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화요일
오전 9시 - 마력전(아카데미 12관, 제1 교육실)」
강의에 들어가기 시작한 둘째 날, 애리얼이 들어야 할 수업은 무려 실습이었다.
애리얼은 다른 수업에 비해 훨씬 얇은 강의 서적을 들고 이른 시각에 기숙사를 나섰다.
아카데미 12관은 강의실이 모여 있는 교사 동의 정반대 쪽에 있었다. 교사 건물은 11관과 12관밖에 없지만 그 앞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실습장이 있어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장소였다.
애리얼은 12관의 앞에서 잠시 실습장을 구경했다. 거대한 철문을 두고 원형으로 높게 벽을 세운 실습장은 흡사 폭발 실험이라도 벌어지는 곳 같았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실습을 하길래.”
막연하게 생각하며 중얼거리자 누군가 애리얼의 머리 위로 손을 턱 얹었다. 묵직한 감각에 그녀는 고개를 젖혀 위를 보았다.
햇빛을 받아 진한 장미색을 발하는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렉스 선배.”
애리얼이 친근하게 불렀더니 그의 금색 눈이 해죽 휘어졌다.
“실습장 보니까 겁나?”
“뭐…… 조금은?”
“겁낼 필요 없다고는 못 하겠네.”
“다칠 수도 있는 거야?”
“걱정 마. 죽지는 않으니까.”
렉시우스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말을 던지며 애리얼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헝클었다.
“그보다 선배, 마력전 들어?”
“아니. 다른 거 들어.”
“아, 그렇구나.”
“마력전 들으면 이렇게 일찍 안 오지.”
한창 대화를 주고받던 렉시우스는 갑자기 갈 길이 바쁘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다음에 보자.”
일방적인 작별이었다.
애리얼은 갑자기 나타난 만큼이나 갑자기 사라지는 렉시우스를 말없이 보다가 발길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강의 시작까지는 아직 한 시간 넘게 남았다.
‘할 건 딱히 없고. 강의실에 가 있는 게 낫나?’
오늘 강의도 어제처럼 북적거릴 확률이 높았다. 미리 자리를 잡아 두면 편한 것은 당연지사.
생각은 그런데 애리얼의 몸은 실습장의 철문으로 다가섰다. 괴물을 가두는 우리처럼 높고 단단한 문. 이 안쪽으로 들어가 벌일 실습이란 대체 뭘까.
“걱정 마. 죽지는 않으니까.”
렉시우스의 말을 떠올리니 애리얼은 오금이 저렸다.
‘죽지는 않는다……. 죽기 직전까지 다칠 수는 있다는 소린가?’
그렇게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높다란 철문을 올려다본 애리얼의 얼굴에 막막함이 서렸다. 그가 한 말이 장난이길 바랐다.
애리얼은 터덜거리며 걸어 마력전 수업이 있는 12관 제1 교육실에 도착했다.
강의실의 크기가 상당한지 문이 세 개나 됐다. 애리얼은 복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아치형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일찍 왔네.”
강의실 중앙을 가로지르며 들려온 음성이 그녀가 혼자가 아님을 알려 왔다.
정확히 중간쯤에 자리 잡은 스카이라가 애리얼을 슬그머니 돌아본 채 앉아 있었다.
‘오늘도 시간표가 겹친다고?’
애리얼은 놀란 나머지 교육실로 들어가기를 잠시 망설였다.
마력학을 들으니 마력전도 같이 들을 순 있다. 이해를 못 할 건 아니다. 그런데도 납득은 어려웠다. 그가 일부러 이 강의를 고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만 강해졌다.
애리얼의 표정에서 의구심이 미세하게 새어 나왔으나 스카이라는 변명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의심에 확신을 주듯이 굴었다.
“이리 와, 앉아.”
스카이라는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는 정중앙 자리에 굳이 자리를 잡고 손짓을 했다.
