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네, 전하.”
애리얼은 탄식이 나오려는 걸 참고 무던히 데본시아의 부름에 응했다. 그녀가 문가에서 벗어나 소파 근처로 다가가니 데본시아가 제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톡톡, 그의 손에 벨벳 소파가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앉을래?”
“감사합니다.”
애리얼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조심스럽게 착석했다. 소파가 별로 넓지 않아서 데본시아와의 거리는 불과 두 뼘 정도였다. 그녀는 좌불안석으로 긴장했다.
렉시우스는 매정하게도 애리얼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를 보던 그의 눈은 금세 데본시아를 향해 있었으며, 데본시아에게만 대화를 걸었다.
“밑에 저거, 네가 시킨 거지.”
“수업이 무료해서. 내 마력이 든 마도구를 하나 걸었거든.”
“그걸 빌미로 저 짓을 벌인 거야?”
“모두에게 하사할 순 없잖아.”
“그래서 저 무식한 짓거릴 시켰다고.”
“그런 적 없어. 그냥 날씨가 맑으니 실습장이 좋아 보인다고 말했을 뿐.”
“어련하시겠어.”
그들은 평범한 일상 대화를 주고받듯 말했지만, 애리얼은 조금 소름이 끼쳤다.
아래의 싸움은 상당히 격했으며, 부상자도 드문드문 나오고 있었다. 데본시아는 그저 재미로 빌미를 던져서 저런 난투가 나도록 유도했다. 그것도 자기들끼리 스스로 합의해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이건 그가 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조종하는 데에 능숙하다는 의미였다.
“언제 끝나.”
“누구든 하나 남으면 끝나겠지.”
“이쪽도 써야 하는데, 빨리 끝내 봐.”
“그건 내 소관이 아냐.”
데본시아가 미미하게 웃는 얼굴로 능청을 떨었다. 이 짓을 벌인 장본인인 주제에 강 건너 불구경이다. 여태 태연하게 그를 받아 주던 렉시우스마저 불만스러워하는 표정을 했다.
“네가 그러면 어떡하냐. 저거 도대체 언제 끝…….”
쾅!
렉시우스의 볼멘소리 도중에 커다란 폭파음이 울렸다.
재가 날리고, 탄내가 났다.
공간이 진동하는 듯한 전율이 애리얼의 피부를 타고 올랐다. 입 안에서 쓴맛이 도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오감이 모두 한데 모여 큰 소음이 울린 아래로 향했다.
결계가 산산이 부서졌다. 알이 깨진 것처럼 단면이 뾰족하게 조각났으며, 그 모서리들이 희게 빛을 발했다. 박살 난 사이로는 재와 흙먼지, 소량의 피 그리고 학생들이 쏟아졌다.
그 참상의 지척에 스카이라가 서 있었다. 아마도 그가 커다란 소음의 원인일 것 같았다.
렉시우스가 아래의 상황을 내려다보며,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본인 장기라고 아주 속 시원하네.”
“아, 결계 내가 친 건데.”
데본시아가 장난스럽게 앓는 소리를 했다.
렉시우스는 데본시아의 농을 들은 체도 안 하고 대기 중이던 실습장 관리인을 불렀다.
“빨리 수습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대공자 저하.”
렉시우스의 명령을 받은 관리인이 고개를 푹 숙이곤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흙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자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 기절한 학생들이 한가득이었다. 상시 대기 중이던 의료진과 사용인들이 널브러진 학생들 틈으로 달려 나갔다. 쓰러진 학생들이 바삐 이송되었다.
교수가 관리 관전 하는 가운데, 다음 차례인 마공전 수업의 학생들이 핏자국이 남은 바닥 위에 섰다.
“깨진 건 별수 없고, 다음은 내가 쓴다.”
렉시우스가 기다렸다는 듯 휘릭 손가락을 꺾으며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등에 묘한 문양과 같은 것들이 나타났다가 이윽고 사라졌다.
피나는 노력으로 일주일간 마법의 기초를 다진 애리얼은 그가 행한 것이 결계 마법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등에 나타난 문양이 낙인화술이라는 것도 알아보았다.
결계는 삼 단계가 넘는 특수한 술식을 차례로 시전한 뒤 각 술식에 맞춰 마력을 방출하여 만들었다. 그만큼 결계는 상당히 어려운 마법에 해당해 술식을 그리는 것만 해도 굉장히 까다로우며, 엄청난 양의 마력을 요구했다. 심지어 그 종류가 몹시 다양하기에, 구별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애를 먹는 마법이었다.
그런 결계 마법을 간편하게 쓰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 바로 낙인화술이었다. 손등에 미리 여러 가지 결계 술식을 새기고 마력을 방출한다. 그렇게 하면 복잡한 시전 과정을 생략하고 마력의 방출만으로 바로 결계를 칠 수 있었다.
다만 낙인화술은 고위 등급의 마법 사용자인 경우에만 가능했는데, 신체에 술식을 새기는 건 어지간한 마력량을 가진 게 아니고서야 활용은커녕 유지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고위 마법 사용자…….’
애리얼은 실습장 중앙에 새로이 쳐진 하얀 결계를 보며 경외를 느꼈다.
