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스카이라는 희멀겋게 질린 기사를 슬쩍 보더니, 그 앞에 일렬로 죽 늘어선 학생들을 훑었다. 그의 눈이 나란히 줄에 낀 애리얼을 포착하곤 멈추어 그녀를 응시했다.
오래 머물진 않았다. 애리얼이 살며시 고개를 돌릴 즈음에는 그도 눈길을 거뒀다.
“일 번부터 시작해.”
스카이라가 다시 벽에 몸을 기대며 명령했다.
“예, 저하.”
조교가 꾸벅 묵례를 한 뒤 뽑기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는 무기 거치대의 옆으로 갔다.
“여기 있는 무기 중 하나를 골라 대련하시면 됩니다. 대련은 일대일로 진행되니, 앞선 순번이 쓴 무기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무기에 관해 안내한 뒤 조교는 결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련 순서는 앞서 황자 저하께서 명하신 대로 일 번부터 끝낸 후 이 번, 삼 번 순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심판 및 중재역은 제가 맡으며, 대련 중 문제가 생긴다면 저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설명을 마친 조교가 왼손에 술식이 그려진 장갑을 끼더니 결계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 잠시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다가, 이윽고 학생들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일 번 첫 번째 순서부터 결계 안으로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줄 가장 앞의 학생이 걸어 나갔다. 무기 거치대에서 중간 길이의 양날검을 들었다. 처음은 아닌 듯 익숙한 모습이었다. 1번 기사와 학생이 결계 안으로 진입하자, 조교가 그 뒤를 따라갔다.
하얀 막이 일렁거리더니 셋을 삼켰다. 불투명한 결계는 속을 보여 주지 않았다.
‘이래서야 보고 대비하는 건 불가능하겠어.’
애리얼은 사라지는 셋의 모습을 물끄러미 주시하다가 눈을 돌렸다. 위층, 발코니와 같은 하얀 난간 자리에 앉은 이들이 떠올랐다.
연극이라도 보듯이 난투를 감상하던 데본시아.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의도로 이번 대련을 주도한 듯한 렉시우스. 그들의 눈엔 저 속이 보일 것 같았다.
결계의 종류는 많으니까, 시전자이거나 많은 마력을 지니면 안을 볼 수 있는 구조일지도 모르지. 대련하는 이들의 눈에만 보이지 않게 해 놓았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야 앞선 대련을 보고 따라 하는 일을 줄일 수 있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대상이 대비를 못 해야 돌발 상황이 많이 일어났다. 순전히 관전하는 재미를 높이기 위한 방식이었다.
‘단순히 흥미로…….’
애리얼은 추측할수록 그들의 불순한 의도가 진하게 느껴져 거부감이 들었다. 대련 자체는 마공전 수업에서 흔히 이루어지던 것일지 몰라도, 이런 방식은 아니었으리라. 신입생도 섞여 있는 첫 수업에서 이런 식으로는…….
“의료진!”
결계에서 조교가 나와 외쳤다. 오 분쯤 지난 시점이었다.
대기하던 의료진 둘이 들것을 들고 다급히 결계 안으로 향했다. 이윽고 먼저 들어갔던 학생이 결계 밖으로 실려 나왔다. 단순 기절인 건지 외상은 없었다.
대기하던 학생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황실 기사에게 이길 리 없다는 건 알았지만, 기사가 기절까지 시킬 정도로 학생을 봐주지 않았다니. 재량에 따라 행동한다던 기사의 대련 지침에 누구의 입김이 들어갔을지는 뻔했다.
애리얼의 머릿속에 렉시우스와 데본시아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그녀는 그들의 즐거움을 위해 판 위에 놓인 체스 말이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와 다르지 않았다.
‘무서운 인간들.’
애리얼은 기함했다. 공략까지 갈 길이 먼데, 특별 엔딩까지 몸이 남아날까 싶었다. 걱정으로 그녀의 손이 곱아들었다. 쥐고 있던 번호표가 구겨졌다.