애리얼은 내키지 않았으나 그의 옆자리에 다가가 앉았다. 하지만 걱정은 계속 들었다. 여기서 황자와 반말로 대화하면 아카데미 학생들이 그녀를 뭐라 여기겠는가.
“구석 자리로 옮기면 안 될까?”
“여기가 제일 잘 보이는데, 뭐 하러.”
“그만큼 너무 눈에 띄잖아. 시선 몰리는 게 부담스러워.”
“일일이 신경 쓰지 말고 무시해.”
“그게 잘 안돼. 그냥 난 따로 앉을게.”
“하……. 알았어. 벽 자리로 옮기면 되는 거지?”
스카이라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먼저 자리를 이동했다. 그는 강의실의 제일 뒤쪽 가장자리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가 벽면 쪽으로 의자 하나를 남기고 그 옆자리에 앉았다. 애리얼은 그의 뒤를 따라가 그가 남겨 놓은 의자에 앉아야만 했다.
어쩌다 보니 애리얼은 그와 벽 사이에 끼어 앉게 되었다. 묘한 압박감이 드는 자리였다.
‘그래도 아까 자리보다는 훨씬 낫긴 하지만.’
애리얼은 슬그머니 제 옆을 막듯이 지키는 스카이라에게 고개를 향했다. 그가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만족해?”
“응.”
“너라도 만족하니 다행이네.”
스카이라가 입꼬리를 미묘하게 비틀었다. 올라갈 듯 말 듯 애매하게 접히던 입술이 금세 굳어지더니 딱딱한 표정만 만들어 냈다. 애리얼이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얼굴을 휙 돌려 버렸다. 또 그의 뺨에 홍조가 들어 있었다.
그제야 애리얼은 스카이라가 제게 웃어 주려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불과 일 주 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내가 웃는 거, 보고 싶어?”
“알았어. 웃는 정도는…… 해 줄게.”
‘맞아. 그런 얘기도 했었지.’
이제는 스카이라가 별 부탁을 다 들어주네, 싶었다.
미소 짓는 데에 처참하게 실패한 그는 화난 것처럼 눈을 맞춰 주지 않고 있었다.
애리얼은 그가 고마우면서도 조금 난감했다.
“억지로 웃으려고 안 해도 돼.”
“……그, 그런 거 아니라고!”
스카이라가 버럭거리며 부정했다. 고성이 조용한 강의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가 황급히 입을 가렸지만 이미 말이 튀어 나간 후였다.
이럴 줄 알고 각오한 애리얼은 침착했다.
오히려 스카이라가 자신의 언행에 스스로 놀란 듯 보였다. 그는 제 입을 막은 채 떨리는 눈빛으로 애리얼을 살피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억지로 하는 거 아니야…….”
스카이라는 의외인 쪽을 부정했다. 그는 웃으려 했다는 것 자체는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강제가 아닌 자의에 의한 행동이었음을 넌지시 알려 왔다. 걱정스러울 만큼 얼굴을 붉히고서, 서투르게.
애리얼이 모른 체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적나라함에 덩달아 애리얼의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그…… 그렇구나. 미안.”
애리얼이 더듬거리며 섣불렀던 제 판단에 대해 사과했다. 그와 시선이 비스듬하게 어긋났다. 대화는 멈춰 버렸다.
조용하던 강의실이 학생들로 가득해지고 교수가 나타날 때까지 둘은 말이 없었다.
내내 어색함으로 숨이 막히던 애리얼은 교수의 등장이 구원처럼 느껴졌다.
마력전은 실습수업이지만, 당장 실습을 하진 않았다. 입학 시기의 다른 수업과 마찬가지로 약식 강의만 이루어졌다. 제대로 된 실습은 시간표가 확정된 한 달 이후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기초가 부족한 애리얼에게 실습은 늦으면 늦을수록 좋은 거였다.
“어느 정도 아시겠지만, 마력전은 시간표가 확정되기 전까지 따로 진도를 나가지 않을 겁니다. 실습도 마찬가지고요.”
