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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43화 (43/264)

43화

다른 강의를 듣는다던 렉시우스가 웬일인지 마력전 강의실에 와 있었다. 듣던 강의가 늦게 끝나 공교롭게 시간이 맞은 건지, 아니면 마력전 강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건지. 애리얼은 갑자기 등장한 그를 신기하게 보았다.

스카이라는 두통이 인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었다.

그야 그러든 말든 렉시우스는 강의실의 계단을 걸어 내려와 둘이 있는 책상 앞에 섰다. 그의 눈이 의자 등받이를 막고 있는 스카이라의 팔을 넌지시 가리켰다.

“이젠 아예 협박으로 밀고 가려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없진 않지.”

렉시우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더니 그는 제 앞에 놓인 책상 모서리를 오른손으로 쥐었다. 그러고는 모서리를 뜯어내듯 당겼다.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마호가니 책상에서 드드득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수십 킬로 무게의 가구가 그의 손 아래 손쉽게 뜯겨 나갔다.

눈앞에서 벌어진 그 괴력의 참상에 애리얼의 입술이 놀라 벌어졌다. 막혀 있던 앞부분이 트여 책상 아래 갇혀 있던 다리가 자유로워졌다. 그녀의 앞으로 나갈 길이 훤히 트였다.

의자 뒤를 막는 행동에 효용성이 없어졌음을 느낀 스카이라가 팔을 거뒀다.

“무식하게 뭐 하는 짓이야.”

“뭐 하긴.”

태연히 굴던 렉시우스가 갑자기 가만히 앉아 있던 애리얼의 팔을 잡아챘다. 무방비하던 그녀는 강제로 일으켜져선 그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이게 뭐…… 읍!”

렉시우스가 항의하려던 애리얼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가 뭘 하려는지 알아챈 스카이라가 급히 일어나 애리얼에게로 손을 뻗었으나, 닿지 않았다.

“늦었어, 멍청아.”

렉시우스가 비웃었다. 스카이라의 팔은 허무하게도 허공을 갈랐다.

주변을 감싸던 환경이 삽시에 뒤바뀌었다. 고풍스럽던 강의실은 온데간데없고, 익히 보던 도서관의 정문이 나타났다.

애리얼은 변하는 풍경을 곁눈질로 보고서 흠칫 놀랐다. 주변의 격변은 누가 봐도 렉시우스의 소행이었다.

‘뭐 하려는 거지?’

두려움이 인 애리얼은 제 얼굴에 밀착한 렉시우스의 가슴팍을 세게 밀어냈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렉스 선배. 이게 뭐 하는…….”

“잠깐만, 애리얼. 지금 너 도와주고 있잖아.”

렉시우스가 타이르는 어투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도와주다니, 왜?’

자연스레 생기는 의문에 애리얼은 제 몸을 옭아맨 팔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렉시우스는 다른 곳을 응시한 채 웃고 있었다.

“따라왔네?”

렉시우스가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잔디 밟는 소리만 났다.

분명 스카이라일 거였다. 그의 등장에 애리얼은 렉시우스의 의도가 대충 읽혔다.

‘내가 스카이라의 질문을 곤란해하니까…… 도망치게 해 주겠다는 건가? 질문에 답할 필요 없게?’

그렇다고 굳이 이런 순간 이동 추격전을 벌여야 하나 싶었다. 이런 행동은 오히려 스카이라를 자극할 뿐이었다.

‘차라리 대화로 푸는 게 나을 텐데.’

애리얼은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렉시우스가 그것마저 막았다. 묵직한 손이 뒤통수를 꾹 누르는 바람에 애리얼은 셔츠 바람인 그의 가슴팍에다 강제로 얼굴을 묻어야 했다. 부드러운 옷감, 그 사이로 드러난 그의 쇄골과 가슴에서 비누 향이 물씬 났다. 얇은 셔츠 너머의 체온까지도 맞닿은 피부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나치게 가까웠다.