기절한 학생을 수습한 조교가 양날검을 쥐고서 결계를 나왔다. 그는 대기하던 다른 조교에게 양날검을 건넸다. 무기 거치대로 돌려놓은 양날검은 망가진 구석 없이 말끔했다. 아예 사용된 적 없는 것처럼.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듯이.
“다음, 들어오세요.”
조교의 말에 두 번째 차례인 학생이 긴장한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신입생은 아니지만, 마공전 수업은 처음인 걸로 보였다. 무기 거치대에서 장검을 집어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학생도 기절한 채로 들것에 실려 결계를 나왔다.
그렇게 백이 넘는 학생이 짧은 시간에 나가떨어졌다.
긴장 상태로 있던 애리얼은 슬며시 눈을 돌렸다. 결계에서 멀어진 시선이 뒤쪽의 벽면으로 향했다. 이 말도 안 되는 기절의 행렬과 그 원흉인 대련. 렉시우스가 고안한 연극 따위를 거부하지 않고 참여한 스카이라의 저의가 궁금했다. 구태여 휘둘릴 필요 없는 그가 왜 이 짓거리에 낀 건지.
여전히 같은 곳에 기대선 스카이라는 차분하게 결계를 주시했다.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사 번 줄 끝났습니다. 오 번 줄, 첫 번째. 들어오세요.”
5번.
스카이라를 향했던 애리얼의 눈이 곧장 결계 쪽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숫자가 불리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지금까진 기절하지 않은 학생이 없었다.
‘제발, 안 아프게 기절했으면!’
5번 줄의 가장 첫 순서인 학생도 같은 생각인지, 안색이 무척 나빴다.
대련으로 기절한 이는 여럿인데, 여러 번 대련에 사용된 무기들은 하나같이 새것 같은 게 기괴했다. 학생들의 무력함을 나타내 주는 징표 같았다.
새파랗게 질려 떨어 대는 여학생이 막 무기를 집으려는 순간, 스카이라가 말했다.
“내가 먼저 하지.”
스카이라는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결계에 들어갔다. 그의 상대인 5번 기사는 사지에 끌려가는 표정으로 뒤따랐다.
대다수가 기절해 약 이백 명에서 몇십으로 준 학생들의 이목이 둘에게 집중되었다. 황자와 그를 지켜야 할 황실 기사가 대련을 하기 위해 사라지는 모습은 굉장히 진귀한 광경이었다.
그렇게 불투명한 막 안으로 두 사람이 사라지고서 일 분도 안 지났을 때였다.
쾅! 콰앙!
첫 번째 결계가 무너질 때 들린 폭발음과 비슷한 소음이 났다.
우유가 든 것처럼 희고 불투명하던 결계 속이 회백색으로 탁하게 흐려졌다. 내부에서 일어난 충격으로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누가 벌인 일인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이윽고 결계는 위에서부터 금이 가더니, 쩌적,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붕괴했다. 삽시간에 부서진 결계의 잔해 사이로 금발의 황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왼손에는 기절해 정신을 잃은 기사가 들려 있었다. 뒷덜미를 붙잡힌 기사의 머리가 바닥으로 늘어졌다.
학생들을 손쉽게 제압한 기사. 그 기사를 손쉽게 기절시킨 황자. 위에는 더 위가 있다는 걸 보여 주듯 그의 압도적인 힘이 선명히 드러나는 결과였다.
스카이라를 보는 학생들의 눈빛에 경외심이 어렸다. 그중에서도 5번 줄의 첫 번째 순서였던 여학생의 눈빛이 가장 열렬했다. 그녀는 두 볼을 발그레하게 붉히고서 스카이라를 구세주처럼 보고 있었다.
스카이라는 기절한 기사를 질질 끌고 와선 의료진 앞에다 휙 내동댕이쳤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기사가 바닥에 축 늘어지자 의료진이 다급히 들것에 실어 나갔다.
애리얼은 기사가 죽은 건 아닐지 걱정될 정도였다.
스카이라의 난입으로 대련은 중단되었다. 오 번 줄의 대련 상대인 기사가 실려 나가고 결계마저 박살 났으니 대련의 재개는 어려웠다.
