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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46화 (46/264)

46화

‘왜, 돌아봤을까…….’

이상하게 쿡쿡 찌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뒷줄을 돌아본 애리얼은 곧장 후회했다.

교육실에 마련된 좌석 중 가장 끝줄 중간 자리에, 어제도 마주쳤던 얼굴이 보였다. 스카이라, 그의 벽안이 화살이라도 쏠 기세로 애리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리얼은 그를 어색하게 느끼며 눈을 피했다. 그러나 스카이라는 제 시선을 굳이 감출 생각도 없이 줄곧 애리얼만 보았다.

‘모르고 있었다면 편했을 텐데.’

애리얼은 잠깐 그의 눈치를 보다가 묵례로 인사를 전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한번 인식하니 와 닿는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뒤통수가 뚫릴 것 같았다.

스카이라가 거리를 두겠다고 엄포를 놓은 게 당장 어제였다. 그런 그를 다음 날 같은 수업에서 마주치는 건, 애리얼에겐 정말이지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심지어 애리얼의 옆자리에는 렉시우스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렉시우스랑 말하던 것도 그가 다 봤을 게 뻔했다.

오해를 사기에 아주 딱 좋은 상황이었다.

애리얼은 뒤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더 따갑게 느껴졌다.

사실 애리얼이 크게 잘못한 건 없었다. 렉시우스가 멋대로 앉은 거고, 심지어 애리얼은 거리를 두고 존댓말로 렉시우스와 대화했다. 그녀는 스카이라가 옆에 앉았어도 똑같이 그랬을 거였다.

그런데도 애리얼은 이 상황을 스카이라에게 해명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근데, 뭘 해명해?’

애리얼의 머리에 당연한 의문이 한발 늦게 떠올랐다.

‘렉시우스랑 나란히 앉은 거? 아니면 렉시우스랑 대화한 거?’

이런 식으로 따지면 끝이 없을 것이다. 애리얼이 사사건건 그에게 해명할 것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애초에 거리를 두자고 한 건 스카이라고, 애리얼은 그냥 황성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게 다였다. 오히려 해명해야 할 쪽은 지금도 눈치를 주듯 광선과 같은 시선을 쏘는 스카이라였다.

‘저렇게 굴 거면, 차라리 와서 따지기라도 하지.’

애리얼은 스카이라가 저러고 있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차라리 그가 와서 화라도 내면 편할 것 같았다.

조금이지만 애리얼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렉시우스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뭘 그렇게 눈치를 봐?”

“아, 그게…….”

“혹시 이제 알았어? 뒤에 스카이라 있는 거.”

“알고…… 계셨어요?”

“당연히 알았지. 아주 뒤통수가 뚫리겠는데, 모를 수가 있나.”

진작 알고 있었다고, 렉시우스는 평온하게도 말했다. 도강으로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한 저의가 의심되는 대목이었다.

애리얼은 당황한 눈초리로 조심스레 렉시우스를 추궁했다.

“설마 일부러 제 옆에 오신 건…….”

“글쎄.”

렉시우스는 적당히 얼버무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가 나타났다.

애리얼은 이 유쾌하지 못한 상황을 감내하며 수업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 인원이…….”

교탁 앞에 선 교수가 눈대중으로 학생 수를 세었다. 200명은 거뜬히 수용할 교육실이 가득 차 있음에도 익숙한 눈치였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스르르 훑던 교수가 한 군데서 놀란 듯 멈칫거렸다. 회갈색 눈동자가 렉시우스가 있는 자리를 향했다가 비스듬하게 시선을 틀었다. 예상외의 그의 존재에 교수는 당혹감을 느낀 듯 잠시 침묵했다.

아카데미 교수들은 제국의 최고 계급을 마주하더라도 동요하지 않도록 사전에 그들의 시간표를 고지받았다. 거기서 교수가 확인한 대공자의 시간표에 마공전은 없었다. 황자의 존재만을 각오하고 온 교수의 입장에서 도강 중인 대공자는 충분히 놀랄 만한 사안이었다.

심지어 대공자는 신입생 시절에 이미 고학년 과목인 마공전을 수강하고 높은 성적을 받았었다. 이 강의를 들을 이유가 추호도 없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건 황자도 마찬가지였지만.

잠시 의문에 잠겼던 교수는 베테랑답게 금세 침착해져서 수업에 들어갔다. 개강 수업답게 간단한 과목의 소개와 방향, 주의 사항과 앞으로의 일정을 전달했다.