렉시우스가 새로 친 결계는 앞서 쳐 있던 투명한 결계보단 그 반경이 조금 작았고, 안개가 낀 것처럼 내벽이 뿌옜다. 이전과는 종류가 다른 결계였다.
“굉장해.”
애리얼은 홀로 조용히 감탄했다. 마법을 배우면 배울수록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인재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력 보유자로서 선망이 드는 동시에 두려웠다.
‘수틀리게 하면 진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아무리 그래도 제국 귀족을 쉽게 죽이진 않겠지만, 흙바닥에 널브러졌던 학생들을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력한 힘은 그것만으로도 큰 위협이었다. 거기에 지위와 권력까지 얹어지면 그야말로 폭주 기관차가 되었다. 바로 그게 공략 대상들이었다.
애리얼은 공략 대상들이 막무가내일지언정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지는 않음을 다행이라 여겼다.
아래의 수습을 대충 마친 관리인이 다시 계단으로 올라왔다. 데본시아가 상황을 설명하라며 관리인에게 슬쩍 눈짓을 줬다. 황태자의 눈빛에 관리인은 곧장 고개를 숙인 채 보고했다.
“황자 저하께서 결계를 부수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여파가 크진 않아 수습은 금방 가능합니다. 이제 마무리 수순입니다.”
“그래, 그건 그런데.”
데본시아는 그런 덴 별 관심 없다는 투였다. 그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관리인을 바라보았다.
“한 명도 못 버텼어?”
“네. 전멸이라고 합니다.”
“그래? 아쉽네.”
말과 달리 데본시아는 별로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결과는 결과니까.”
데본시아는 관리인에게 그만 가 보라는 듯 손을 저었다.
“나머지도 잘 수습하고, 기절한 애들 일어나면 보게 대련 결과도 공지로 적어 놓고.”
“알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관리인이 데본시아에게 재차 허리를 숙여 보이고는 물러났다.
관리인이 사라지자 데본시아는 보좌관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였다. 보좌관이 빠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데본시아가 무심한 투로 명령했다.
“마도구는 다시 창고에 가져다 넣어 놔.”
“예, 전하.”
보좌관마저 명령을 받고 물러났다.
제 수하를 물린 데본시아는 아까보다 더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기울인 고개를 등받이에 괴고, 공연이라도 보듯 렉시우스에게 다음을 물었다.
“그래서, 이제 내려가는 거야?”
“필요하면 내려가고.”
“재밌으면 끼어들겠다는 거네.”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거지. 진행 방식은 교수한테 일러뒀으니까.”
렉시우스의 황금색 눈이 데본시아를 지나쳐 애리얼을 향했다. 마주한 그의 노란 눈 속이 아무 감정 없이 건조했다. 애리얼의 속에서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애리얼이 다가올 말을 추측하기도 전에, 렉시우스가 명령했다.
“애리얼, 너도 이제 내려가 봐.”
안도에 머물던 애리얼의 생각을 도려내며, 렉시우스가 드디어 그녀에게 칼을 들이댄 느낌이었다.
『*특이한 폭력성에 주의』
애리얼은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따로 빼 주려나 싶었는데, 역시나 아니었다.
애리얼은 렉시우스의 호감도가 더 필요함을 절감했다. 레이신의 경고는 엇나가지 않았다. 그녀도 어느 정도 예상했으나 바로 다음 날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그냥 심하게 다치지만 않았으면…….’
애리얼은 떨리는 손가락을 말아 쥐며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애리얼이 문을 통과해 계단을 내려갔다.
데본시아는 제 옆에서 멀어지는 애리얼의 모습을 조금 집요하게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은 아주 약간의 미소만 띠고 있을 뿐, 감정이 메말라 있었다.
대화를 지속할 생각인지 데본시아는 렉시우스에게 눈을 향하고서 질문을 던졌다.
“뭐 하러 왔어?”
“대련.”
“애리얼을 데리고? 신입생이잖아.”
“그러니까.”
내내 웃지도 않던 렉시우스가 이제야 입술을 호선으로 휘며 답했다.
“뭘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를 거 아니냐.”
즐거워 죽겠다는 듯 사악한 렉시우스의 면상에, 데본시아가 마주 생긋 웃으며 평했다.
“순 악질.”
“그러는 너는.”
둘은 싱글싱글 웃어 대며 서로 마주 보았다. 동족을 보고서 진한 공감과 함께 약간의 혐오감을 느끼는 눈빛이었다.
***
아래로 내려간 애리얼은 결계를 보고서 기함했다.
안개같이 혼탁한 빛의 막은 위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투명해서 보이지 않아 제대로 된 크기가 가늠되지 않았던 이전의 결계와는 달랐다.
재해 앞에 놓인 사람처럼 애리얼은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을 맛봤다. 본능이 그녀에게 도망치라고 외쳤다. 덜컥 두려움이 밀려와 그녀의 평정은 곧장 흔들렸다.
가시적인 효과란 이다지도 대단했다.
그러나 도망쳐서 될 것이 아니었다.
렉시우스가 앞으로도 애리얼에게 이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이 정도도 감내하지 못하면 렉시우스는 공략할 수 없다.