조교는 당황한 것이 역력한 모습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스카이라가 매서운 눈초리로 조교를 쏘아보자, 그제야 조교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부, 불가피한 사정으로 대련은 중지하겠습니다. 오 번 줄의 학생 여러분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조교가 대련의 중단을 선언하려는 때였다.
하얀 난간에 둘러싸인 발코니 자리에서 누군가가 풀썩 뛰어내렸다. 남자의 깔끔한 착지에 가볍게 흙먼지가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내리쬐는 태양 빛 아래 붉게 타오르는 적발이 그의 신원을 말해 줬다.
굽혔던 다리를 펴고 일어난 렉시우스의 커다란 키가 위압적인 압박감을 선사했다. 실습장에 있는 모두의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
렉시우스는 시선을 즐기며 유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오로지 한 군데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스카이라, 나하고 대련하자.”
렉시우스에게 대뜸 대련 신청을 받은 스카이라는 기가 막힌다는 반응이었다.
“내가 왜?”
“이왕 시비 건 김에 끝까지 하라고.”
“…….”
“너, 강의 시작 전부터 나한테 이러고 싶었잖아.”
렉시우스가 스카이라의 속내를 까발리며 자극했다. 그는 스카이라가 어서 예의 그 성질머리를 드러내며 자신에게 달려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스카이라는 상대가 도발한다고 해서 무작정 다 달려들지는 않았다. 예민하고 다혈질적인 면이 있다지만, 그는 제국의 황자다. 어지간한 수위로 성질을 긁어 봐야 스카이라는 인상을 찌푸리는 게 다일 거였다. 렉시우스도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스카이라를 움직이게 하려면 그에게 제대로 치명적인 사안을 뽑아 들고 찔러야 했다.
“황자랑 대공자는 동 계급이잖아?”
렉시우스가 그렇게 말하자 스카이라는 확연하게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반응은 없었다. 이 정도로는 아직이다.
렉시우스는 애리얼이 보는 앞에서 도발의 수위를 더 올렸다.
“그러면 황자비가 되든 대공자의 부인이 되든, 얻는 권력이나 이득은 비슷하지 않을까.”
“……뭐?”
“제안하고 있는 거야.”
렉시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애리얼을 흘겨봤다. 스카이라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연출한 행동이었다. 다만 아주 찰나라서 당사자인 애리얼은 그가 보낸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마주 보고 서 있던 스카이라는 그 잠깐의 눈짓을 명확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데본시아와 똑같이 구는 렉시우스에 파란 눈이 빙글 돌았다. 사납게 안광을 번뜩이는 스카이라의 얼굴에서 이성이 날아가고 있었다. 도발에 응하기 위해 그가 팔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손가락을 꺾으며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등에 술식의 문양이 나타났다. 낙인화술이었다.
붉은색으로 핏줄 같은 무늬가 새겨진 반구형의 투명한 결계가 둘을 감쌌다. 고문과 같은 일을 벌일 때 포로의 탈출을 막고 비명과 피비린내만 내보내는 잔혹한 용도의 결계였다.
스카이라는 그걸 쓸 만큼 렉시우스에게 화가 나 있었다.
조교들이 화들짝 놀라 물러났다. 졸지에 관전자가 되어 버린 학생들도 하나같이 눈을 크게 뜨고서 경악했다.
정작 당사자인 렉시우스는 태연하다 못해 오히려 즐거워했다. 그는 바깥에 있는 조교에게 슬쩍 눈짓하며 무기 거치대를 가리켰다.
“그거 이 안으로 밀어.”
“네? 하지만 이 결계는…….”
“고문용이라서 날붙이는 통과하는 거 몰라?”
“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조교가 망설였던 거였다. 안 그래도 잔인하게 쓰이는 고문용 결계 안으로 날붙이를 밀어 넣으면 일이 커질 것 아닌가.
“너더러 책임지라고 안 하니까 빨리해. 마공전인데 맨손으로 싸우면 나중에 수업이었다는 변명도 못 한다.”
렉시우스가 대수롭잖게 사실을 말하며 조교를 재촉했다. 망설이던 조교는 결국 그의 명에 따랐다.