애리얼은 렉시우스와 맞닿은 게 처음이 아닌데도 갑작스레 의식되었다. 이제까지는 몹시 지쳐서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순간에만 닿았었으니까. 말똥한 정신에 이 정도 거리는 당연히 부담스러웠다. 애리얼은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었다.

“가만히 있어.”

잠깐 손을 꼼지락댔을 뿐인데, 렉시우스가 애리얼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명령했다. 그의 팔심이 아까보다 더 억세졌다. 애리얼의 뺨이 눌려 그의 가슴팍과 마찰했다. 애리얼은 옷 밑으로 느껴지는 그의 살결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어차피 못 움직이는데…….”

애리얼이 볼멘소리를 중얼거렸으나 렉시우스는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녀를 안은 채 뒷걸음질을 치며 스카이라와 거리를 벌렸다.

“걔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

스카이라의 억눌린 음성이 분노를 드러냈다.

렉시우스는 코웃음 치며 응수했다. 물러설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대로 가면 자신이 더 유리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너 이제 한 번밖에 안 남았지.”

사정을 훤히 꿰뚫는 도발에 스카이라가 안면을 굳혔다. 렉시우스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걸렸다.

“난 아직 세 번 더 남았거든.”

비웃으며 던진 렉시우스의 말이 끝맺어짐과 동시에 다시금 애리얼의 시야가 전환되었다.

도서관이 사라지고, 물 냄새가 물씬 풍겼다.

애리얼은 힘겹게 고개를 틀어 주변을 확인했다.

수양버들 대신 물푸레나무가 늘어진 아래 잔잔한 호수가 은반처럼 빛을 반사했다. 잔디밭을 가로지른 저 멀리에는 처음 보는 커다란 건물이 한 채 있었다.

‘여긴 또 어디래?’

익숙한가 싶었더니 생소한 또 다른 호숫가의 풍경이다. 세 번 왔는데 올 때마다 보이는 게 다른 걸 보면 호수가 보통 넓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선…….”

“아직이니까, 조용히 하고 있어.”

렉시우스가 끈질기게 따라온 추적자를 주시하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여전한 명령조에 애리얼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멈췄다.

“그대로 가만히.”

“……꼭 이래야 해?”

“떨어지면 이동이 안 되거든. 혼자 남아서 황성에 끌려가고 싶으면 떨어지든가.”

렉시우스가 애리얼의 사정을 빤히 꿰고 말했다. 도리가 없어진 애리얼은 그에게 가만히 안겼다. 그러자 그의 팔심이 그녀의 허리를 으스러뜨릴 듯 억세졌다. 마치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꽉 쥐듯이.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스카이라는 자기 걸 빼앗긴 사람처럼 사납게 소리를 질렀다. 높은 풀을 헤치고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인기척에 다급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손 떼.”

스카이라가 굳은 얼굴로 으르렁대며 둘과의 거리를 좁혔다.

심상치 않게 위협하는데도 렉시우스는 개의치 않았다.

“이거, 완전히 스토커잖아.”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스카이라의 면상에다 대고 신랄한 평가를 내렸다.

“눈깔이 맛이 갔어.”

키득거리며 조롱과 같은 소리로 종지부를 찍었다. 렉시우스의 평은 정확했다.

스카이라의 눈에는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빼앗겼을 때와 비슷한 허기와 광기가 어려 있었다. 애리얼이 봤다면 기겁하며 도망치고 말았을 서슬 퍼런 안광이 렉시우스를 향해 빛났다.

“놓으라고 했어.”

마지막 경고처럼 스카이라의 목소리는 아직 차분했다. 그의 인내가 닿는 마지막 경계 같았다.

렉시우스는 아슬아슬 선에 걸쳐진 스카이라를 보며,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그나마 스카이라가 얕은 이성을 유지하는 건 상대가 데본시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찰나의 절제가 움직임에 망설임을 만들었다. 과감하게 달려들어 남의 멱살을 잡아 흔들 만큼, 스카이라는 렉시우스를 증오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카이라는 아직은 말로만 경고했다. 그 절제가 렉시우스에겐 기회가 되었다.