마공전은 마법에 과학과 도구를 결합해 펼치는 실습이며, 따라서 수업은 교육실보다는 야외 실습장에서 더 자주 이루어졌다.

교수는 대련이나 전략적인 전투 실습이 빈번하니 다칠 수 있다는 주의 사항도 빼놓지 않고 강조했다.

그걸 듣는 애리얼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예상은 했지만, 교수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체감되는 게 달랐다. 그 와중에 그녀는 뒤에서 쏘아지는 시선에도 신경이 쓰였다.

‘역시 빼 버릴까……. 실습은 마력전 하나도 벅찬데.’

애리얼이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교수의 전달 사항은 끝을 향해 갔다.

마지막으로 교수가 본격적인 실습은 수강 인원이 확정되는 한 달 후부터 이루어진다는 말을 전하던 때, 렉시우스가 돌발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교수.”

렉시우스의 목소리는 낮고 정중했으나 부르는 투가 건방졌다. 교수를 저리 간단하게 칭할 수 있는 이는 아카데미에 몇 없으리라.

“예. 무슨 일이십니까.”

교수는 기분 나빠 하는 기색도 없이 담담히 렉시우스를 대했다.

그렇게 모두의 이목이 모인 가운데, 렉시우스가 싱긋 웃었다.

“오늘 전달 사항은 그걸로 끝인가?”

“그렇습니다. 첫 수업이니만큼 길게 잡지는 않았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마칠 예정입니다.”

“그럼 내가 제안을 하나 해도 되겠지.”

“예. 편히 말씀하시지요.”

“간단하게 체험 학습을 하나 하자.”

“체험 학습이라면…….”

교수가 불안한 듯 말끝을 흐렸다. 애리얼도 덩달아 불안감을 느끼며 렉시우스를 보았다.

잠깐의 시선에 렉시우스는 애리얼과 눈을 맞추고서 친절하게 웃어 줬다. 널 위한 거야, 라고 말하듯이.

“대련을 제안하지.”

그는 끝까지 교수가 아닌 애리얼을 눈에 담으며 의견을 마무리했다.

***

짧게 끝날 예정이었던 마공전 개강 수업에서는 때아닌 대련 실습이 이루어졌다.

교육실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군말 않고 아카데미 내의 실습장으로 향했다. 교수도 뭐라 못 할 대공자의 제안이니 누구도 반대할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같은 수업을 듣는 황자 정도가 반대할 수 있었겠지만, 웬일로 그도 별말이 없었다.

황자와 대공자를 선두로, 아카데미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이동한 200여 명의 학생이 실습장 앞에 나란히 줄지었다.

콜로세움을 방불케 하는 거대한 실습장의 높다란 철문이 열렸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소음이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쾅! 채앵! 콰앙!

살벌해 보이는 실습장의 안으로, 애리얼은 사색이 되어 걸어 들어갔다.

실습장의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게 다가왔다. 평평하게 다져진 연갈색의 흙바닥이 원형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 주변으로 3m는 되는 계단식 좌석이 빙 둘려 있다. 그 좌석의 뒤를 드높은 벽이 다시 감쌌다. 뻥 뚫린 천장으로는 따가운 태양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 장소의 중앙에서 100여 명 정도의 학생이 난투극을 벌이고 있었다. 이리저리 스파크가 튀고 응축된 마력들이 날아다녔다. 부옇게 흙먼지를 날리며 무차별적으로 서로를 공격했다.

애리얼은 창백한 안색으로 벽에 붙어선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뜻밖의 관전자에도 개의치 않고 싸움인지 실습인지에 열중했다. 대여섯이 한 번에 부딪치자 시뻘건 스파크가 팍 튀어 올랐다.

애리얼은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스파크는 그녀의 근처에도 오지 못하고 툭 끊겼다.

애리얼은 주춤거리며 팔을 내리곤 눈앞을 확인했다. 결계가 쳐져 있는 모양인지, 어느 부근을 기점으로는 흙먼지도 마법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싸우라고 작정하고 만든 것 같은 완벽한 투기장의 전경이었다.

‘이런 게 아카데미 같은 교육 시설의 실습장이라고?’

애리얼은 두려움을 느끼고 움츠러들었다. 탈출을 어렵게 하는 거대한 벽이 소름 끼치게 웅장했다. 이곳엔 겁을 먹지 않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적이고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여기서 싸우면…… 다쳐도 크게 다칠 것 같은데.’