무기 거치대가 조교의 손에 밀려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끼릭끼릭, 거친 쇳소리를 내며 움직인 무기 거치대는 스카이라와 렉시우스의 사이에서 멈췄다.
그 즉시 렉시우스가 시미터를 뽑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스카이라는 레이피어를 꺼내 쥐었다.
렉시우스는 스카이라가 무기를 쥐자마자 거치대를 발로 찼다. 거대한 쇳덩이나 다름없는 무기 거치대가 스카이라를 향해 넘어갔다. 걸려 있던 무기들이 가시처럼 날을 드러내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기다란 칼 몇 개가 땅에 세로로 박혔다.
스카이라는 쓰러지는 쇠 거치대를 가볍게 피하며 레이피어를 내질렀다. 레이피어의 가느다란 날 끝이 정확하게 렉시우스의 눈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렉시우스가 곧장 시미터를 들어 저를 노리고 들어오는 레이피어를 막아 냈다. 레이피어는 렉시우스의 눈에 닿지 못하고 시미터의 널찍한 칼 몸을 찍었다. 두 무기가 맞닿자 선혈처럼 시뻘건 스파크가 파바박 튀어 올랐다.
렉시우스의 귀에 걸린 은색 이어링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는 싸움에 약점이나 다름없는 이 긴 이어링을 전투 시에 일부러 착용했다. 상대를 기만하는 용도였다.
그에 스카이라는 더없이 불쾌함을 느꼈다. 그는 바닥에 박혀 있던 장검 하나를 뽑아 쥐고서 렉시우스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렉시우스는 레이피어를 막던 시미터의 날을 가로로 눕혔다. 그러자 막혀 있던 레이피어가 앞으로 내질러지며 스카이라의 균형이 약간 무너졌다. 렉시우스는 그 순간 곧장 몸을 숙이고 휘둘러지는 장검 밑으로 벗어났다.
스카이라는 그를 놓치지 않고 곧장 장검의 방향을 바꿔 휘둘렀다. 연달아 날아오는 날에 렉시우스는 허리를 뒤로 꺾었다. 그가 유연하게 상체를 눕히더니, 오른 다리를 들어 스카이라의 손목을 밟듯이 걷어찼다. 그 충격에 스카이라의 손가락이 헐겁게 풀리며 쥐어져 있던 장검이 휙 날아갔다.
수 미터를 날아간 장검이 결계에 부딪쳐 어마어마한 스파크를 만들어 냈다.
채앵! 쾅! 파지지직!
검과 결계가 만난 것뿐인데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하필이면 애리얼의 코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파지직! 파직!
번쩍번쩍, 전기 튀는 효과가 작렬하며 탄내가 진동했다.
애리얼은 긴장감에 바짝 말라 버린 입으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결계의 벽면에서 스파크를 만들어 내던 장검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장검의 칼날은 새카맣게 타서 다시는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와 같은 공방이 몇 초마다 반복되며 빠르게 오갔다. 황자와 대공자의 움직임은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고속의 경지였다. 그 고압적인 전투 장면에 관전자들은 겁에 질리고 말았다.
스카이라와 렉시우스는 서로를 진심으로 죽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애리얼의 눈에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애리얼은 그들의 대화에서 오갔던 ‘황자비’나 ‘대공자의 부인’ 같은 단어들을 기억해 냈다.
‘설마 나 때문은 아니겠지? 설마…….’
하지만 안타깝게도, 애리얼의 추측은 정답에 가까웠다. 렉시우스는 몰라도 스카이라는 그녀가 아니었다면 싸우지 않았을 테니까.
심란한 애리얼의 앞으로 날붙이가 하나 더 날아왔다. 파지직! 콰앙! 소음과 스파크가 그녀의 청각과 시각을 뒤흔들었다.
‘여긴 내가 낄 데가 아니야.’
빠르게 판단한 애리얼은 불똥이 튀기 전에 도망칠 심산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저렇게까지 흥분해서 싸우는 스카이라와 렉시우스의 사이에 끼기는 싫었다.
그러나 애리얼은 멀리 가지 못하고 실습장의 철문 근처에서 걸음을 멈췄다.
철문 앞에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선 황태자가 있었다.
집착당하면 파멸합니다