‘까짓거, 실습장에서 죽지는 않는다잖아.’
렉시우스가 직접 애리얼에게 보장해 줬던 사실이었다. 아카데미의 규칙도 있을 테니, 렉시우스도 그렇게 막 나가지는 않겠지. 심하게 다칠 것 같으면 그때 빠지면 됐다.
애리얼은 두려움과 긴장감을 다스리며 결계로 다가섰다.
적당히 모여 늘어선 학생들의 앞으로 교수가 다섯 명의 황실 기사와 함께 나타났다.
“오늘의 대련 상대로 황실의 기사 다섯 분을 모셨습니다. 각기 나눠서 일대일로 진행되며, 시간은 일인당 최대 십 분으로 잡겠습니다. 대련의 강도는 기사분들이 각자 재량에 따라 조절해 주실 겁니다. 소개는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간단히 룰을 설명한 교수가 한발 뒤로 빠지고, 조교 세 명이 들어왔다. 두 명은 실제 검이 걸린 무기 거치대를 끌고 왔고, 한 명은 품에 검은색 뽑기 상자를 안고 왔다.
“번호는 일 번부터 오 번까지 들어 있습니다. 뽑은 번호에 따라 대련 상대가 결정됩니다.”
뽑기 상자를 든 조교가 간단히 설명하자 학생들은 알아서 일렬로 줄을 섰다. 재수강 인원이 많아서인지 학생들은 익숙한 모습이었다. 뽑기는 자주 있던 대련 추첨 방식인 듯했다. 한 명씩 다가가 자연스럽게 제비를 뽑았다.
“번호를 뽑으신 분들은 각 번호에 맞춰 오 열 종대로 서 주시기 바랍니다.”
조교의 안내에 따라 약 이백 명의 학생들이 빠르게 번호를 뽑은 후 각기 줄을 맞춰 기다렸다.
애리얼은 가장 오른쪽의 줄에 서서 제 번호를 내려다보았다.
「5」
‘이러면 대련 순서도 뒤쪽인 건가? 아니면 별 상관 없이 무작위?’
애리얼은 ‘5’라는 숫자가 뒤쪽의 대련 순서이길 바랐다. 이왕이면 앞의 대련을 보고 참가하는 게 좋았다. 적어도 마음의 준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애리얼이 번호의 의미를 해석할 무렵, 각 열의 앞으로 한 명씩 기사가 와서 섰다.
애리얼은 자신의 대련 상대일 기사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기사들은 모두 같은 검을 차고 같은 제복을 입고 있어서 외견만으로는 상대의 실력이나 특성을 판가름할 수 없었다. 다만 황실의 기사이기에 다섯 모두 강함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교수가 한 명당 최대 십 분이라고 했으니까, 대부분의 대련은 십 분 이하로 끝난다는 거겠지.’
아무리 엘리트로 선별된 황립 아카데미 학생이라 할지라도 아직 배우는 입장이었고, 풋내기에 불과했다. 현직 황실 기사와의 차이는 현격할 게 자명했다.
그중에서도 기초조차 모자란 애리얼은 기사와의 차이가 더 심할 터였다.
애리얼은 심각한 얼굴로 조교가 끌고 온 무기 거치대를 훑었다. 걸려 있는 무기는 대부분 칼 종류. 단도와 장검, 레이피어에 곡도까지. 준비된 무기는 안전장치가 있는 연습용이 아니었다. 죄다 진검이었다.
예리하게 갈린 날을 보니 애리얼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살짝만 닿아도 인간의 피부 정도야 쉽게 잘려 버릴 게 뻔했다.
‘진짜 날붙이로 대련을 한다고? 현직 기사랑?’
애리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마공학은 과학과 도구에 마법을 접목하는 수업. 그렇게 접목한 마법 도구, 소위 마도구라 불리는 것들을 이용하여 대련 혹은 전략 실험을 하는 수업이 마공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애리얼은 마공학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로, 마도구를 사용하는 마공전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던져져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일평생 칼을 쥐어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봐도 다칠 확률이 너무 높았다.
그렇기에, 애리얼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긴장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온몸이 가늘게 떨려 와서 애리얼은 일부러 힘을 주고 섰다.
마지막 학생까지 제비를 뽑아 정렬했다. 상자를 든 조교가 진행을 위해 앞으로 나섰다.
“모두 뽑으셨으니, 이제부터…….”
“나도 할게.”
뒤에 빠져 있던 스카이라가 한마디 했다. 그에 교수와 조교, 기사부터 학생까지 모두 그를 돌아봤다. 이목이 쏠리자 벽면에 기대 있던 그가 몸을 세웠다.
“하나 뽑아 봐.”
황자의 명령에 조교가 굳은 자세로 제비를 뽑았다. 혹시 몰라 황자와 대공자까지 인원에 계산해 넣은 게 다행이었다. 살짝 떨리고 있는 조교의 손가락이 흰 종이를 펼쳐 들었다.
「5」
애리얼과 같은 번호였다.
5번 줄이 술렁거렸다. 5번 줄 앞에 선 기사의 낯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