잔뜩 긴장한 그녀의 옆에는 어느새 이 일의 원흉이 나란히 서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취미 한번 나쁘네.”

난장판에 가까운 실습 장면을 본 렉시우스가 키득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그는 누군가를 찾듯 계단 위의 좌석으로 눈을 향했다.

애리얼은 렉시우스의 웃음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돌렸다. 햇빛 아래 짙은 황금색을 띠는 그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무심코 그 시선을 따라갔다. 계단 형태의 좌석이 줄줄이 이어진 끝, 발코니처럼 별도로 구분된 높은 장소가 눈에 띄었다.

렉시우스의 시선은 거기에 멈춰 있었다. 애리얼의 눈도 같은 곳에서 멈췄다.

하얀 난간을 두른 안쪽엔 일반 자리처럼 나무 의자가 아닌 푹신한 카우치와 소파를 놓아두었다. 누가 보아도 상석인 자리. 강당에서 보았던 높다란 다섯 개의 좌석을 떠올리게 만드는 특별석이었다.

그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남자가 벨벳 소파에 다리를 꼬고서 아래의 난투극을 내려다보았다. 휘장을 한가득 매달고 붉은색의 긴 망토를 두른 채 앉아 있다. 그의 금발이 뚫린 천장으로 내리쬐는 햇살에 화려하게 반짝거렸다. 오페라라도 감상하듯 우아한 자태였다.

‘황태자다.’

애리얼이 알아본 순간, 데본시아도 기가 막히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저 멀리서 그녀를 포착하고 손짓까지 했다. 이리 오라는 듯, 매끈한 손등을 곱게 펴서 까딱까딱.

그 귀신같은 눈썰미에 애리얼의 몸이 움칠 떨렸다.

‘하필이면 왜 또 눈이 맞아서…….’

애리얼은 못 본 체를 하고 싶었으나,

“오라는데?”

같은 곳을 보고 있던 렉시우스가 슬그머니 그녀에게 일러 주었다. 못 들은 체까지는 할 수 없었던 애리얼은 어쩔 수 없이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야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옆에 붙어 있는 렉시우스가 그녀를 이끌어 준 덕에 금세 상석으로 갈 수 있었다.

애리얼은 렉시우스를 따라 높은 계단의 뒤로 돌아 감춰진 계단을 죽 올랐다. 그는 발코니의 난간과 같은 하얀 난간을 쥐고서 붉은색의 태피스트리가 쳐진 문까지 향했다.

렉시우스의 걸음이 계단 끝에 닿자 대기하던 시녀가 문을 열어 둘을 환영했다. 허리를 숙이는 시녀의 너머로, 붉은 망토를 늘어트린 고상한 뒷모습이 보였다.

“난 애리얼만 부른 건데.”

데본시아의 나긋한 어조가 렉시우스를 박대하며 날아왔다.

렉시우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당히 걸음을 옮긴 그는 비스듬히 놓인 카우치로 가 앉았다. 아래의 난장판이 잘 보이면서 데본시아와도 시선이 마주하는 자리였다.

렉시우스의 눈이 정복 차림의 데본시아를 훑었다.

“교복도 안 입고, 불량 학생이네.”

“중요한 외교 업무를 마치고 오느라.”

“네가 일도 해?”

“늘 일하지. 손님도 있는데 오해할 농담은 피해 줄래.”

데본시아가 손님이라는 단어를 꺼내자, 렉시우스의 눈이 자연히 애리얼에게 향했다.

그녀는 아직 문가에 서 있었다. 명령이 없으니 감히 황태자의 옆에 합석할 수는 없었다.

사적인 자리라면 어느 정도 재량으로 움직였겠으나, 이곳은 황태자의 보좌관과 더불어 시녀들이 지키고 있는 자리였다.

물론 눈이 얼마 없는 자리였어도 애리얼이 데본시아의 옆을 선호하지는 않았으리라.

아나스타샤의 존재를 안 이후부터 데본시아는 그녀에게 더없이 거북한 상대가 되어 버렸다.

그의 옆에 앉을 바엔 차라리 홀로 서 있는 게 애리얼은 더 마음 편했다. 아니면 그나마 렉시우스의 옆에 앉는 게 나았고.

애리얼은 마침 자신을 바라보는 렉시우스에게 물끄러미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렉시우스는 그녀가 원하는 것을 말해 주지 않았다. 결국 데본시아가 렉시우스보다 먼저 그녀를 불렀다.

“애리얼.”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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