렉시우스는 웃음을 흘리며 재차 애리얼을 붙들고 이동했다. 둘의 모습이 삽시에 증발되었다.

스카이라는 눈앞에서 또다시 애리얼을 놓쳤다. 빈 곳을 마주하고 허망해진 푸른 눈에서 이성이 또 한 번 깎여 나갔다.

애리얼의 시야에 비친 풍경이 다시금 순식간에 바뀌었다.

이걸로 세 번째.

물푸레나무 잎사귀가 흔들리던 호숫가는 어느새 분꽃나무가 만발한 잔디 정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근처의 하얀 분수대에서 물보라가 일었다.

애리얼에게도 익숙한 기숙사의 전경이었다. 그녀는 렉시우스의 품에서 힘겹게 고개를 돌리며 주변을 확인하고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곧장 따라오던 스카이라가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부재에 애리얼은 불현듯 렉시우스의 도발을 떠올렸다.

“너 이제 한 번밖에 안 남았지.”

그리고 본인은 세 번 남았다고 했던가. 한 번이라는 건, 아마도 스카이라의 이동 횟수를 말하는 걸 터였다. 아까 따라온 것으로 스카이라는 한 번 남았다는 이동 횟수를 전부 소모한 셈이었다.

스카이라는 여기까지 따라오지 못한다. 차를 타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거리가 꽤 될 테니 시간이 걸릴 거였다.

‘이제 순간 이동 할 필요 없겠지?’

갑작스러운 환경의 격변에 지친 애리얼은 렉시우스의 품에서 얼른 빠져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팔을 비틀고 움직이는 애리얼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가 꽉 붙잡아 당겼다.

“징그럽네.”

분수대 너머를 본 렉시우스가 대단하다는 듯 말했다.

투명하게 흘러내리는 매끈한 분수의 물줄기에 환한 금빛 머리칼이 비쳤다.

분명 횟수는 끝일 텐데. 신기하게도 하얀 분수대 뒤에서 스카이라가 걸어 나왔다. 창백한 피부 위로 새파란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그는 렉시우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걸어오다 힘에 부치는지 잠시 멈췄다.

“렉시우스!”

스카이라는 으드득 이를 갈며 욕을 짓씹었다. 횟수 제한을 넘어서 이동한 탓에 그의 안색은 별로 좋지 못했다.

반면 렉시우스는 여전히 여유가 철철 넘쳤다.

“몸에 맞지도 않는 거 쓰다가 탈 난다.”

휘청거리는 스카이라에게 걱정까지 한마디 해 주며 조롱하고는, 애리얼을 안은 채로 한 번 더 이동할 준비를 했다. 스카이라가 쫓아왔어도 그는 여유로웠다. 아직 한 번 더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알기에, 스카이라는 렉시우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억지로 달렸다. 팔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곳에 애리얼이 있었다.

하지만, 스카이라를 놀리듯 가증스럽게 웃는 남자의 손 아래 인형처럼 붙들린 애리얼이 그의 코앞에서 투명해졌다. 그녀를 줄곧 응시하며 쫓아가던 파란 눈동자가 삽시에 확장되었다.

“애리얼……!”

황급히 손을 뻗었건만, 스카이라는 또다시 허공을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빈 곳으로 팔을 휘두른 그가 욕을 짓씹으며 고꾸라졌다.

팔도 다리도 후들거렸다. 그는 자신과 상극인 마법을 억지로 남발한 탓에 마력이 잔뜩 소진된 상태였다.

스카이라는 따라 주지 않는 제 신체에 무력감과 분노를 느끼며 마른 풀밭에 엎어져 잔디를 쥐어뜯었다.

순간 이동만 해도 안 맞는데, 더 안 맞는 개인 추적 마법까지 썼다. 그것도 일반적인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고위 마법으로 구성했다. 렉시우스 정도 되는 인간에겐 허접한 수준은 통하지 않으니까.