교수는 전달 사항만 간단히 말했다.
“따라서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입니다. 앞으로 한 달간 잘 부탁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강의는 금세 끝났다. 수업의 의의를 설명하거나 가벼운 예습이라도 하며 한 시간은 소모한 이전 수업들과는 달랐다.
학생들은 몇 분 만에 끝난 강의를 반겼다. 일찍 끝난 수업으로 생긴 자투리 시간을 쉬며 보낼 생각에 들떴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강의실을 채웠다.
애리얼은 소란스러운 틈을 타 강의실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황자의 옆자리인 자신에게로 향하는 학생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다. 그걸 피하려면 다들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지금이 그녀에겐 기회였다.
애리얼은 책을 챙기고 급히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의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 걸렸나?’
애리얼은 책상 아래를 보다가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의자 팔걸이 옆으로 툭 삐져나온 흰 소매가 눈에 들어왔다. 스카이라의 소매였다. 그의 팔이 등받이 뒤쪽을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스카이라는 정확히 애리얼이 앉은 의자를 둘러막고 벽에다 손을 대고 있는 상태였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벽을 짚은 그의 흰 손등에 퍼렇게 핏줄이 섰다.
‘얘가 왜 이래?’
당황한 애리얼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 스카이라를 응시했다. 시선을 느꼈을 게 분명한 그의 옆얼굴은 고집스럽게 정면만 향했다.
“나갈 수가 없어서 그러는데, 팔 좀 풀어 줘.”
“…….”
“스카이라?”
불러도 스카이라는 들은 체 만 체 했다. 포위망처럼 두른 그의 팔도 풀릴 기미가 없었다.
애리얼은 섣불리 벽면 쪽으로 자리를 바꾼 게 후회스러워졌다. 나가 보려고 그녀가 몇 번 용을 써 보았지만, 스카이라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애리얼은 자포자기하여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리를 이루던 학생들이 하나둘 빠져나갔다. 그들의 시선은 이따금 애리얼과 스카이라를 훑었다. 황자가 백작 공녀를 인질로 잡은 것 같은 이 진귀한 광경을 몰래 구경하는 눈치였다.
“쳐다보지 말고 조용히 나가.”
묵묵히 침묵하던 스카이라가 초대하지 않은 관람객들에게 싸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잠깐의 호기심에 시선을 두었던 학생들은 황자의 명령에 도망치듯 문으로 향했다.
수업이 파한 강의실이 전부 빌 때까지, 스카이라는 자세를 유지했다. 계속 침묵하면서.
고요해진 공간에서 기다리다 못한 애리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중앙관에 갈래?”
조금도 예상치 못한 권유에 애리얼은 대답이 한참 늦었다.
“……뭐?”
“초대하는 거야.”
“중앙관이면……, 황성?”
스카이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갑자기 황성이라니. 불길함을 느낀 애리얼이 이유를 캐물었다.
“무슨 일인데?”
“일이 꼭 있어야 해?”
“당연히…… 연유도 없이 그냥 갈 순 없으니까.”
“왜? 일 없어도 갈 수 있잖아.”
“아니, 일이 있어야 가지. 내 집도 아니고 황성인데…….”
“혹시 알아? 네 집이 될지.”
이게 무슨 소린가. 여러 갈래로 해석될 의미심장한 소리에 애리얼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저번부터 이 황자란 인간이 왜 자꾸 자신을 황성의 성벽 안으로 끌어 들이려는지, 그 답을 설핏 들은 것 같았다.
스카이라는 그녀에게 긴밀한 관계가 되기를 넌지시 제안하고 있었다. 어쩌면 약혼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가 백작저에서는 끝내 말하지 않았던 내용의 실체였다.
‘무슨 용건이길래 말을 아끼나 했더니, 이런 거였구나.’
애리얼이 추측한 것 이상이었다. 그녀는 착잡해짐과 동시에 초조해졌다.
