실에 도착한 그녀는 빠르게 구석 자리를 선점했다. 오전처럼 앉을 곳이 없어 고생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마공학 수업이 있는 강의실은 마력학 수업이 이루어지던 강의실보다는 규모가 작았다. 하지만 재수강 인원이 많아 상당히 붐볐다. 이전 성적을 무효화하기 위해 재수강 확인 서류를 든 학생들이 반이 넘었다.

‘재수강 인원이 많다는 건, 그만큼 어렵다는 거겠지?’

애리얼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아마 이 예감은 높은 확률로 적중할 것이다. 그녀는 점점 불어나는 학생들을 슬그머니 확인하며 문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때마침 복작거리던 강의실 입구의 인파가 조용하게 흩어졌다. 고위 계급의 누군가가 들어온 것 같았다.

애리얼은 아카데미에 다니는 최상위 계급의 얼굴은 죄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방문자에 약간 호기심이 일었다.

‘이번엔 누구려나?’

아마도 렉시우스일 것 같다고 애리얼이 생각한 순간이었다. 문간에는 렉시우스 대신 그녀가 오전에 마주했던 인물이 나타났다.

스카이라. 그가 오전보다 확연하게 굳은 표정을 하고 강의실로 들어왔다.

‘또 만나네. 우연인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던 애리얼은 갑자기 잊고 있던 일이 떠올라 몸을 굳혔다. 그녀는 어제 그에게 자신의 시간표를 전부 알려 줬었다.

‘설마 내 시간표 그대로 따라온 건 아니겠지…….’

애리얼은 왠지 강의마다 스카이라의 얼굴을 보게 될 것 같다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오한을 느끼며 어깨를 움츠렸다.

불길한 예감에 박차를 가하는 그의 발소리가 그녀의 자리로 다가왔다.

“옆에 자리 없지.”

오전에 교수 다음으로 많이 들은 스카이라의 목소리가 넌지시 합석을 요구했다.

애리얼은 공석인 제 옆이 원망스러워졌다. 하지만 사실 옆에 누군가 앉았더라도 그와의 합석을 거부할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누구든 그에게 비켜 줬을 테니까.

“응. 앉아.”

애리얼은 개미가 기어가는 수준으로 조용하게 말했다. 존댓말을 하면 스카이라가 또 인상을 찌푸리고 불쾌한 티를 낼 테니까. 주변의 관심을 피하려면 그녀는 반말로 최대한 작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스카이라는 불쾌한 티를 내진 않았다.

“식사는 잘했고?”

“응. 준비해 줘서 정말 고마워. 엄청난 성찬이었어.”

“근데 제대로 못 먹고 왔어? 목소리가 왜 이렇게 기어들어 가.”

“아냐, 잘 먹고 왔어. ……너는 점심 먹고 왔어?”

“좀 크게 말해.”

“미안해. 그런데 그러면 눈치가 보여서. 아무래도 황족에게 말을 놓는 건 너무 무례한 행동이니까.”

“무슨 그런 생각을 다 해. 내가 허락한 건데. 관심 두지 말라고 명할 테니까…….”

황족다운 스카이라의 고압적인 해법에 애리얼은 가슴이 철렁였다. 애리얼이 그의 소매를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그러지 마.”

“…….”

명령을 내리려고 반쯤 들렸던 스카이라의 팔이 내려갔다.

그제야 애리얼은 겨우 안도감이 들었다. 스카이라의 소매에 매달려 있던 제 손가락을 스르르 풀었다. 그렇게 막 손을 거두려고 하는데 스카이라의 손이 그녀를 붙들었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깜짝 놀란 애리얼의 몸이 움찔 튀었다.

애리얼은 스카이라에게 붙들린 제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뭔가에 단단히 홀려 정신이 빠진 듯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변명도 해명도 없는 스카이라는 고집스럽게 애리얼의 손만 꽉 붙잡았다. 그녀를 제 안에 욱여넣으려는 듯이 손등을 단단히 감싸고 힘을 줬다.

갑자기 왜 이럴까.

“……스카이라?”

애리얼이 부르자, 그가 흠칫 놀랐다. 그 떨림이 손을 타고 그녀에게로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왜 그래? 괜찮아?”

걱정스럽게 물었더니 올가미처럼 조이던 스카이라의 손이 순순히 풀려 떨어졌다. 쥐고 있던 걸 그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듯했다.

“괜찮은 거 맞지?”

애리얼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자 스카이라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를 외면한 그의 옆얼굴, 뺨이며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방금 건…… 잊어.”

스카이라가 부탁 같은 명령을 했고, 그 순간에 교수가 나타났다.

마공학 수업은 따라가기 버거웠던 마력학의 두 배는 더 어려웠다. 내용이 모조리 기본을 철저히 갖춘 상태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심화 응용이었기 때문이다.

한 시간 남짓한 단축 수업에 진도라고 나간 건 마력학의 반의반도 안 되는 양이었으나, 애리얼은 훨씬 더 지쳤다. 어려울 거라는 걸 미리 알고 각오했어도 힘들다.

