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오늘 순간 이동 소동에서 처절할 정도로 애리얼을 쫓아오던 이. 스카이라가 애리얼의 기숙사 방문을 막고 기대서 있었다. 겉옷은 어디다 버렸는지 그는 셔츠 바람이었다.
바닥을 향하던 스카이라의 얼굴이 슬쩍 들리며 그녀가 선 곳으로 향했다. 파란 눈이 오늘만 벌써 수 번째 그녀를 찾아냈다.
“이제 왔어?”
말하는 걸 보아 하니, 스카이라는 아까 불가항력으로 헤어진 직후부터 줄곧 여기 있었던 모양이었다.
애리얼도 굳이 피할 생각은 없었기에 휴대폰도 확인하지 않았는데, 조금 후회가 됐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휴대폰을 봤다면 그녀는 도망쳤을 것이었다.
“계속 여기서 기다린 거야?”
“응.”
스카이라는 상당히 음울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대답했다. 애리얼은 그가 곧 렉시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거라는 걸 예측하고 가만히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스카이라의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 용건을 말했다.
그러나 애리얼이 예상했던 내용과는 조금 다른, 상당히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는 질문이 그의 입에서 던져졌다.
“왜…… 나한테 구해 달라고 안 했어?”
“……구해 달라니……. 아까 대공자님과의 일을 말하는 거야?”
“그래. 너, 렉시우스한테 억지로 잡혀 있던 거잖아. 보면 안다고.”
스카이라가 단언했다.
‘아, 보면 아는구나.’
황당하긴 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어서 애리얼은 부정하지 않았다. 괜히 피곤해질 오해를 사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녀는 약간 난감했다.
스카이라는 별 반박 없는 애리얼을 보더니 비슷한 것을 계속 추궁했다.
“그놈이 너한테 협박이라도 했어?”
애리얼은 고개를 저었다. 강제성이 없었다곤 할 수 없지만, 일단 렉시우스는 그녀를 도우려 한 거였다.
스카이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재차 확인했다.
“그럼 억지로 붙들리기만?”
“강제적으로 붙들린 건 맞아. 그렇지만 선배…… 대공자님은 날 도와주려고 하신 거야.”
“뭐?”
화가 났는지 스카이라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렉시우스가 대체 뭘 도와줬다는 건데?”
“네 질문에 내가 곤란해 보여서, 딴에는 도망칠 길을 만들어 주려고 하셨나 봐.”
스카이라는 억지로 길을 막고 애리얼에게 취조하듯 강요한 게 떠올랐는지 입을 닫았다. 그의 표정은 불만으로 가득했지만, 할 말은 없는 모양이었다.
애리얼은 스카이라를 적당히 달래야 할 필요를 느꼈다. 거짓은 섞지 않고 솔직하게.
“어디까지나 대공자님의 입장이야. 나한텐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러운 게 더 컸어.”
그렇게 답하자 그가 누그러지는 게 확연히 보였다.
“그럴 줄 알았어. 그 자식……. 하여튼 방해나 하고.”
“…….”
“아쉽겠지만, 오늘 못 간 중앙관은 내일 같이 가자.”
이야기가 왜 거기로 튀는지 모르겠다. 애리얼은 이번 건 확실히 부정하기로 했다.
“중앙관에는 안 가고 싶어.”
“왜, 또.”
스카이라가 다시금 낯을 확 구겼다. 정말이지 부정적인 쪽으로만 감정이 풍부한 얼굴이었다.
애리얼은 주눅 들지 않고 차분히 제 입장을 전했다.
“황성에 데려가 주려는 호의는 고마워. 하지만 내 입장에선 상당히 부담스러워.”
“왜?”
“그야…….”
애리얼은 말을 이으려다 잠시 멈칫했다. 어떻게 의견을 전해야 할까. 지금 확실히 해 두지 않으면 스카이라에게 계속 휘둘릴 것이다. 그 이상으로 황자비라는 되돌리지 못할 일이 추진될지도 몰랐다. 그러지 않도록 선을 그어야 했다. 그러나 너무 잘라 내서도 안 됐다.
“우리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잖아. 만난 것도 아카데미 오기 전까진 두세 번 정도였고. 그런 사이에 받기에 황성으로의 초대는 너무 과분한 대우야.”
스카이라는 애리얼에게 더 말해 보라는 듯 잠자코 팔짱을 꼈다.