스카이라는 이를 악물고서 땅바닥에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게 고작이었다. 힘이 빠져서 더는 따라갈 수가 없다. 억지로 한 번 더 따라간다 쳐도 고갈된 마력으론 렉시우스를 이길 수 없었다.

스카이라는 흙 묻은 블레이저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졌다. 하얀 겉옷이 땅으로 추락했다. 구겨지고 더러워진 옷이 그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데본시아는커녕 렉시우스도 막지 못해 애리얼을 뺏겼다.

***

렉시우스가 다시 한번 이동하고, 애리얼의 주변이 재차 바뀌었다.

어딘지 모를 높다란 벽돌 건물의 사이. 그림자가 짙게 깔려 한낮임에도 어둡고 서늘했다.

강의실에서 도서관. 도서관에서 호숫가. 호숫가에서 기숙사. 기숙사에서 이곳.

첫 이동 후에 렉시우스는 자신의 이동 횟수가 세 번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니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순간 이동일 거였다.

스카이라의 이동 횟수는 그보다 훨씬 전에 바닥났을 터였다.

‘이젠 더 못 따라오겠지?’

애리얼은 약간 안심했다. 그러나 금세 낯빛이 어두워졌다. 마지막에 고함치듯 자신을 부르던 스카이라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심란한 기분이 되었다. 그 음성이 처절하게까지 들려서 죄책감마저 몰려왔다.

‘그때 얼굴이라도 볼 걸 그랬나…….’

생각하다가 애리얼은 뒤늦게 소스라쳤다. 스카이라가 자신에게 뭘 강요하려 했는지 다시금 떠올랐기 때문이다.

‘황자비는 안 돼. 그 초석이 될 황성에서의 식사도 싫어.’

애리얼은 공략 탓에 확실히 할 수 없었던 제 의사를 재차 되새겼다. 그걸 피하려고 렉시우스의 돌발 행동에 가만히 따랐던 거였다.

“……선배, 이제 안 쫓아오는 거 같아.”

렉시우스의 품에 여전히 갇혀 있던 애리얼이 조용히 상황을 전했다. 그러면 이제 그도 자신을 풀어 주겠거니 하며.

하지만 렉시우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를 안은 팔을 풀지도 않았다.

“저기, 선배? 이제 괜찮으니까 놔도 돼.”

“…….”

“선배?”

애리얼이 연거푸 렉시우스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팍이나 어깨를 두드리고 바르작대도 소용이 없었다.

애리얼은 이 상태가 몹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애리얼은 제게 감겨 있는 렉시우스의 손을 뿌리치려고 있는 힘껏 바동거렸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렉시우스는 여유 있는 얼굴로 그녀를 쉽게 제압했다.

팔을 비틀고 아무리 용을 써 봐도 속수무책. 오히려 그에게 잡힌 곳이 아프기만 했다. 더 악을 쓰면 쓸데없이 다치기만 할 것 같다.

애리얼이 포기하고서 얌전해지자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벌써 그만두는 거야?”

그는 애리얼의 저항을 즐기는 듯 보였다. 흥미 가득한 그의 금빛 눈동자에 애리얼은 곧장 의욕이 죽었다. 힘 풀린 그녀의 팔이 그의 손아귀에서 축 늘어졌다.

저항을 즐기는 인간에게 저항하는 건 불에다 장작을 넣어 주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반대로 고분고분해지면 그의 쪽에서 먼저 흥미를 잃고 놓아줄 것이다. 분명 그럴 거라고 애리얼은 생각했다.

하지만 렉시우스는 애리얼을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제 손안에 가만히 놓인 그녀의 하얀 손목과 가느다란 손가락을 묘하게 지그시 바라보았다.

렉시우스의 눈빛에서 흥미가 죽지 않는 걸 발견한 애리얼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더 당황스러운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렉시우스가 제 손에 붙들린 애리얼의 손목으로 고개를 숙였다. 작게 호선을 그린 그의 입술이 손목이 접히는 관절 부근을 배회하다가 손등에 내려앉았다. 부드럽고 더운 입술의 감촉이 애리얼의 차가운 피부 위를 가볍게 눌렀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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