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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44화 (44/264)

44화

숙녀에게 교양을 갖춰 대하는 귀족적인 인사법. 사교계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호감과 친애의 표현이었다.

그렇기에, 그늘진 건물 사이에서 이루어지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어색한 상황 속에 고개 숙여 애리얼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렉시우스는 상당히 우아했다.

애리얼은 몇 초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지금 뭐 해?”

렉시우스가 천천히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귀에 걸린 은빛 이어링이 가볍게 흔들렸다.

“인사.”

“갑자기 왜?”

“비밀.”

렉시우스는 정말이지 그답지 않은 소리로 물음을 무마했다.

애리얼은 의미심장한 느낌이 들었다. 호기심에 렉시우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의 얼굴이 산뜻한 미소를 지었다.

“나 원래 이런 짓 안 하는데.”

렉시우스는 묻지도 않은 정보를 말했다.

“그래? 자연스럽던데 의외네…….”

“어렵지도 않은 동작인데, 해 본 적 없어도 잘할 수는 있지.”

“선배, 이런 거 처음 해?”

“응. 너한테 해 준 게 내 처음이야.”

“사교계에선 많이들 이렇게 인사하지 않아? 난 안 가 봐서 잘은 모르지만.”

“뭐, 많이 하지.”

“그런데도 처음 해 보는 거면, 혹시 선배도 나처럼 사교계에 간 적이 없는 거야?”

“아니, 있었어. 자주는 아니라도 몇 번.”

“…….”

“있는데, 이런 건 아무한테도 안 했어. 너한테 처음 해 주는 거야.”

렉시우스는 자꾸만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거짓으로 놀리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말 자체는 진실인 것 같아서 애리얼은 얼이 빠졌다. 무슨 대답을 원해서 저런 소리를 하는지. 감격이라도 해야 하나 싶다가, 놀리는 것처럼 비칠까 봐 적당히만 대꾸했다.

“그렇구나……. 영광이야, 선배.”

원하는 반응이 아니었던지, 렉시우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시큰둥해진 표정만 남았다.

“전혀 좋아하질 않네.”

“……그렇지 않아. 선배에게 친애의 인사를 받아서 정말로 기, 기뻐!”

“됐어.”

렉시우스는 애리얼의 기계적인 대답을 언짢아하며 그녀의 말을 잘라 냈다. 그러고는 애리얼에게 두른 팔마저 풀어냈다. 드디어 그녀를 놔준 것이다.

애리얼은 오래 붙잡혀 붉게 변한 손목을 문지르며 한 걸음 물러났다. 렉시우스는 벽면에 기댄 채 그녀의 손목에 남은 제 손자국을 바라보았다. 딱히 미안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애리얼도 렉시우스에게 사과를 기대하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다른 궁금한 게 있다.

“……왜 도와줬어?”

“도와준 줄은 아네.”

“응. 선배가 직접 말해 주기도 했고, 내가 곤란해 보이니까 도와준 거였잖아.”

“…….”

“왜 그런 거야?”

“기분 더러워서.”

그가 왜 기분이 더러웠을까. 불쌍해 보였다면 몰라도. 애리얼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무심코 물었다.

“기분이 더러웠다니, 왜?”

렉시우스는 입을 다문 채로 벽에 기댄 몸을 바로 세웠다. 그늘 밑이라 그런지 그의 눈은 동공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게 침잠해 있었다. 기이하게 예리해 보이는 눈빛이 애리얼을 꿰뚫듯 내려다보았다.

“너 이상하다.”

렉시우스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짜증 나게 굴어도 별로 화도 안 내고, 좀 특별하게 대해 줘도 아주 좋아하지는 않고. 딱히 나한테서 뭔가 얻어 내려는 것 같지도 않아.”

그의 입에서 여태껏 애리얼을 감시하듯 바라보며 알아낸 사항들이 줄줄이 나열되었다. 지금도 그의 눈은 애리얼의 초연히 가라앉은 표정을 감시하듯 주시하고 있었다.