‘성실하게 복습하고 예습하면…… 진도를 따라갈 수준까진 될 수 있겠지……. 아마도.’

오늘부터 애리얼은 최근 일주일보다 더 쉴 틈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스카이라한테 마력학부터 바로 봐 달라 할까? 본인이 물어보라고도 했고.’

애리얼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저기, 스카이라. 아까 마력학 수업에서 궁금한 게…….”

학생들이 빠져나가 텅 빈 강의실에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

“스카이라?”

“……어? 뭐라고?”

딱히 작게 말하지도 않았는데 스카이라는 반응이 느렸다. 한참 딴생각에 빠져 있다 깨어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잘…… 못 들었어.”

“아, 별거 아니었어. 신경 안 써도 돼. 그보다 너, 아까부터 계속 멍한 것 같던데.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얼버무리는 와중에도 스카이라의 눈동자는 세차게 떨렸다. 거짓말이라고 광고라도 하는 양.

애리얼은 그만, 하려던 말을 접었다. 동요를 드러낼 만큼 사정이 있는 것이 빤해 보이는 그에게 자신의 공부를 봐 달라고 할 수 없었다. 당장은 그런 부탁을 하는 게 그에게 실례 같았다.

‘다른 대화라도 할까? 아니면 그냥 인사만 하고 자리를 떠날까…….’

애리얼이 짧은 고민으로 머뭇거리는 틈에 보좌관이 그를 찾아왔다.

“저하, 다음 일정까지 십 분도 안 남았습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알았어.”

스카이라가 먼저 의자에서 일어났다.

“먼저 갈게.”

그는 애리얼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서 강의실을 떠났다.

“응……. 잘 가.”

애리얼은 떠나는 스카이라에게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가 들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스카이라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애리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의실을 나간 마지막 사람이었다.

애리얼의 다음 행선지는 자연스럽게 도서관이 되었다.

용을 쓰며 마력학과 마공학을 복습해 보려 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고학년이나 배우는 심화 과목을 그녀가 이해하기 위해선 선생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장은 렉시우스도 스카이라도 없다. 애리얼이 휴대폰으로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오늘 공략 대상들은 모두 황성에 있었다.

애리얼은 별일 아니겠지 치부하려다가도 공략 대상이 한곳에 모여 있는 걸 보면 궁금해졌다. 여태 관찰한 바에 의하면 저 넷이 모이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나마 있었다면 입학식 날 천막 아래서의 점심 식사 정도였다.

“오늘은 입학식도 개학 날도 아닌데, 귀족 회의라도 있나?”

애리얼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때도 스카이라는 바쁘게 황성으로 돌아갔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애리얼만 빼고 공략 대상들은 모두 바빴다. 그리고 전부 황성에 모였다.

그 사실을 인지할수록 견고한 신분의 벽이 느껴졌다. 높다랗게 쌓인 최상위 특권층의 견고한 울타리가…….

‘이렇게 보니 나하고는 정말 까마득하게 먼 사람들이다.’

아카데미에 온 이후로 애리얼은 매번 체감했다.

실제로 그녀는 그들에게 범접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운 좋게 황자인 스카이라의 위세를 업고 높다란 자리에 앉은 이들과 가까워지긴 했지만, 내밀하게 간섭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격차는 컸으니까.

“그런데 왜…….”

애리얼은 마력학 수업 직후 말도 없이 황성으로 직진하려 했던 스카이라를 떠올렸다. 그는 오늘 그녀를 저 견고한 권력의 울타리 안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왜일까, 그녀의 의심은 구체화되지 못하고 말끝에서 자꾸만 흩어졌다.

“이유를 모르겠어.”

다만 심상치 않다는 건 알겠다.

신분 차는 공략에 있어서도 큰 장벽이기에 어떻게든 좁힐 방법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스카이라에게 종속되다시피 접근하는 건 안 됐다. 그랬다간 그의 개인 루트를 타게 될 가능성이 너무 컸다.

스카이라의 후광을 받는 건 아카데미까지로 충분했다.

“이 이상은 안 돼.”

편입생이라는 신분으로 공략 대상들과 지속해서 마주할 지위를 얻었으니 충분했다. 적어도 아카데미에서는 그들에게 간섭할 수 있고, 비등한 대우를 받고 있으니까. 환경은 얼추 갖춰진 셈이었다. 그러니 공략은 아카데미에서 끝내야 했다.

그리고 그에 맞는 적절한 공략은,

“친구…….”

애리얼이 무의식중에 말했다.

아카데미는 표면적으로나마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고 있었다. 신분 차가 크더라도 학우로서 접근한다면 아카데미도 적당히 눈감아 줄 것이다.

‘우정으로는 하트 몇 개까지 가능할까?’

애리얼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친구로서 하트 세 개를 채울 수 있다면 개인 루트를 탈 고민은 안 해도 됐다. 친구를 여러 명 두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었으니 동시에 여럿을 공략해도 그나마 마찰이 적을 것이었다.

“학우 혹은 친우, 친구…….”

애리얼이 신분 차를 타파할 공략 중 그나마 가장 나은 선택지를 중얼거렸다. 확신은 없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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