물론 약혼 제안은 정치혼 같은 형태를 띠기는 할 거였다. 제국의 황자씩이나 되는 그가 순진하게 고백할 리 만무하니까.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저의는 정치적인 것이 아닐 게 분명했다.
백작가 영지가 쓸 만하긴 하지만, 그래 봐야 땅일 뿐. 권력 다툼에 하등 쓸모가 없는 자원이었다. 백작이 통 크게 그 땅을 황가에 내놓는다 쳐도 고작 백작가 외동딸을 황자비 삼을 이유가 없다는 소리였다. 스카이라의 정치혼 대상으로는 훨씬 좋은 후보들이 많았다. 왕국의 왕녀나 명망 있는 후작가의 여식 등, 황자인 그가 고를 수 있는 좋은 상대는 깔려 있다.
그런데 스카이라가 굳이 애리얼에게 정치혼을 말한다면, 그 이유가 사심이 아니고 뭐겠는가.
‘이 정도인데 고작 하트 두 개라고?’
애리얼은 솔직히 겁이 날 정도였다. 이대로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의 개인 루트는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면 공략은 끝이었다.
황자의 약혼녀 명칭을 달고 누굴 어떻게 공략하겠는가. 타 공략 대상과는 아예 만나지도 못하게 될 게 뻔했다.
애리얼은 뒤늦게 피가 쑥 빠지는 느낌을 맛봤다.
“이유가 없다면 갈 수 없어.”
애리얼이 긴 침묵 끝에 칼같은 거절을 말하자 스카이라가 인상을 썼다. 차가운 눈길을 하고서 위협처럼 구긴 그의 얼굴은 꽤 무서웠지만, 애리얼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도 애리얼에겐 아직 그의 호감도가 더 필요했다. 그를 완전히 밀어낼 수도 없다는 소리다. 호감도가 고착될 수 있는 친구로 선을 긋는 것도 당연히 안 됐다.
‘무슨 게임이 이래!’
속으로 크게 탄식한 애리얼은 필사적으로 눈치 없는 척을 했다. 그저 황성이 부담스러운 척, 그가 던진 제안의 밑밥을 못 알아챈 척.
“난 백작가의 공녀니까……. 내 신분으론 황성에 이유도 없이 발을 들여선 안 되는걸. 내가 아무리 집 안에서만 지냈다지만, 그 정도 법도는 알아. 말은 정말 고맙지만…….”
“내가 상관없다잖아. 왜 이렇게 사족이 길어.”
“그래도 황성을 내 집처럼 여기는 건 너무 무례하잖아. 아무리 너랑 반말하고 지내는 사이라지만 결국 사적인 거고, 황성은 공적인 장소니까.”
“그래서, 공적인 이유로만 가겠다는 거야?”
“응. 나에게 황성은 공적인 곳이니까, 공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가지 않을래.”
“…….”
“그게 법도니까…….”
애리얼은 꾸역꾸역 거절을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자꾸만 떨려 와서, 마지막에는 조금 안쓰러울 수준이었다.
결국은 스카이라가 포기한 듯 표정을 폈다. 그는 억지로 성질을 누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냥 점심이나 같이 먹자는 거야.”
“…….”
“이것도 싫어?”
아까까지와 다르게 스카이라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그의 한풀 꺾인 시무룩한 눈빛에 애리얼은 주춤했다.
그런 와중에 스카이라의 팔은 아직도 애리얼의 의자를 막고 있었다. 나갈 곳 없이 갇힌 애리얼은 그에게 대답을 강요당하는 형국이었다.
“혹시…… 황제 폐하도 계시는 자리야?”
“없어. 이제 됐지?”
애리얼의 마지막 질문에 스카이라가 가볍게 답했다. 그녀가 거부할 구석을 틀어막는 언행이었다.
그녀는 고민했다. 점심 식사라는 여전히 사적인 이유이긴 해도 그나마 부담감은 덜한 자리였다.
“그런 거라면, 괜찮…….”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애리얼이 마지못해 입술을 떼는데, 열린 문으로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난입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