“나랑 있는 것 자체로 즐거운 거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닌 거로 보이고.”

찬찬히 훑어 내는 렉시우스의 시선은 애리얼을 분해할 것처럼 첨예했다. 그녀의 밑바닥까지 전부 들춰 보려는 양 집요했다.

애리얼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근데, 나랑 무지하게 연관되고 싶어 하는 게 보이거든.”

렉시우스는 노골적인 관찰 끝에 꽤 정확한 분석을 내놓았다.

애리얼은 렉시우스에게 계속 애매한 태도를 보였었다. 뭘 해도 크게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든 연관되려는 모습. 줄타기하듯 적당한 거리감을 지향하면서 꾸준히 친밀해지려는 노력. 그러면서도 그의 지위나 권력을 노린 이익 추구는 없었다. 그다지 사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렉시우스가 의심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애리얼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꽤 정답에 가까운 분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구는 애리얼의 저의까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그건 그의 눈치가 아무리 좋다 해도 알 수 없는 거였다.

왜냐하면 애리얼은 그의 호감도 하트를 세 개만 채워서 유지해야 하니까. 게임 공략이라는 특이한 상황이 던지는 목표를 달성해야 하니까.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애리얼은 더한 의심을 피하려고 최대한 침착하게 굴었다.

“선배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이 얼마 안 돼서, 어떻게 사람들이랑 대화하고 지내야 자연스러운 건지 잘 분간이 안 가.”

급조한 변명이 애리얼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집 안에서만 일생을 보냈다는 평범치 않은 삶의 행적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그래서 선배랑도 친해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내 행동이 불쾌하게 느껴졌다면 사과할게.”

“…….”

애리얼의 해명을 들은 렉시우스는 말이 없었다. 표정도 읽기 어렵게 무심했다. 애리얼을 향한 시선만이 여전할 뿐.

그늘의 서늘함 탓인지 아니면 건물 사이가 좁은 탓인지, 애리얼은 길어지는 그의 침묵이 유난히도 무겁게 느껴졌다.

“……선배?”

답답함에 짓눌린 나머지 애리얼은 렉시우스를 불렀다. 그러자 그가 다가오는 것으로 화답했다. 아까 붙어 이동하던 때만큼 둘의 사이가 가까워졌다.

“거짓말로 느껴지지는 않네.”

렉시우스가 말했다. 숨결까지 느껴질 만큼의 거리에도 애리얼은 물러서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계속 무덤덤했다. 그가 애리얼을 다시 잡아채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안심되는 상황은 아니었다.

애리얼의 얼굴은 선명하게 얼어 있었다. 렉시우스의 눈이 희게 질린 그녀의 표정을 샅샅이 훑었다.

겁먹은 기색이 확연한 애리얼의 모습에 렉시우스는 굳혔던 입꼬리를 느른히 풀었다.

“긴장 풀어. 누가 보면 혼내는 줄 알겠네.”

렉시우스가 드디어 여느 때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웃었다. 시원하게 곡선을 이룬 입술의 모양새에 애리얼은 막힌 숨이 뚫린 것같이 안심하는 자신을 느꼈다.

“선배…….”

“목, 토. 밤 여덟 시에 와.”

그는 손가락을 펴서 얼이 빠진 듯 보이는 애리얼의 이마를 툭 건드리고 갔다. 제 할 말만 던지고 용건을 끝낸 렉시우스 때문에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장신의 체구가 애리얼을 지나쳐 건물 사이를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렉시우스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애리얼은 뒤늦게 그가 사라진 길목을 바라보았다. 건물이 끝나는 자리에는 햇빛이 쨍쨍하게 비치고 있다. 애리얼은 그쪽으로 걸어 나갔다.

‘목, 토. 밤 여덟 시……. 도서관으로 오라는 말이겠지?’