“지금 이렇게 서로 반말하고 이름을 부르는 것도…… 충분히 과분한데, 이 이상은…….”
“내가 어색하다는 거야?”
애리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강 알아들은 스카이라가 냅다 대꾸했다.
‘어색…….’
애리얼은 스카이라의 말을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그녀와 스카이라의 사이를 표현하기에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실제로 그와는 친해질 시간이 필요했다. 황자비라는 제안은 게임적으로 안 될 말인 동시에 현실적으로도 너무 이른 말이었다.
애리얼은 고개를 끄덕여 어색한 거냐는 스카이라의 말에 동의했다. 아직은 그와 어색하니 좀 더 알아 가는 단계를 밟을 필요가 있었다. 그럼 연은 이어 가되 거리는 조금 둘 수 있지 않을까. 스카이라가 자신에게 다가서는 속도라도 조금 줄일 수 있다면 좋겠다.
“아직 너에 대해서 잘 모르겠어. 좋아하는 게 뭔지, 싫어하는 건 뭔지. 뭘 하면 화를 내는지…….”
“…….”
“좀 더 너에 대해 알고 나서, 너와 친밀해진 다음에…… 사적인 초대를 받아야 나도 부담스럽지 않을 거 같아.”
“…….”
“그러니까, 지금은 황성에 가고 싶지 않아. 미안해.”
애리얼은 휩쓸리지 않기 위해 확실한 거절을 덧붙였다. 그녀가 말하는 내내 찌푸려져 있던 스카이라의 얼굴은 끝내 펴지지 않았고, 그는 잔뜩 심통이 난 채였다. 가만히 듣기는 했지만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네가 느끼기엔 내 대우가 지나치게 너그러웠던 모양이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는데 말이지.”
스카이라의 말투에서 가시가 느껴졌다. 그는 꽤 감정이 상한 모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삐쳤다는 말이 더 적절했지만 말이다.
“네가 그렇게 바라 마지않는 대로 거리를 둬 주지.”
스카이라의 음성은 애리얼을 처음 만났던 때와 비슷할 정도로 차가워졌다. 그는 인사도 없이 애리얼의 옆을 지나쳤다.
애리얼은 뒤로 돌아 그의 떠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며, 단 한 번도 뒤돌지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의 방 문 앞을 오매불망 지키며 기다렸던 사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뒷모습이 너무 쌀쌀맞아서 애리얼은 무심코 휴대폰을 꺼내 스카이라의 프로필 창을 확인했다.
『스카이라 본 아이테르 르블레탄
▷당신을 향한 호감도: ♥♥(당신을 강하게 의식합니다. 당신에게 먼저 말을 거는 일이 많아집니다.)
▷현재 위치: 아카데미 제1 기숙사 동 - 2층 복도』
변하지 않은 스카이라의 호감도가 그녀를 반겼다. 빈 복도에는 여전히 그가 흘리던 냉기가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정말로 그냥 삐치기만 한 건가?”
애리얼이 고개를 갸웃했다. 헤어질 때 보인 그의 얼음장 같은 행동들이 그저 투정으로만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
「수요일
오전 10시 - 마공전(아카데미 12관, 제5 교육실)」
어렵다고 정평이 난 마공전 수업은 신입생이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모인 인원은 절대 적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껏 들은 그 어떤 수업보다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애리얼은 거대한 교육실을 꽉 채운 사람들 틈에서 조용히 구석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모인 사람의 반 이상이 재수강 인원인 것으로 보였다. 마공학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서류를 든 학생들이 가득했다.
‘얼마나 어렵길래…….’
심지어 실습수업이라 애리얼의 걱정은 이전 수업보다 배는 되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자꾸만 가만히 있지 못하고 얇은 실습용 교재 귀퉁이를 만지작댔다.
‘듣다가 도저히 못 따라갈 거 같으면 그냥…….’
애리얼은 복잡한 얼굴로 고민했다. 그녀의 손이 교재 페이지 사이에 끼워 둔 임시 시간표를 꺼내 들었다.
“그냥 빼 버릴까.”
“뭘 빼?”
대뜸 묻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애리얼의 옆자리를 풀썩 차지하고 앉았다. 그 목소리가 무척 익숙해서, 애리얼은 보지 않고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보나 마나 렉시우스일 것이다.
“저하께서도 이거 들으세요?”