애리얼은 그가 남기고 간 말을 곱씹다가 내리쬐는 햇살에 고개를 들었다. 정오가 가까운 시각. 점심도 먹지 못해 그녀는 배가 고팠다.

애리얼은 기숙사로 돌아갈 길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변에는 붉은색 벽돌 위에 하얀 지붕을 얹은 커다란 건물이 몇 채 모여 있었다. 하얀 창틀 너머로는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잔디가 일정하게 다듬어져 있고, 하얀 길이 한곳으로 모여 중앙 광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전혀 모르는 장소였다. 스치며 본 적도 없는 곳.

“여긴 어디야?”

애리얼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여기저기를 서성거렸다. 이곳엔 지나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나보고 어쩌라고…….”

타의로 이루어진 순간 이동 탓에, 그녀는 갈 길을 잃었다. 이런 곳에 저 혼자 버려두고 떠난 렉시우스가 원망스러워졌다.

‘도와줄 거면 끝까지 좀 도와주지.’

그나마 휴대폰이 있으니 대강이라도 지도를 볼 수 있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무작정 걷기보다는 위치 파악을 한 뒤에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애리얼은 그늘을 찾아 들어간 뒤 근처 벤치에 앉았다. 머리 위로 스치는 나뭇잎 소리가 참 평화로웠다. 스카이라와 렉시우스의 기 싸움에 휩쓸렸던 방금이 실감이 안 갈 만큼.

‘편하다.’

스치는 미약한 바람과 풀 내음에 잔잔한 안식을 취하며 애리얼은 잠시 눈을 감았다.

휙휙 바뀌는 주변을 인식할 새도 없던 강제적 순간 이동과 달리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낯선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공략 대상이 없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느긋해지다니.’

애리얼은 해방감을 느끼며 크게 기지개를 켜고는 눈을 떴다. 꽤 오래 눈을 감은 탓인지 그늘로 약하게 비쳐 들어온 빛마저 시리게 다가왔다.

망막이 잠깐 흐렸다가 금세 명료해졌다.

그렇게 바라본 애리얼의 정면으로 하얀 교복이 보였다. 잘 잠근 블레이저와 단추를 두어 개 푼 셔츠.

“누구…….”

애리얼은 고개를 위로 향하며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렉시우스와 닮은 차분한 금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나 길게 내려와 눈가를 스치는 머리칼의 색이 렉시우스와는 다르게 금빛이었다.

무감정하게 굳은 남자의 얼굴이 무뚝뚝하게 시선을 맞춰 왔다.

그때서야 애리얼은 제 앞의 인물이 레이신이라는 걸 인식했다.

“……!”

애리얼은 흠칫 소스라치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러다 벤치 등받이에 세게 부딪쳐 등허리가 얼얼했다.

레이신이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나타난 바람에 애리얼은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았다. 반면 레이신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애리얼은 놀란 가슴을 추스르곤 겨우 말을 꺼냈다.

“공자님…… 서하, 여기엔 무슨 일로…….”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말을 끊어 먹고서 제 본론만 꺼내는 레이신의 말본새가 애리얼은 어쩐지 익숙했다. 스카이라, 렉시우스…… 레이신의 화법은 그들의 화법과 닮아 있었다.

애리얼은 침착하게 질문했다.

“무엇에 대한 말씀이신가요?”

“대공자.”

또다시 툭 꺼내진 그의 말엔 맥락이 없었다.

레이신은 꽤 불편한 화법을 구사했지만 애리얼은 잠자코 들었다. 평소 무시만 일삼던 인물이 하는 말이니, 궁금해서였다. 심지어 대공자라면 렉시우스가 아닌가.

레이신은 한 단어를 던지고는 애리얼의 반응을 보더니 마저 말을 이었다.

“렉시우스는 제 수하를 별로 아끼지 않는다.”

“…….”

“대우가 박하기 그지없으니 너는 버티지 못할 거다.”

냉담하게 전한 레이신의 말은 애리얼을 향한 경고인 동시에 충고였다. 어쭙잖게 알짱거리지 말고 꺼지는 게 이로울 것이라는 싸늘한 조언.