주변에 사람이 많은 관계로 애리얼은 존댓말로 그를 대했다.
“난 그냥 도강.”
“그렇습니까.”
애리얼은 계속 시간표에만 눈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난입도 여러 번 반복되니 익숙해졌는지, 갑자기 나타난 렉시우스에도 놀라지는 않았다. 어쩌면 오늘 만날 수도 있겠구나, 하고 예상해 각오한 덕도 있을 것이다.
애리얼의 시큰둥한 반응에 렉시우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이젠 아예 보지도 않고 말하네.”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래요.”
“나한테 질린 건 아니고?”
렉시우스가 도발적으로 떠보는 소리를 던지자 그제야 애리얼이 고개를 돌렸다. 손끝에 쥔 시간표가 그녀의 고민을 보여 주고 있었다.
렉시우스가 그걸 넌지시 보고서 물었다.
“뺀다는 게 마공전이야?”
“못 따라갈까 봐요.”
“그걸 왜 벌써 고민해.”
“재수강 인원이 많아 보이는 게, 아무래도 신입생이 들어도 될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서요.”
“별걱정을 다 한다.”
애리얼로선 나름 진지한 관찰에서 나온 고민거리였는데, 렉시우스는 싱겁다 못해 쓸데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런 주제에 그의 손은 애리얼에게 들려 있던 시간표를 쓱 빼앗아 갔다.
“……돌려주세요.”
“싫어. 누가 짜 준 건데 함부로 바꾸려고.”
렉시우스가 검지와 중지 사이에 시간표를 끼우고서 약 올리듯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애리얼은 조금 뚱한 표정으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힘들어서 못 버티면 저하께서 책임이라도 져 주실 건가요?”
“좋아. 책임져 줄게.”
흔쾌히 답하는 렉시우스의 눈빛이 의미심장한 웃음기를 담았다.
그에 애리얼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동시에 호기심도 일었다.
“어떻게 책임지실 건데요?”
“제대로 굴려 줄게. 나한테 한 달만 시달리면 마공전 정도는 쉽게 버틸걸?”
“……그러다 쓰러지면요?”
“그러기 전에 낫게 해 줄게.”
“…….”
“왜? 내가 못 할 거 같아?”
너무 잘할 거 같아서 문제였다. 애리얼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책임은 안 지셔도 돼요. 알아서 할게요.”
“새벽같이 도서관에 튀어 오던 일주일 전의 근성은 어디 갔냐?”
“일주일 동안 다 썼나 봐요.”
애리얼의 거절에 렉시우스는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더니 시간표를 휙 던졌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얇은 종이가 애리얼의 교재 위로 안착했다.
“싫으면 말아.”
렉시우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의자에 상체를 늘어트리고 고개를 젖혔다.
애리얼은 돌아온 시간표를 교재 사이에 다시 끼워 넣고는 렉시우스를 보았다. 낮잠이라도 취할 것처럼 의자에 늘어진 그의 옆태가 시야에 가득 찼다. 날렵한 턱선부터 기다란 목선과 다부진 울대, 푹 파인 쇄골. 유려하게 이어지는 몸 선을 저도 모르게 따라가다가 열린 셔츠 사이로 보이는 흉근 안쪽의 가슴골을 보고는 급히 눈을 돌렸다.
그런 행동이 오히려 시선을 끄는 걸 모르는지.
“볼 거면 티 내지 말고 봐.”
“시, 실수였어요. 죄송합니다. 이제 안 볼게요.”
애리얼이 더듬거리며 사과했더니 렉시우스가 낮게 웃었다. 애리얼은 그가 뭐라 더 놀릴 줄 알았지만, 그게 다였다.
렉시우스를 잠시 바라보던 애리얼은 이윽고 눈을 돌려 교탁이 있는 정면 아래를 보았다. 아직 교수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자리는 거의 다 찼다.
인원이 많은 강의는 주로 반원 형태의 계단식 교육실에서 이루어지곤 했다. 애리얼이 듣는 네 개의 수업은 전부 이런 교육실에서 진행되었다. 제일 뒤에 앉으면 내부가 한눈에 담겼다. 다만 교수와의 거리가 너무 멀어 명당으로 불리는 자리는 아니었다.
적당히 중간 줄에 앉은 애리얼은 제 자리에 만족해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워 고개를 돌리기 전까진.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