그것만 남기고 레이신은 휙 돌아서서 가 버렸다.

애리얼만 시무룩하게 남겨졌다. 먼저 말을 걸길래 연결될 거리라도 생기나 싶었더니, 되레 물러나라는 발언만 들었다.

‘그래도…… 나한테 꽤 신경이 쓰이니까 저러는 거겠지?’

애리얼은 레이신에게 완전히 무시당하지 않는 게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애리얼을 공기보다 못한 존재로 가벼이 치부한다면 굳이 저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나저나 갑자기 렉시우스의 이야기라니.’

심지어 레이신은 애리얼이 꼭 험한 꼴을 볼 거라는 듯이 말했다. 렉시우스가 수하를 다루는 방식이 좋지 않으니 다치기 전에 그녀더러 도망치라는 소리로 들렸다. 신기한 게, 언뜻 들으면 걱정 같기도 한 말이었다.

‘레이신은 그럴 사람이 아닌데.’

레이신이라면 애리얼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볼까 봐 그녀를 염려하는 척 경고했다는 게 더 어울렸다. 렉시우스가 애리얼로 인해 사고를 저지를 것 같으니 그녀 쪽에서 먼저 떨어져 나가라는 소리 정도야 레이신이 해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근데 그렇게 되면, 렉시우스가 주변을 휘말리게 할 만큼 큰일을 치는 사람이 된다는 게 문제였다.

“설마…….”

애리얼은 제 추측을 부인하며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그녀는 계속 렉시우스와 어울려야만 하는 처지였다. 렉시우스가 그녀의 추측과 같은 사람이라면 함께하는 그녀도 피를 볼 것이 뻔했다.

애리얼은 자신의 추측이 부디 완전히 틀려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렉시우스의 프로필 창이 추측에 신빙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극도로 불안한 한 줄의 문장이…….

『*특이한 폭력성에 주의』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애리얼은 되뇌어 말하며 불안감을 억지로 흩었다.

사실이더라도 그녀는 렉시우스와 거리를 둘 수 없었다. 특별 엔딩을 보려면 그의 호감도가 필요하니까.

“……아!”

이곳에 눈 뜬 첫날, 머릿속에서 아스라하게 울렸던 소중한 이의 목소리가 애리얼을 다시금 뒤흔들었다. 곧 이 목소리마저 잊어버리기 전에 그녀는 어떻게든 기억을 찾고 싶었다. 기억을 찾아서 돌아가야 했다.

“……아! 얼른!”

음성만 남아서도 소중한 이. 그 사람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해서 그녀는 더 간절했다.

***

레이신과 헤어진 후, 애리얼은 어찌어찌 쉽게 기숙사로 돌아왔다. 휴대폰을 확인하려던 차에 마침 지나가던 사용인 한 명이 그녀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사용인은 애리얼이 흰 교복을 착용하지 않았음에도 귀빈이라는 걸 용케 판별하고서는 곧장 상부에 연락을 넣어 차까지 대령했다.

그 덕분에 애리얼은 걸었다면 상당히 걸렸을 거리를 단숨에 이동해 기숙사 입구에 내렸다. 그동안 휴대폰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애리얼은 누굴 피할 생각도 없었고, 꼭 마주쳐야겠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없었다. 그녀는 여기저기 휩쓸리느라 지쳐 있었다. 기숙사에서까지 쉬지 못하고 복잡한 지도를 보며 마음 졸이기는 싫었다.

그래서 휴대폰도 그냥 주머니에 넣어 놓고 꺼내지 않았다. 위치를 확인하면 괜히 신경을 쓰게 되니까 차라리 안 보는 게 속이 편했다.

‘만나면 말이라도 나눠 보고, 아니면 말고.’

애리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정문의 계단으로 올라간 애리얼은 조용한 기숙사 복도를 가로질러 제 방으로 향했다. 거기에서는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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